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ATA[처음-이달의 청백리]]> http://www.jangseong.go.kr ko 처음 Sun, 15 Jun 2025 19:49:25 +0900 관리자 <![CDATA[박팽년]]>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판서 박중림(朴仲林)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417년(태종 17) 출생하였으며 집현전 부제학,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형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중  략)

1453년(단종 1) 37세에 죄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하여 단념하였다.
1455년(세조 1) 39세에 충청도관찰사로 근무하면서 청렴하고 근신한다는 평을...]]> Thu, 01 Sep 2016 11:42:00 +0900 관리자 <![CDATA[길재]]> 여말삼은(麗末三隱) 또는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불린다.

]]>
Thu, 01 Sep 2016 11:39:00 +0900
관리자 <![CDATA[이준경]]>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홍문관 부수찬 이수정(李守貞)이고 어머니는 상서원 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홍련거사(紅蓮居士), 연방노인(蓮坊老人)이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499년(연산군 5) 출생하였으며 갑자사회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풀려났으며 1522년(중종 17)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531년(중종 26) 33세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예문관 검열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파직되었다.

]]>
Thu, 01 Sep 2016 11:35:00 +0900
관리자 <![CDATA[홍섬]]>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04년(연산군 10년) 할아버지는 우부승지로 영의정에 추증된 홍형이며, 인종과 명종 때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낸 아버지 홍언필과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딸인 어머니 여산 송씨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홍섬도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이나 중임하였으므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삼대에 걸쳐 조선조 최다 영의정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본관은 남양,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시호는 경헌(景憲)이며, 1551년(명종 6년)에 박수량⦁송익경⦁이황⦁주세붕⦁홍담 등 33인과 함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특히 홍담과는 사촌 간 청백리이고, 중종 때 송흠과 함께 청백리로 녹선된 조원기는 홍섬의 진외당숙으로, 외가와 본가 모두 청백리 집안이기도 하다.

 
...]]>
Thu, 01 Sep 2016 11:33:00 +0900
관리자 <![CDATA[백인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97년(연산 3년) 왕자의 사부를 지냈을 정도로 학문적⦁인격적으로 뛰어난 학자였던 백익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단양 우씨이다. 본관은 수원,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庵), 시호는 인조 때 충숙(忠肅)을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 그리고 사후인 1603년(선조 36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그는 태어난 지 1년도 채 못 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 집 한 칸에서 겨우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살던 집마저도 연산군이 사냥터로 늘리면서 철거당했기 때문에 셋방을 얻어 살아야만 했다. 또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 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 섬기듯이 하였다.

...]]>
Thu, 01 Sep 2016 11:29:00 +0900
관리자 <![CDATA[김종직]]>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31년(세종 13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아버지 김숙자와 어머니 밀양 박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어 받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조선 성리학의 태두,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불렸다. 특히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서 이언적을 비롯하여 이황과 조식에게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사후인
1514년(중종 9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
Thu, 01 Sep 2016 11:28:00 +0900
관리자 <![CDATA[이후백]]>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이국형(李國衡)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20년(중종 15)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喪)을 예법대로 치렀다.
1555년(명종 10) 36세 때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와 박사를 거쳤다. 

]]>
Thu, 01 Sep 2016 11:23:00 +0900
관리자 <![CDATA[박상]]>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74년(성종 5년) 광주 서쪽 방하동(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 마을)에서 아버지 박지흥과 어머니 계성 서씨의 삼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 충주,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1515년(중종 10년) 담양부사로 재임할 때 당시 여산군수였던 지지당 송흠과 좌부승지였던 돈후재 조원기와 함께 염근리로 선정되었고, 1524년(중종 19년) 충주목사로 재직 시에도 염근리로 선정되는 등 두 번이나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아버지 박지흥은 원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인 광주로 와서 은거하였다.

]]>
Thu, 01 Sep 2016 11:20:00 +0900
관리자 <![CDATA[기건]]>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공조전서 기면(奇勉)이고, 어머니는 상장군 김중원(金仲源)의 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 현암(眩菴)이고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집이 청파(靑坡)의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걸어서 성균관에 다니면서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외우곤 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연안군수, 제주목사, 집의, 형조참의, 이조참의, 전라도관찰사, 호조참판, 개성부유수, 판중추원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고지식하여 세세한 행동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
Thu, 01 Sep 2016 11:19:00 +0900
관리자 <![CDATA[이시백]]> ]]> Thu, 01 Sep 2016 11:18:00 +0900 관리자 <![CDATA[조원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57년(세조 3)에 태어났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에 녹훈된 한천부원군 조온(趙溫)의 증손자로, 아버지는 예조판서에 추증된 조충손(趙衷孫)이고, 어머니는 남상명의 딸이다.
  본관은 한양,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로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1515년(중종 10) 지지당 송흠과 함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부인은 현감 나성손의 딸으로, 조원기가 가난한 선비이던 때로부터 남편을 공경히 섬기어 어긴 적이 없었으며, 또한 능히 가난함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담박(淡泊)한 생활을 좋아하였다.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서출(庶出) 자식들을 마치 자기가 낳은 것처럼 정성들여 보살폈으므로 종인(宗人)들과 마을사람들이 칭송하였다.

 
]]>
Thu, 01 Sep 2016 11:10:00 +0900
관리자 <![CDATA[류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46년(충목왕 2) 황해도 문화현에서 삼사판관 류안택의 차자(次子)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文化)로, 처음 이름은 관(觀)이며, 자는 몽사(夢思)였는데 1426년(세종 8) 이름을 관(寬), 자를 경부(敬夫)로 고쳤다.
  호는 하정(夏亭)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1421년(세종 3) 76세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당시 류관, 황희, 맹사성 세 사람을 가리켜서 조선 초기에 활약한 세 사람의 청백한 관리라는 뜻의‘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학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어렵고 백성들이 힘들 때일수록 올바른 벼슬아치가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71년(공민왕 20) 26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산군수, 성균관 사예, 사헌부 중승 등을 두루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