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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읍

마을연혁

마을유래

수산리(壽山里)
수산리는 원래 읍서면 지역으로 동산ㆍ중초ㆍ수산ㆍ신천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상비리ㆍ하비리ㆍ오리정이 나오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상초ㆍ중초ㆍ하초ㆍ수산리ㆍ태산이 나오는데 1914년 마을들을 합쳐 수산리라 하고 장성면에 편입시켰다. 동산과 중초ㆍ수산은 고샅을 경계로 마치 한마을처럼 근접해 있다. 주변에 지석묘가 있는 것을 보면 고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 같으나 옛일은 알수 없고 1655년 장성도호부 관아가 성산으로 옮겨온 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마을들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동산마을 뒷길(구길)에 있는 비석거리를 중심으로 상비리와 하비리로 나누고 중초마을에 오리정이 있어 그 주변을 오리정으로 불렀는데 1879년 당시 읍터(성ㆍ수산일대)가 와우형이기 때문에 소의 밥을 저장하는 적초루(積草樓)를 짓고 상초ㆍ중초ㆍ하초라 불렀으며 신천은 몇호가 있었는데 일제때 일본인들이 양잠을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1리 동산ㆍ중초, 2리 수산, 3리 신천으로 나뉘어 있다.
성산리(聖山里)
성산리는 성산,복산,청룡,중남,남당,상풍,밀등 7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655년 장성도호부가 현성산초등학교 자리로 옮겨온 후 1921년까지 장성군의 소재지로써 지금도 성산리 수산리 일대를 구읍이라 부르며 성산으로 통칭한다. 성산일대에는 10여개의 마을이 근접해 있었으며 대부분 읍서면에 속했는데 복산마을과 신천(수산) 마을은 읍면동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읍동,읍서를 장성면으로 통합하고 현도로를 중심으로 성산리와 수산리로 나누었다. 1914년 읍서면의 상풍리,중풍리,삼풍리,청룡리,교촌리와 수산리,교촌리와 일부 북삼면의 채략리 일부, 읍동면 복산리와 신기리 일부를 합쳐 성산리라 하고 장성면에 소속시켰다.
유탕리(流湯里)
유탕리는 원래 읍동면으로 유탕,서동 2개 농촌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 간행)에는 유탕리와 서굴리가 나오며 1912년 (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상동리 서굴리,유탕리가 나오는데 1914년 이 3마을을 합쳐 유탕이라 하였다. 현재는 유탕1리, 유탕2리, 유탕3리(서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천리(鈴泉里)
영천리는 장성읍 소재지이며 구산동ㆍ월산동ㆍ오동촌ㆍ매화동ㆍ청운동ㆍ충무동ㆍ대창동ㆍ삼월동 8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동면 지역이었으며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율치ㆍ방축ㆍ상오동ㆍ하오동ㆍ회암ㆍ인천ㆍ월평이 나오는데 율치는 현 구산마을 안쪽에 방축은 현 방구다리 아래쪽에 있었고 회암은 비기촌인듯 싶은데 인천(仁川)은 알 수 없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하오ㆍ산직ㆍ일평ㆍ신기ㆍ청운ㆍ월평ㆍ구산이 나오는데 하오와 산직은 오동촌, 신기는 삼가동의 새터로 추정되며 일평은 알 수 없다. 월평은 원래 읍동면에 속했는데 1914년 황룡면에 귀속되었다. 영천리는 고대부터 장성군의 중심지로 제봉산 아래 현천주교회 부근에 백제때 고시이현, 통일신라때 갑성군, 고려초 장성군의 읍성이 있었으며 마량부곡이 현 대창동에 있었다. 임진왜란후 장성과 진원이 합병하여 치소를 옛 고시이현터에 설치했다가 55년후인 1655년 성산으로 옮겼다. 현 장성읍시가지는 황룡강 강변이었는데 제방을 막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군청 등 관공서가 옮겨오면서 다시 영천리는 장성군의 소재지가 되었다. 영천 : 오동촌에 있는 방울샘에서 유래했다.
단광리(丹光里)
단광리는 단광ㆍ가작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동면 지역으로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단광(端光)ㆍ가작교(加作橋)가 나와 있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丹光ㆍ加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단광ㆍ가작ㆍ월평 일부를 합해 단광리라 하였다. 현재 1리 단광, 2리 가작으로 나뉘어 있다.
기산리(岐山里)
기산리는 내기ㆍ강변ㆍ외기ㆍ부동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서면 지역으로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 내기산, 외기산이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내기ㆍ외기가 나온다. 내기와 외기는 원래 같은 마을로 거리제(거르제) 또는 기산리라 불렀으며 안동네, 바깥동네로만 구분했었고 강변과 부동은 일제때 조성된 마을이다.
장안리(長安里)
장안리는 장안ㆍ장재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서면에 속했으며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장안ㆍ봉암이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침일람)에는 봉암ㆍ월봉이 나오는데 1914년 수산(水山)리, 봉암리, 월봉리를 장안리라 하여 장성면에 편입시켰다.
안평리(安平里)
안평리는 안평ㆍ장동ㆍ잠암ㆍ구암ㆍ용암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읍서면 지역으로 잠암에 지석묘가 있으며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신기(新基)ㆍ구암(九岩)ㆍ가마(加馬)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안평ㆍ장동ㆍ장동ㆍ잠암ㆍ구암ㆍ용암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1리 안평, 2리 장동ㆍ잠암, 3리 구암, 4리 용암으로 나뉘어 있다.
부흥리(扶興里)
>부흥리는 부흥ㆍ신흥 두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북삼면에 속했는데 1914년 장성면에 편입되었다. 호주총수(1789년)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 (전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부흥ㆍ신흥이 나오며 현재 부흥, 신흥으로 편성되어 있다.
백계리(白鷄里)
백계리는 원래 역면에 속했으며 백계ㆍ남양촌 2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역면조에 백계ㆍ대사(大寺)가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북삼면조에 백계리ㆍ대사리ㆍ기룡리가 나오는데 1914년 대사리ㆍ백계리ㆍ기룡리를 백계리라 하였으며 현재 1리 백계, 2리 남양촌으로 나뉘어 있다.
용강리(龍岡里)
용강리는 원래 역면(驛面) 지역으로 중흥ㆍ복암ㆍ용강ㆍ별관ㆍ우동 5마을로 이루어졌었으나 1975년 장성호 건립으로 모두 없어지고 우동 마을만 남았다. 호구총수(1789년 발간)에는 황주리와 별관리가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는 북삼면 중흥ㆍ복암ㆍ용강ㆍ별관ㆍ우동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 현 장성군 제방 부근에 청암역(靑巖驛)이 있었는데 이 역은 원래 단암역이라고 부르다가 1700년 전후에 나주의 청암역찰방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11개 역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명칭도 청암역으로 바뀌었다. 역 동쪽 하천에 봉덕연(鳳德淵)이 있었는데 물이 맑아 호남명천으로 이름 나 있었으며 1930년대에 8각정을 세웠는데 장성호 건립때 뜯겼다. 장성호 : 1973~1976년 완공.
덕진리(德津里)
덕진리는 덕진ㆍ구산ㆍ구신ㆍ덕산 4마을로 이루어졌다 구산저수지 위쪽과 덕진저수지 아래에 지석묘가 있으며 원래 북하면 지역으로 호주총수(1789년)에는 구산ㆍ구산치가 나오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덕진ㆍ구산ㆍ구신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북삼면으로 편입되고 1930년 장성면으로 합해졌다. 현재 1리 덕진, 2리 구산ㆍ구신, 3리 덕산으로 나뉘어 있다.
상오리(上蜈里)
상오리는 원래 역면(驛面)에 속했으며 상오ㆍ하오ㆍ호산ㆍ우지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 발간한 (호구총수)에는 상오치(嘴)리ㆍ하오치리ㆍ사천리ㆍ우지리가 나오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북삼면조에 상오리ㆍ하오리ㆍ사천리ㆍ우지리가 나온다. 현재 1리 상오, 2리 하오, 3리 호산, 우지로 나누어져 있다.
야은리(野隱里)
야은리는 야은ㆍ채약ㆍ신기 3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역면에 속했으며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역면조에 원산리(遠山里)가 나온다. 1914년 야은ㆍ채약을 야은리라 하였으며 북삼면 관할이었는데 1930년 북삼면이 장성면에 합쳐졌다. 현재 1리는 야은ㆍ채약, 2리는 신기로 나누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