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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3회 박수량, 함경도 경차관으로 일하다. - 1534년 12월부터 1535년까지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3회 박수량, 함경도 경차관으로 일하다. - 1534년 12월부터 1535년까지

중종실록을 읽어 보면 박수량은 1534년 12월부터 1535년 7월까지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으로 근무한다. 원래 경차관은 특별한 일을 수행하도록 임금이 차출하여 지방에 보내는 관원이다. 박수량이 함경도에서 한 일은 주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일찍이 1522년에 사헌부 지평(정5품), 1529년에 사간원 헌납(정5품), 1530년 1월에 사헌부 장령(정4품), 1530년 6월에 사간원 사간(종3품) 등을 역임한 박수량은 감찰과 형사사건 처리에 실력이 특출하였다.

먼저 함경도에 대하여 알아보자. 백두산과 두만강에 접하여 있는 함경도는 8도 중 면적이 가장 넓고, 험준한 산악과 무성한 삼림, 추운 기후, 여진족의 침입, 부족한 농토 때문에 사람 살기가 힘든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여진족의 땅이었는데 세종 때에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여 여진족을 두만강 밖으로 내쫓고 지금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6진(鎭)은 두만강 하류 남쪽의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을 일컫는 지역이다.

박수량이 함경도 경차관에 특별히 임명되어 처리한 사건은 3건으로서 1534년 12월19일의 김부기가 그의 모친을 죽인 사건, 1535년 1월16일과 3월14일의 경원도호부 안원보 권관(종9품) 전주남 사건 그리고 6월30일과 7월4일의 종성관리 장언량과 김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모두 <중종실록>에 실려 있다.

그러면 박수량이 처리한 사건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김부기 사건이다. 1534년 12월에 박수량은 자기 어머니를 죽인 김부기 사건을 조사한다. 김부기는 종성에 사는 사람인데 모친을 찔러 죽여 옥에 갇히었다. 지금도 존속살해죄는 가중 처벌하고 있는 마당에 효도가 최고의 가치인 조선시대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관아에서는 사건을 엄중히 다루었다.

관아에서 심문을 하자 김부기는 그의 어머니가 칼집을 거꾸로 들고 자기를 때릴 때 칼날이 나와서 잘못 찔렸다고 하면서 살인을 극구 부인하였고, 증인들은 김부기가 제 어머니를 칼로 찔렀는데 그 어머니가 죽을 때 작은 소리로 자기 아들이 칼로 자기를 찔렀다고 말하였노라고 진술하였다. 김부기가 자복하지 않고 대질심문 때 진술이 엇갈리자 관청에서는 김부기에게 다섯 차례나 형신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김부기는 옥중에서 죽고 만다.

이 사건을 조사한 박수량은 모친을 살해한 죄인을 잘 지키지 못하여 옥중에서 죽게 한 수령을 추문하고 함경도 감사에게 이 사건을 이첩한다. 형조는 이 사건을 보고받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어 중종에게 보고한다. 중종은 이 사건을 의정부 대신들이 의논하도록 전교한다.

두 번째 사건은 경원도호부의 안원보 권관 전주남 사건이다. 경원도호부는 두만강과 인접한 함경북도 맨 끝이다. 함경도 북단은 여진족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는 국경지대로서 국경 수비 초소가 많이 있었는데 사건 ·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조정의 통치권도 잘 미치지 않아 조정에서 임명된 관리들이 제대로 아전과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경원도호부의 국경수비대는 아산보, 안원보, 권원보 등이 있었는데 이곳은 5-60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이 근무하고 있었다. 무관인 권관은 종9품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중대장 급이었다.

충무공 이순신도 1576년 그의 나이 32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초임 발령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었고 1583년에는 경원의 건원보 권관으로 근무하였다. 1586년에는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근무하였는데 1587년에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다가 여진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바 있다.
1535년 1월 26일에 좌의정 김근사 등은 이조, 병조와 함께 의논하여 변방 지역에서 야인들이 노략질 한 일에 대해 중종 임금에게 아뢴다. 사건 개요를 살펴보면, 1534년 9월에 여진족 50여 명이 꿩 사냥하는 일로 장성(長城) 안까지 달려 들어왔다. 이 때 권관 전주남은 이들에게 철전(鐵箭)을 쏘았다. 그런데 여진족들은 무인지경처럼 떼 지어 들어와 권관을 닭이나 개처럼 묶어서 납치하였다. 이후 권관 전주남은 말과 소로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당시 여진족은 조선 백성과 다름없이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변방의 장수가 여진족을 잘못 다스리어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어이없게도 이 사실은 아예 은폐되었고, 안원보와 가까운 경원도호부에서도 알지 못하였다. 함경도 감사와 북도병마절도사도 모르고 있다가, 1535년 1월에야 북도병마절도사가 조정에 보고를 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5개월이 된 시점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너무나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사건 조사를 위하여 박수량을 함경도로 파견한다. 박수량에게 권관 · 부사 · 판관 · 사건 관련자를 조사하고 여진족의 추장과 주모자를 잡아서 가두고 당초에 변을 일으킨 까닭과 숨기고 아뢰지 않은 정상을 상세하게 밝히고 병마절도사도 아울러 조사하여 빨리 보고하도록 한다.

3월에 박수량은 전주남 사건에 대하여 조정에 보고를 한다. 권관 전주남은 야인에게 결박당하여 소와 말을 주고 풀려났는데 이 사실을 굳게 감추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관련자를 추문하고 있다고 보고 한다.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통하여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는 박수량의 의지가 돋보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사건을 은폐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사건은 철저히 조사되어야 하고 재발방지 대책이 확립되어야 한다.

세 번째 사건은 종성관리 장언량과 김호에 대한 사건이다. 1535년 6월에 박수량은 2품의 직에 있는 종성관리 장언량과 김호의 죄상을 조사한다. 장언량은 마음대로 공문서를 고치고 증인에게 허위 증언하게 하기 위해 가혹한 형을 가하다가 증인을 죽인 일이 있었고, 김호는 임금을 속이고 교묘하게 죄를 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장언량 사건은 하극상 사건이었다. 박수량의 보고에 의하면 여진족이 사는 곳에 조선의 군사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여진족에게 사로 잡혀서 끌려갔다. 그런데 하급 관리가 자기의 죄를 모면하려고 상급자인 장언량을 모함한다. 장언량이 종성 관리로 있을 때의 비리를 폭로한 것이다. 이에 장언량은 모함이라고 항변하여 장수와 병졸 사이에 극심한 알력이 생기었다. 조사결과 장언량의 비리행위가 사실로 드러나서 장언량은 파직된다. 또한 하극상을 저지르고 변방 수비에 소홀한 하급관리들도 엄중하게 문책 당한다.

이렇게 명종 시절은 국경접전 지역에 있는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할 때로 해이하였다. 하극상도 심하였다. 지금 우리 군인들은 어떠한가? 최전방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