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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4회 박수량, 1539년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모친을 봉양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4회 박수량, 1539년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모친을 봉양하다.

1539년 1월에 박수량은 호조참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월22일에 임금에게 모친 봉양을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사직을 청한다. 박수량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초야의 한미한 유생으로서 벼슬이 2품에 이르렀습니다. 임금의 은혜가 가볍지 않거늘 어찌 털끝만큼인들 물러가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신의 어머니가 나이 80이 넘었을 뿐 아니라 병마저 들었으므로 부득이 돌아가 봉양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상께서 나라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감히 사사로운 정을 좇아 물러나려 한다고 여길까 싶어 정말 두렵고 송구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노모를 위해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1525년에도 박수량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하여 고부군수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1527년에 돌아가시었다.

중종은 “지금이야말로 인재는 모자라고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은 얼마 안 되니, 경의 뜻은 정으로 볼 때 비록 간절하나 이렇듯 인재가 모자라는 때에 물러가게 하기는 어렵다. 경은 고향을 오가면서 봉양하도록 하라.”고 전교한다. 임금의 이런 뜻에 따라 박수량은 사직을 하지 못하고 고향인 장성에 잠시 내려가서 모친 봉양을 한다.

이 일이 있는 지 6일후인 1월28일에 조정에는 명나라의 공(龔)·오(吳) 사신이 조서를 가지고 온다는 소식이 전하여진다. 조서는 세자를 책봉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절단 규모는 90명으로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중종은 이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전교를 내린다. 중종은 사신과 수행원들의 의복을 미리 준비해 둘 것을 지시하면서 50자 세면(細綿)과 모시를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미리 민간에서 거두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제용감의 일은 호조참판이 전담해야 하는데 호조참판 박수량이 병든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갔으니 때맞추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면서 예조참판 김희열과 서로 맞바꾸도록 지시한다. 소세양 역시 병든 모친을 뵈러 고향에 내려갔는데 그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아야 하니 속히 올라오도록 명한다. 이에 따라 조정은 그 날로 박수량을 예조참판에, 김희열을 호조참판에 임명한다.

한편 2월5일에 모친 봉양을 하다가 익산 시골에서 올라온 이조판서 소세양은 원접사 체직을 청한다. 소세양은 모친이 85세로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있어 모친의 여생을 돌보고자 고향집으로 내려갔었는데, 서울에 있어도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원접사가 되어 오래도록 먼 지방에 머물다가 어쩌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어 제때 간호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일신의 염려뿐 아니라 조정 일도 또한 처리하기 어려울까 염려된다고 아뢴다. 그리고 자기 대신 김안국과 성세창을 천거한다.

중종은 이 문제를 삼정승에게 의논하라 한다. 이날 삼공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소세양은 과연 여든이 넘은 노친이 있으니, 개인적인 정리로 볼 때 멀리 떠났다가 만일에 큰 변고가 있게 되면 대처하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여러 차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해 보았고 모든 접대와 예법을 갖춤이 당대 최고이어서 막중한 소임을 맡기기에 적임자입니다. 따라서 체직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길 경우 성세창이 교체하도록 성세창을 같이 보낸다면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도사 선위사는 마땅히 문장을 잘하는 자로 삼아야 합니다. 대사간 신광한이 끝까지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중종은 소세양을 원접사로, 성세창을 영위사로, 신광한을 도사 선위사로 삼는다. 그리고 2월14일에 소세양을 의정부 좌찬성에, 성세창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여 직위를 높이어 준다.

여기에서 소세양, 성세창, 신광한에 대하여 알아보자. 소세양 (蘇世讓 1486∼1562)은 황진이와 인연이 있는 중종 시절 최고의 문장가이다.
예조판서 시절 소세양과 황진이와의 일화는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소세양은 1533년 진하사 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판서, 홍문관 ·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은 악학궤범을 편찬한 성현 成俔의 아들이고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생이다. 그는 학식과 문장, 필법에 뛰어나고 서화와 음률에도 정통하여 사람들이 그를 ‘삼절 三絶’이라 불렀다. 그는 오랫동안 예문관에 있었으며 대제학을 하자 여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세조때 영의정을 한 신숙주의 손자이다.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파직 된 후 경기도 여주에서 18년 동안을 칩거하였다. 1538년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들이 다수 기용되자 대사간이 되었다.

(한편 지지당 송흠의 정자 관수정을 가면 소세양, 성세창, 신광한의 관수정 차운시가 걸려있다.)

그런데 2월22일에 소세양을 원접사로 임명하는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된다. 사간 유충관은 조강 朝講에서 중종에게 원접사 예차 문제를 아뢴다. “소세양을 원접사로 보내고 그 모친의 병환을 염려하여 성세창을 예차하여 보냈습니다. 이렇게 되니 원접사가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안 · 황해 두 도는 사신이 이어져 백성들이 매우 힘든데 지금 또 원접사와 성세창 일행이 간다면 백성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다시 상의하시면 합니다.” 이에 대하여 중종은 다시 삼정승에게 논의하도록 한다.

“원접사 소세양은 명나라 사신이 강을 건너기 전에 그 모친에게 병이 생긴다면 바꾸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이미 강을 건너서 서로 접대한 뒤에 갑자기 그 모친의 병으로 물러나게 된다면 사신이 반드시 자기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만일에 그 모친에게 큰 일이 있지 않고 다만 병 정도라면 소세양 역시 동생이 있어 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니 물러나게 할 수 없다. 이 뜻으로 삼공과 의논하라.”

삼정승은 중종에게 사안의 중요성으로 보아 소세양이 원접사가 되어야 함을 아뢴다. 이리하여 종종은 2월22일에 당초대로 소세양을 원접사로, 성세창을 영위사로 삼는다.

원접사 소세양 일행은 명나라 사신을 맞으려고 의주로 간다. 3월29일에 명나라 사신은 압록강을 건너온다. 명나라 사신을 모시면서 소세양은 4월10일에 서울에 도착하게 됨을 조정에 알린다. 당초에는 4월16일이었으나 일정이 앞당겨졌으니 차질 없이 준비를 하라는 보고이었다.

예정대로 명나라 사신은 4월10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4월12일에 중종은 근정전 경회루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성대하게 환영연회를 연다. 사신들은 이 잔치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한다. 4월16일에는 전별연이 있었고 사신들은 서울을 떠난다.

당시 예조참판 박수량은 공 · 오 두 사신을 접대하는 실무책임자였다. 그는 1537년에 동부승지로서 명나라 사신 접대업무를 맡았고 의주 별전위사로서 명나라 사신을 송별 하는 일도 맡아서 빈틈없이 의전업무를 처리하였다.

공 · 오 두 사신이 서울을 떠나는 날, 박수량은 이들에게 전별시 두 수를 건넨다. 이 시는 ‘청백리 아곡 박선생 실기’에 실려 있다.

제1수
다시 용문객(여기서는 명나라 사신을 말함)을 접견하고 비단 도포를 입은 사신을 배알하니
바람결에 고고 高高하게 서 있는 옥으로 깎은 나무인 듯
은총이 북극성(명나라 천자를 말함)으로 부터 내려 지초 같은 어찰을 반포하시는 데
사신의 부절이 동녘 변방 나라를 향하니 봉황새 깃털을 보겠네.

再接龍門拜錦袍 재접용문배금포
瓊枝玉樹倚風高 경지옥수의풍고
恩從北極頒芝札 은종북극반지찰
節指東藩覩鳳毛 절지동번도봉모

필법은 눈부셔 뱀이 풀 속에서 꿈틀 대는 듯
편장은 세상에 다시없어 바다가 파도를 뒤엎는 듯
구만리 날아오르는 붕새처럼 유계(중국 하북성에 있는 고을)로 돌아갈 것인데
고개 돌리면 놀란 먼지만이 짝달막한 쑥을 휘감으리.

筆法照人蛇入草 필법조인사입초
編章絶世海飜濤 편장절세해번도
鵬程九萬里幽薊 붕정구만리유계
回首驚塵捲短篙 회수경진권단고

제2수
향기로운 풀 우거진 넓은 들녘 가르며 휘감기는 하천
누대 가득 좋은 경치인데 떠나는 배는 어느새 강 복판에 있네.
별리 別離의 한이 봄날의 그리움 휘감아 견딜 수 없네.
떠나는 깃발은 저녁 안개 가르는 걸 어찌하리.

芳草平郊隔帶川 방초평교격대천
滿樓風景半江船 만루풍경반강선
不堪別恨牽春思 불감별한견춘사
其奈征旄劈晩烟 기나정모벽만연

붓끝의 광채 원래 비단 같거니와
가슴속 바다 같은 도량 끝이 없네.
만일 요동의 학이 될 수 있다면
만 리 멀리 그대 따라 푸른 하늘까지라도 오를걸.

筆下光華元似錦 필하광화원사금
胸中溟海自無邊 흉중명해자무변
若爲化作遙東鶴 약위화작요동학
萬里隨公上碧天 만리수공상벽천

명나라 사신의 위엄을 극찬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전별시이다. 장성군 홍길동 테마파크 안에 있는 청백당 사랑채의 강수재 기둥에는 전별시 제2수의 두 번째 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이후 예조참판 박수량은 담양부사로 발령이 난다. 모친을 가까이서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에 모친께서 이질이 극심하였다. 박수량은 몸소 수 십 일간 약을 달이며 허리 띠 한번 제대로 풀지 못하고 모친을 간호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곱똥을 맛보아서 닮과 씀을 구분까지 하며 병구완을 하였다. 그의 효성에 모친의 이질 병은 나아졌다. 그러나 머지않아 모친은 별세한다. 1542년에 삼년 복을 마친 그는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1546년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