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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1) -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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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하곡 정운룡의 흔적을 찾아서(1) - 개천정사(介川精舍)에서

하곡 정운룡(1542~1593)의 흔적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먼저 가는 곳은 개천정사(介川精舍)이다. 개천정사는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 오정마을에 있다. 장성현청 소재지인 북일면 오산리에서 개천(介川)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월계리 오정마을이 있다.

오정마을 입구에는 당산나무와 쉼터가 있다. 쉼터가기 전 오른편에 골목길이 있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오정길 86-1이라고 표시된 집이 나온다. 이 집으로 들어가니 언덕 위에 정자 같은 집이 있다. 이 집이 바로 개천정사(介川精舍)이다.

개천정사는 선조 때 장성현감 이계(李溎 ? ~1593)가 세운 학교인데, 현감 이계는 정운룡을 초빙하여 그를 원장으로 추대하고 후진을 가르치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89년 12월 1일자 참조)

<연려실 기술>과 <국조보감>에도 정운룡과 장성현감 이계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진사 정운룡은 장성 사람인데 그 고을에서 행실이 착하며 이름이 있었다. 이때 현감 이계가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가르쳤는데 운룡을 초빙하여 선생으로 삼았다.

그러면 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 1542~1593)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1542년 1월 27일에 장성군 북일면 사동(社洞)에서 출생하였다. 이 마을은 북일면 오산리 바로 뒷마을이다. 부친은 주부 집(緝)이고 모친은 음성 박씨이다. 그런데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삼촌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8)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광옥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고 나주목사를 한 광주의 명망있는 선비였다.

정운룡은 18세인 1560년 무렵에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의 회시(會試)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유인즉 “벼슬을 한다는 것은 본마음을 잃고 몸도 망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마음을 정하고 학문이 높은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고봉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1559년부터 8년 간 사단칠청논변을 한 통유(通儒)이다. 그는 1569년 9월에 성균관 대사성 직을 그만두고 1570년 2월에 광주로 내려왔다. 이후 5월에 낙암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1572년 2월까지 광주에 머물렀다. 이때가 정운룡의 나이 28세, 29세 무렵이다. 고봉 선생은 그를 매우 아끼었고 정운룡 또한 학문에 열중하여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정운룡은 사서를 기본으로 하고 그 중 논어를 정독하였으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도 즐겨 읽고 학문을 실천하는데 열심이었다.

정운룡은 효성도 극진하여 계모 이씨가 성품이 괴팍하여 심한 학대도 받았으나 불평 한 마디 않고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였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몸과 의복을 단정히 하고 계모 이씨 방을 살피는 등 정성스런 보살핌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계모 이씨도 결국 감동을 받아 자기 소생인 아들 덕룡에게 말하기를 “너도 형을 배울 수 있으면 한다. 그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였다.

정덕룡은 술주정뱅이에다 여색을 좋아하여 주위 사람들이 그를 업신여겼으나, 정운룡은 극진한 사랑과 우애로 동생을 이끄니 주위에서 그를 칭찬하였다.

한편 정운룡은 학행을 인정받아 선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학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야를 더욱 넓히기 위하여 1581년에 파주에 사는 우계 성혼(1535~1598)을 찾아갔다. 성혼은 이때 내섬시 첨정을 사직하고 고향인 파주에 낙향하였다. 우계 성혼은 서인의 영수로서 율곡 이이․사암 박순과도 아주 친한 사이었고, 송강 정철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정운룡은 고봉선생 처럼 강학할 서실을 만들었다고 우계에게 말하면서 그 경치를 자세히 이야기 하니 우계는 그곳 경치를 글로 적었다. 이는 우계 성혼 일기에 적혀 있다.

하곡이 장성, 정읍 두 고을 사이 노령산에 승지를 얻었다. 시냇물을 따라 산길로 10리 쯤 들어가면 청태 낀 암벽이 깎아 세운 듯 하고 수석이 청류하다. 3리(1,5키로)를 채 못가서 말을 세워놓고 도보로 그곳에 이르면 북, 동, 남쪽이 모두 다 깊은 낭떠러지가 벽과 같이 서 있고, 서쪽으로 석문 石門이 있다. 동쪽 절벽 위에서는 큰 개울이 흘러내려 30질(100M)이나 되는 폭포가 있고 북쪽 절벽에는 저절로 된 돌계단이 있어 동쪽의 절벽으로 오를 수 있다. 동북쪽 암벽은 한 바위로 되어 있고 그 아래 한 돌이 평평하게 깔려 있어 수백명이 앉을 수가 있으며,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옥처럼 빛이 나니 손으로 물장구를 치며 즐길 만하다.

작은 암자가 북벽 아래 있어 양지쪽으로 면을 했으니 상쾌하고 동쪽으로 폭포수가 보이도다. 칠팔 십 보 앞에 시냇물이 고요하고 깊숙한 암벽 허공 아래로 하얀 물보라를 날리며 떨어지는 기이한 절경을 다 기술할 수 없고 곧은 낭떠러지에 푸른 벽은 황홀하기가 한 폭의 그림 속 같으며 송창(松槍 소나무 숲)이 하늘을 메워 인적이 드물더라.

그러나 사면의 벽이 그리 높지 않아 추운 겨울에도 암자 앞에 쌓인 눈이 먼저 녹는다.
이 암자가 하곡서실이고 시내를 몽계(濛溪)라 하니 이는 다 하곡(霞谷)이 이름 한 바이다. 본래 하곡이 살고 있는 개계촌(介溪村 현 오정리)과는 이십 여리 된다고 한다.

신사(1581년) 8월 5일 문간공 우계 성혼의 일기에서

몽계폭포가 있는 곳은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하곡동 계곡에 있다. 그리고 보니 정운룡의 호 하곡(霞谷)도 바로 이곳의 동네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운룡은 사암 박순, 우계 성혼,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1536~1593) 등과 친교를 맺었다. 특히 송강 정철과는 친하였는데 두 사람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었다. 하곡은 송강에게 술을 삼가라고 조언할 정도였고 송강은 하곡을 외우(畏友)로 대하였다 한다.

문묘 18현 중 한 사람인 중봉 조헌(1544~1592)도 정운룡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1586년 10월,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은 선조에게 올린 붕당의 시비를 논한 상소문에서 이의건(李義健) · 이희삼(李希參) · 변사정(邊士貞) · 정운룡(鄭雲龍)과 같이 공론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중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선조수정실록 1586년 10월 1일)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8월 18일 금산전투에서 의승 영규 등 700명 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는 그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1587년에 정운룡은 나이 46세에 고려 때 효자로 이름난 절효공(節孝公) 서릉의 뛰어난 효행과 학덕을 추모하여 장성군 서삼면에 모암서원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그는 절효공 서릉의 외손이었다.

이 때 장성현감 이계와 지방유림과 향민들이 많은 지원을 하여 주었다. 하곡은 사암 박순에게서 비명을 받아 고읍(古邑) 동정(東亭)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이 모든 것이 그의 노력이었다.

한편 정운룡은 황룡강 상류 개천(介川) 근처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니 박순이 와서 칭찬하기를 “운림(雲林) 속에 초가집 짓고 고요히 앉아, 학문을 연구하니 그 멋을 아는 이 누구일까? 그대만이 홀로 즐김을 경탄하노라“하였고, 장성현감 이계의 아들인 월사 이정구 그리고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도 와서 시를 남겼다 한다.

(<국역 남문창의록 ․ 오산사지>참조)

이제 개천정사를 둘러본다. 개천정사는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를 바라보니 황룡강 뜰이 보인다. 마루에는 개천정사 현판이 붙어 있고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방은 두 칸이다. 방에 들어가니 벽에 여러 개의 편액이 붙어 있다. 여기에는 사암 박순, 제봉 고경명, 오봉 김제민, 월사 이정구, 장성현감 이의록, 정읍군수 이양신, 조명래, 조경호 등 여러 사람의 시가 적혀 있다.

방 벽에 붙어 있는 편액 중에서 먼저 사암 박순(1523~1589)의 시부터 살펴본다.

風塵多少好男兒 풍진다소호남아
誰免勞心逐物移 수면노심축물이
杳杳獨尋山路去 묘묘독심산로거
萬株松下一茅茨 만주송하일모자

이 풍진 세상에 흔하지 않은 호남아(好男兒)
괴로운 심정 벗어나 사물의 깊은 뜻 찾으러 가는 이 누구던가.
아득히 먼 산길을 홀로 찾아가 보았더니
빽빽한 소나무 아래 띠집이 하나 있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시중유화(詩中有畵)이다. 사암 박순은 서정시의 달인이고, 삼당시인 이달과 최경창․백광훈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부안 기생 매창과 사랑을 한 유희경도 박순에게서 시를 배웠다. 유희경은 천민출신이고, 이달은 서얼인데도 그는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한편 기정익이 지은 정운룡 <행장>에는 박순과 정운룡의 일화가 실려있다.

하루는 재상 사암 박순이 휴가를 받아 고향인 나주를 가면서 장성에 들려 혼자서 말 한 마리를 타고 정운룡을 만나러 개천정사를 찾아왔다. 사암은 하곡에게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냐고 책망하였다. 그랬더니 정운룡은 정색을 하고 “재상께서 국가 대신으로서 선비를 위해 몸을 굽히려 하지 않고 도리어 찾아와 보지 않았다고 책망하시다니요”라고 대꾸하였다. 사암은 그 말에 심복하였다.

사림재상 박순은 나주 출신으로 을사사화의 주역이고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을 축출한 강직한 선비이다. 완절의 선비 눌재 박상(1474~1530)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선조 때 재상을 14년간이나 하였다. 호남 출신으로 이렇게 오랜 기간 재상을 한 사람은 아마 박순이 전무후무 할 것이다.

박순은 1572년에 우의정이 된 후로 1579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1586년에 그만두고 경기도 영평현(지금의 포천군)으로 물러가서 살았다.(정운룡과 박순이 만난 시기에 관하여는 <주 1> 참조)

<주 1>

정운룡과 박순의 만남과 관련하여 의문 나는 점이 있다. 개천정사는 누가, 언제 지었는지 하는 점이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 정운룡 편>에는 “정운룡은 개천 근처에 정사를 지었고, 모암서원이 세워진 때에 장성현감 이계(李溎)가 그를 원장으로 추대하고 후진을 훈육케 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편 <선조수정실록>에는 장성현감 이계가 이곳에 학교로 세우고 정운룡을 원장으로 임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개천정사를 장성현감 이계가 세웠다고 하면 그 시기는 1587년으로 볼 수 있고, 정운룡이 세웠다면 그 시기는 1587년 이전이다.

만약 1587년에 개천정사가 세워졌다면 정운룡과 박순이 개천정사에서 만났다는 것은 시기상 맞지 않는다. 이 시기는 박순은 벼슬을 그만두고 포천에 살았다. 정운룡이 개천정사를 세웠다면 정운룡과 박순은 1586년 이전 어느 시기에도 만났을 수 있다.

따라서 정운룡이 개천정사를 세우고 1587년에 장성현감 이계가 이곳을 정식 학교로 인정하여 정운룡을 원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해석하면 어떨까? 아무튼 이 문제는 좀 더 고증과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개천정사 전경 및 편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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