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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2회 이항, 박운 사건으로 유배를 가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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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이항, 박운 사건으로 유배를 가다.

1531년 3월27일에 이항의 상소가 있자, 조정은 다시 논란에 휩싸인다. 곧바로 홍문관 부제학 권예 등이 이항의 간악함을 밝힐 것을 아뢰었다. 권예는 “지금 들으니 ‘이항이 승정원에 나와서 소를 올렸다.’고 하는데, 신 臣들은 소(疏)의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항은 지금 추고 받고 있는 처지로서 멋대로 대궐에 들어와 정소(呈訴)하였는데 옛날부터 추고 받는 사람은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항은 비록 파직 당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소장(疏章)을 만들어 자기 일을 상소하였으니, 이런 행위는 조정을 업신여긴 처사입니다. 고금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신들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스러움을 이길 수 없어 듣자마자 아뢰는 바이니, 임금께서는 마땅히 그의 간악한 정상을 밝혀 처리하소서.” 하였다. 중종은 “지금 이항의 상소를 보니 바로 자기에 관한 일이다.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상언(上言)은 할 수 있으나 상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추고도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대궐 뜰에 들어온 것은 부당하다.”고 전교한다.

이어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이항을 불경죄로 다스리어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한다. 양사가 아뢰기를 “이항은 본래 사납고 독하며 탐욕스럽기 이를 데 없는 간교한 우두머리로서 오래도록 요직에 있으면서 심정 · 김극핍과 결탁하여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제멋대로 위세를 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형세가 불꽃같이 성하여 남의 종과 농토와 집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고, 뇌물이 모여들어서 문 앞이 시장거리처럼 되어도 싫어할 줄 모르고 자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론이 스스로 일어났는데 다만 파직되었을 뿐이니, 임금의 은혜가 크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항상 파직된 것에 앙심을 품어 왔습니다.
그리고 박운에게 서대(犀帶)와 단자(緞子)를 받은 사실이 명백한데다 박운이 낱낱이 다 자복하여 임금께서 그 정상을 환히 아시고 조율하라 명하심에 따라 더욱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서대 犀帶는 조선시대에 정일품 · 종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로서 무소뿔 서각으로 장식되었다. 상당히 비싼 사치품이다. 단자 緞子는 광택이 있고 두꺼운 무늬 있는 고운 명주로 만든 견직물이다.

이어서 양사는 아뢴다. “뿐만 아니라 이항의 탐욕스런 정상이 환하게 드러나서 숨기기 어려운 것은, 전에 파직되어 가던 날에 뇌물을 바쳤으나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한 자가 그 물건을 되찾고자 하였는데 되지 않자 주먹만한 돌을 던지면서 욕하기에 이르렀고, 사람들에게 돌려달라는 꾸지람을 당하자 첩(妾) 연쌍비(燕雙飛)를 서울 집에 보내어 받았던 뇌물을 나누어 돌려주게 하였는데, 그 첩이 사람들의 독촉에 못 이겨서 남의 집에 숨기까지 한 사실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청렴으로 자처하고 추국 중에 있는 자가 외람되이 궐정(闕庭)에 들어와 자기가 범한 장오(贓汚 : 권세를 빙자 뇌물을 받음.)에 대해 소장(疏章)을 올리는가 하면 입계하여 조종(祖宗)의 법을 훼상하기에 이르렀고 대신을 박대한다는 말로 전하를 절박하게 나무라고 있으니, 옛날부터 신하는 애매한 죄를 입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문을 닫고 죄를 기다렸을 뿐이지 함부로 궐정에 들어와서 군상(君上)과 따지기를 이항처럼 한 자는 있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찌 곡직(曲直)만을 따질 뿐이겠습니까? 간특한 마음과 독한 앙심을 품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또 소(疏)의 사연은 모두 원망에 찬 크게 불경(不敬)한 내용이니, 속히 임금을 무시한 죄로 다스리소서.”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종은 “이항은 전직 재상으로 지금 한창 추국을 받는 중인데 자기의 일을 가지고 친히 대궐에 와서 아뢴 것은 매우 잘못이다. 그러나 이를 임금을 무시한 죄로 논한다면 너무 지나치다. 이미 추고하라고 하였으니 추고하여 죄를 정한다면 죄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교한다.

이어서 홍문관도 나서서 이항을 조정과 임금을 무시한 죄로 처형하라고 청한다. 중종은 이미 추고토록 하였으니 그 다음에 죄를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3월28일에 부제학 권예 등은 이항이 서대(犀帶)와 단자(緞子)를 뇌물로 받은 일은 박운이 이미 자복하였으니, 이항의 첩에게 물어보지 말고 직접 이항을 추고하라고 아뢴다. 중종은 그리하라 한다. 이 날의 실록에는 사관의 평가가 이렇게 적혀있다.

사신은 논한다. 그 때에 이항이 죄인 박운에게 서대 따위를 받았다는 말이 있자, 이항이 스스로 변명하려는 뜻으로 고향집에서 서울에 올라와서 소(疏)를 가지고 승정원에 들어가 원통함을 하소연했는데, 그 말을 들은 자들은 경악하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양사는 조옥(詔獄)에 내려 치죄하기를 청했고 홍문관도 그에게 죄 주기를 논청(論請)하였다. 대신이 구제했으나 겨우 사형은 면하고 유배 삼천리로 논의되었고 또 녹안(錄案 : 죄인의 장부에 기재)되었다. (중종실록 1531년 3월28일)

4월6일에 중종은 옥에 갇혀 있는 이항을 형신(刑訊 :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을 하면서 신문함)하는 일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논의하라 한다. 대신들은 이항이 재상의 신분이었음을 감안하여 형신은 면하여 달라고 청한다.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형신은 면하여 주고, 이항의 벼슬을 모두 빼앗고 먼 곳으로 유배 보낸다.

이렇게 중종이 이항을 유배 보내자 대간들은 다시 이항을 사형에 처하라고 아뢴다. 유배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이미 벼슬을 다 빼앗고 먼 곳에 귀양을 보냈으니 사형은 면한다고 전교한다. 다시 양사(兩司)가 여섯 번 아뢰었으나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4월7일에는 홍문관도 나섰다. 홍문관은 이항을 불경죄로 처형하라고 청한다. 중종은 “먼 곳에 부처하는 것은 가볍게 죄준 것이 아니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홍문관은 여덟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8일에는 대간이 이항을 처형하도록 아뢰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 날 대간이 또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홍문관도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 참 끈질기다.

한편 4월9일에는 삼정승이 아뢴다. 삼공이 아뢰기를, “근래의 옥사(獄事)는 신들의 의견 및 법례(法例)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대간과 홍문관이, 신들이 이항을 비호하고 있다고 하니 신들은 당연히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아룁니다. 이항의 일이 사형에 이른다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서 헤아려 보아도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항이 비록 쓸모없는 사람이긴 하나 일찍이 재상을 지낸 사람인데 형문(刑問)하여 사죄에 이르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중종은 전교하기를 “대신들이 아뢴 뜻은 내가 상세히 알았다. 이항은 율로는 일죄(一罪 : 사형)이지만 의당 죄를 감해 주는 것이 임금의 도리이다. 장오죄는 자복 받지 않고 죄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형추(刑推)해야 했는데 이항이 이미 자복하였기에 형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홍문관의 시종 · 양사의 대간과 의정부의 대신들이 이 일로 대립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도 매우 해괴함은 물론 어느 의견을 따라야 할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러자 이번에는 홍문관이 나섰다. 4월 10일에 홍문관은 이항에 대한 대신의 말로 인해 사직을 청한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이항의 일은 신들이 억측하여 계달(啓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상소를 살펴보면 조종의 법을 무너뜨렸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이것이 임금을 무시하는 불경스런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박운에게서 뇌물을 받았으니 장오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항은 이미 사형에 처해져야 함에도 임금께서는 형신도 안하고 그를 유배 보냈습니다. 이것은 잘 못된 일이며 옥사를 끝까지 규명하지 않아 폐단을 열어놓는 것이 이항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들은 이항의 죄를 비호하고 있으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중종은 “당초 이항을 유배 보낸 것은 과거에 재상의 반열에 있었기 때문에 그 죄를 짐작하여 결정한 것이다. 그만 두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4월11일에 다시 대간이 대신의 말로 인해 체직을 청한다. 중종은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한다. 대간은 일곱 번이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4월16일에 대간이 대사헌 서지를 파직하고 이항의 유배소를 바꾸도록 아뢴다. “이항의 일에 대해서는, 대사헌 서지가 이미 양사와 의논하여 여러 날 논계하다가 대신의 의논을 들은 뒤부터 갑자기 이의를 제기하여 한편으로는 은밀히 공론을 저지시켜 이항의 옥사를 비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언책(言責)을 면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계책을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이항의 본가(本家)는 개령(開寧)인데 동래현(東萊縣) 배소(配所)와의 거리는 4∼5일 일정에 불과하므로 유배 삼천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배소를 바꾸소서.”하니, 중종은 “서지는 그가 한 일로 살펴보면 잘못된 것 같다. 그러나 파직까지 할 수야 있겠는가? 이항의 배소에 관하여는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한다.

이에 따라 이항은 처음 유배지인 경상도 동래에서 함경도 길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이항의 본가인 개령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이다. 부산 동래와는 가까웠다.

중종이 대사헌 서지를 파직하지 않자, 4월20일에 홍문관 부제학 권예 등이 다시 상소하여 서지를 파직하라고 청한다. 서지는 대사헌으로서 이항의 일을 극론하다가 대신들의 말을 듣고 나서는 왜곡되게 이항을 비호하고 공론을 공공연히 저지시켰다는 것이다. 중종은 대간이 아뢴 대로 서지를 파직시킨다.

그런데 중종이 대간들의 뜻을 따르자 이번에는 대신들이 사직을 청한다. 4월 24일에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이행, 우의정 장순손 등이 이항의 일로 인해 체직을 청한다. 이들은 홍문관에서 자신들을 그르다고 했으니 체직시켜 달라고 한다. 중종이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한다. 삼정승은 모두 네 번 사직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

이러하자 이번에는 사간원 관원들이 삼정승의 말로 인해 체직을 청하였다. 이항을 비호한 대신들이 대간을 논박하였다는 것이다. 중종은 대간을 달랜다. “이항의 일은 박운이 이미 자복했고 이항도 자복했다. 대신이 들은 소문은 각기 다르지만 범죄자가 이미 자복했으니 의심할 게 뭐 있겠는가? 대간이 들은 것이 대신이 들은 것과 모두 같은 다음에야 규핵(糾覈)한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클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한다.

이항을 죄주는 것에 대하여 대신과 대간의 갈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양쪽 다 사직하겠다고 하면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종 결정자인 임금이 처신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임금 노릇도 못할 일이다.

5월 25일에 대사헌 박호 등은 형옥의 시비를 분명히 밝히도록 아뢴다. 대사헌 박호, 대사간 황사우 등은 아뢰기를, “삼공이 재해 때문에 근래 죄받은 사람들을 두루 열거하여 모두 부실하다는 것으로 누차 아뢰었습니다만, 신들은 그 뜻의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이항은 탐욕이 끝이 없어 뇌물의 행렬이 문을 메웠습니다. 박운에게 서대와 단자를 받은 일은 박운이 이미 자복했고 이항도 자복했습니다. 이항의 탐오스런 정상은 전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만, 이번에 배소(配所)로 돌아갈 때 용인에 이르자 그 고을 사람으로 일찍이 노비를 뇌물로 주고 벼슬을 요구했다가 얻지 못한 자가 그 뇌물을 돌려달라고 하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 살펴보아도 탐욕스런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데 장안(贓案)에 기록된 것이 애석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과 대간이 한 마음으로 가부를 논의하여 진정시키기를 힘써도 오히려 사설(邪說)이 일어나게 될까 우려되거든, 하물며 이미 결정된 일을 끌어내어 여러 사람들이 의심하게 하는 발단이 일어나 무엇하겠 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위에서 시비를 분명히 밝힐 때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종은 “근래 죄받은 사람들에 대한 일은 내가 이미 그 시비를 환히 알고 있으니, 요동될 리가 있겠는가. 흉측한 무리들이 분을 풀지 못하여 세 군데에다 화살을 쏘았고 또 네거리에다 방(榜)을 내붙여 대간과 시종을 비방했다. 이는 조정을 무시한 것이요 상하를 무시한 것으로, 그들의 행위가 이미 너무 심했다. 대신은 죄받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게 하기 위해 와서 아뢴 것이다. 이는 무심히 말한 것이긴 하지만 간흉들의 술수에 빠질까 우려된다. 지금이야말로 상하가 진정시키기를 힘써야 할 때이다. 경들이 아뢴 말이 옳다. 내가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전교한다.

이리하여 한때 권세를 날리던 이항은 부패관리로 낙인이 찍혀 후손들까지 수치를 당하게 되었고, 함경도 길주에서 비참한 유배 생활을 한다. 그런데 1532년 4월 20일에 장흥 부사 송흠은 청백리로 선발된다.

의정부가 청백리로 장흥부사 송흠을 서계(書啓)하면서 아뢰기를, “조정사람들 중에도 염퇴(恬退)하는 사람이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행실과 지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하니 전교하였다.
“ 송흠을 가선대부에 올려주어야 한다. 청백리 자손을 서용하는 일은 이조에 이르라.”

사신은 논한다. 송흠은 영광 사람인데 등과한 첫해부터 벼슬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매양 늙은 부모를 위하여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봉양하느라 1년도 조정에 있지 않고 호남의 7∼8군현과 주부(州府)를 돌면서 다스렸다. 모두 공평과 염간(廉簡)으로 임하였기 때문에 많은 치적이 있었으며,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이때에 모친의 나이가 95∼96세였으므로 관인을 풀어 놓고 집에 돌아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중종실록 1532년 4월20일)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다. 심정과 이항은 정승의 반열에 까지 올랐으나 탐관오리로 평가하고 있고, 송흠과 박수량은 염퇴하여 지금도 청백리로 불린다. 오늘을 사는 공직자들이 한번쯤 명심하여야 할 대목이다.

이제 부패한 공직자 이항에 대한 글을 마친다. 그는 끝내 함경도 길주에서 유배 중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냉혹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항은 천성이 사납고 악독하기가 독사보다 더하여 착한 사람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기묘년 간에 여러 차례 폄척(貶斥)을 받자 항상 분한 생각을 품었다. 남곤·심정·홍경주 등이 사림을 모함하여 함몰시킨 후에 이항이 경상도 관찰사로부터 특별히 대사헌에 제배되자 주먹을 뽐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제 때가 되었다. 그 사람들의 목숨이 이 주먹에 달렸으니 죽이지 않고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하고 힘을 다해 공격하여 마침내는 조광조 등을 죽이고도 오히려 다 죽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중략) 이항이 드디어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어조에 노기가 등등하여 조금도 신하된 자의 예모가 없었다. 거듭 탄핵을 받아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김안로 등의 중상으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 되었다. 죽을 때 사자(使者)를 대하여 한참 동안 교서를 보더니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다.’ 하였다. 그의 잔인하고 악독함은 비단 착한 사류들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임금의 명에 대해서도 항거하였으니 이는 ‘새가 죽을 때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다.’는 말과 다른 것으로 새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통분하며 나무라지 않는 이가 없었고 오히려 머리와 몸뚱이가 분리되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나이 많은 이들의 말이 ‘이항은 외모가 허수아비와 같이 오똑하고 굽어서 걸어가는 그림자를 보면 마치 늙은 여우와 같다. 항상 눈동자를 굴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으니 그 행동을 보면 그가 흉악한 위인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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