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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5회 모암서원 유적지와 수산사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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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모암서원 유적지와 수산사

한때 박수량의 위패가 모시어진 모암서원 유적지를 간다. 주소는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424번지이다. 임도현 장성군청 문화관광과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길가에 위치한 밭 위에 있는 나대지였다. 그곳에는 안내판과 유허비, 일곱 개의 비와 또 하나의 오래된 비가 있다.

먼저 안내판부터 살펴본다. 안내판 이름은 칠현유적지이다. 칠현유적지는 1984년 2월 2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되었는데, 고려 고종(재위 1213∼1259)때 효자로 이름난 절효공 서릉(徐稜)을 비롯한 칠현을 모신 모암서원(慕岩書院)이 있었던 자리이다.

절효공 서릉은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현재의 장성군 북일면 작동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다. 고향에서 어머니를 봉양할 때 모친의 목에 큰 종기가 생겨서 의원에게 물으니 살아있는 개구리만이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 겨울에 개구리를 구할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집 앞 나무 아래에다 약탕관을 걸고 약을 끓이자 우연히 나무에서 청개구리가 떨어져 약탕관에 들어갔다. 이 약으로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었다.

원래 모암서원은 서릉이 공부를 가르치던 강학소로서 모암정사라고 불렀다. 1587년(선조 20)에 장성현감 이계와 지방유림과 향민들이 모암정사를 헐고 서원을 세웠다. 그런데 모암서원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다. 그리고 1649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그 뒤 1667년(현종 8)에 양산군수 조영규와 처사 조정로 부자, 1698년(숙종 24)에 율정 최학령, 1758년(영조 34)에 하곡 정운룡과 추담 김우급, 1788년(정조 12)에 아곡 박수량을 추가 배향하여 모두 칠현을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모암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린다. 1915년에는 장성의 유생인 김학수, 최봉석 등이 서원이 있던 자리에 단을 세웠고 1920년에는 모암서원단 기적비가 세워졌다.

한편 칠현유적지 안내판 옆에는 모암서원(칠현)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2006년 7월에 서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거기에는 서릉과 박수량, 최학령, 정운룡, 조영규, 조정로, 김우급이 소개되어 있다.

모암서원 유허비 바로 옆에는 일곱 분 현인들의 비가 하나씩 줄줄이 세워져 있다. 맨 먼저 보는 비는 추담 김선생이라고 적힌 비이다. 추담 김우급(金友伋 1574-1643)은 장성 사람으로 조부는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요월정의 주인 김경우(金景愚 : 1517-1559)이다. 정유재란 때 그는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명나라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왜적을 피해 숨어 있는 우리 선비들과 부녀자들을 해치고 노략질하고 있었다. 그는 분함을 참지 못해 명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명나라 장군에게, "당신 나라의 군기는 이렇게 문란할 수 있습니까? 그래 가지고 어찌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할 수 있겠소."하고 따졌다. 그랬더니 명나라 대장은 크게 무안해 하고, 즉시 말 머리와 한 병사의 다리를 베어 벌을 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였다. 김우급은 1618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권신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 그는 인조반정 후에 목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김우급은 임진왜란 때 화차를 만든 변이중의 문인이고 이익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집으로는 <추담집>이 있다. 전라감사 송인수가 지지당 송흠을 위하여 1544년에 잔치를 벌이었다는 기영정 마루에는 김우급의 시가 걸려 있다.

한편 네 번째에 있는 비는 서릉의 비이고, 다섯 번째는 박수량의 비이다. 박수량의 비는 ‘아곡 박선생’이라고 적혀 있다. 박수량이 모암서원에 위패가 모셔졌을 때의 축문을 <청백리 아곡박수량 실기>에서 찾았다. 축문은 고창현감 이이성이 지었다.

시호도 받아야 할 것이고 비석도 세워야 할 것인데 어찌 하여 미처 하지 못했을까? 선생께서 남긴 말씀 이제야 알려졌도다. 그의 도덕 외롭지 않으려고 훌륭한 여러분과 함께 모시었다네.

박수량은 1805년(순조 5) 1월에 시호가 내려진다. 그가 별세한지 250년 이후이다. 시호는 정혜공이었다. 청도 靑度, 정혜 貞惠, 장혜莊惠 3개중에서 정혜로 정한 것이다. 정혜는 청백수절 淸白守節 애민호여 愛民好與란 의미이다. 시장 諡狀은 영의정 이병모 (1742∼1806)가 지었다.

한편 칠현유허비 건너편의 한 쪽 귀퉁이에 오래 된 비가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모암서원유허비라고 적혀 있다. 모암서원이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비이다. 그런데 글씨가 마모되어 비문을 읽을 수가 없다.

이제 모암서원 유적지를 떠난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신촌마을에 있는 수산사 水山詞 이다. 사당 입구에서 안내판을 읽는다.

수산사는 순조 34년(1833) 향내 유림들이 단종 절신 돈재 박연생 朴衍生과 효행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으신 홍문관 교리 김개 金漑의 학덕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수산리에 창건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으나, 1976년에 이곳에 복설하여 돈재선생 현손 청백리이신 박수량, 임란 공신으로 천문지리에 능통한 박상의, 그 아우 박상지 선생을 추배하였다. 또한 1986년에 단종 절신 박자온 선생을 추배하고 매년 음력 9월5일 유림 향사한다.

박연생은 박수량의 고조부이다. 단종 때 충무시위사 대호군 벼슬을 하던 박연생은 세조가 즉위하자 전라도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그는 태인을 관향으로 삼았는데 그의 아들대인 1460년경에 박씨 일족들이 장성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수량의 스승은 김개와 김세필이다. 박수량은 어려서 김개에게 공부를 배웠다. 김개는 연산군 반정운동에 참여한 올곧은 선비로서 그가 고부군수였을 때 박수량은 그에게서 학업을 닦았다. 김세필은 박수량이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주학 廣州州學에 근무할 때 광주목사였다. 김세필은 박수량에게 문장과 의리를 강론하였다.

이어서 수산사를 구경한다. 외삼문인 경앙문을 지나서 사당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앞에 강당인 숭의당과 수산사 묘정비가 보인다. 내삼문을 지나니 수산사 사당이 있다. 사당 안은 위패가 모시어져 있다. 매우 단촐 하다.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장성군청이다. 군청 청사 앞에 세워진 백비가 눈에 들어왔다. 1999년에 세워진 백비는 박수량의 청백정신을 본받아 공무원이 청렴하고 주민에게 봉사하라는 의미로 세운 것이리라. ‘문불여장성’이란 비도 눈에 들어온다. 장성에서는 문장을 논하지 말라!

이제 청백리 박수량 연재를 마친다. 지금도 공직자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다. 요즘은 고위공직자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하위공무원들도 수십억 원씩 횡령하는 세상이다. 공직자의 비리를 수사하는 부장검사도 돈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는 뉴스는 아연실색이다. 돈이 무엇 이길래. 너나 할 것 없이 탐욕에 빠져 있다. 이런 시대에 청백리 박수량이 그립다. 정말 그립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