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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1회 이항, 중종반정을 이끈 박원종의 서자 박운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추고를 당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1회 이항, 중종반정을 이끈 박원종의 서자 박운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추고를 당하다.

좌찬성 이항은 1530년 7월4일 병조 사건이 발생하자 7월27일에 체직당하고 8월12일에 파직된다. 그런데 1530년 12월초에 그가 뇌물을 받았다는 사건 하나가 터진다. 이른바 중종반정을 이끈 일등공신 박원종의 서얼 아들인 박운 사건이다. 12월 9일의 중종실록을 읽어 보자.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오늘 아침 경연에서 대간들이 ‘박원종의 첩에게서 낳은 아들 박운은 호부(豪富)로서 이항에게 빌붙어서 응패두(鷹牌頭) 되기를 요구했다.’ 하니, 즉시 상세하게 그 사실을 서계(書啓)한 뒤에 추문하게 하라.” (중종실록 1530년 12월 9일)

이에 따라 박운은 이항에게 인사 청탁을 한 사실이 드러나 조사를 받는다. 여기에서 응패두는 무관 벼슬로서, 응패는 매를 놓아 사냥할 수 있는 신패인데, 이 패가 없는 사람이 매를 놓으면 사헌부에서 규찰하여 함부로 매사냥하는 것을 금하였다. 응패두는 장용위(將勇衛)의 군인으로 군사 50명을 거느렸다.

이 사건은 이 날 아침 경연에서 정언 채무역이 중종에게 아뢴 말에서 비롯되었다. 채무역은 근래에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면서 첩의 자식들이 많이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합격취소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파되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또한 그는 천얼들 가운데는 호부한 자, 세력이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관작(官爵)을 요구하기까지 하여 그 외람됨이 매우 심하다고 아뢴다. 그 예는 박운으로 그는 박원종의 얼첩(孽妾) 소생으로 호부인데다가 기세가 치성(熾盛)하여 하고 싶은 일이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고 하면서, 예전에 이항이 병조 판서였을 때 박운이 뇌물로 귀중한 보배를 이항에게 주고 응패두가 되기를 요구하고는 가는 곳마다 이를 자랑삼아 떠들고 다녔다고 아뢴다. 이 말을 듣자 중종은 즉시 박운을 추고하라고 명한다.

그런데 1531년 1월11일에 사간원의 동료인 정언 나숙은 박운 사건을 이야기한 정언 채무역을 체직시키라고 중종에게 청한다. 나숙은 사간 이언적과 함께 의논하여 ‘채무역이 박운을 논한 것은 공론이 아니라 김안로의 자식 김기(金祺)의 부탁을 받고 한 짓이다.’라고 아뢰면서, 정언 채무역의 의논이 공변되지 못하니 그를 간관(諫官)에 두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중종은 나숙의 청을 받아들여 정언 채무역을 체직시킨다. 이 시기에 박수량은 사간원 사간 직에서 물러나 사도시 司導寺 부정 직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언 채무역이 체직된 다음날 홍문관 부제학 황사우, 직제학 허흡 등이 박운 사건에 대하여 중종 임금에게 아뢴다.

이들은 사간원이 채무역을 박운의 일로 체직시키라고 논박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박운이 이미 그 죄를 자복하여 채무역이 아뢴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중종은 “어제 사간원에서 채무역에 대하여 아뢴 대로 체직시켰는데 그것이 참으로 박운을 논한 일 때문이라면 크게 잘못 되었다. 사간원을 체직하라.”고 전교한다.

1월12일에 중종 임금은 박운을 죄주고 이항을 추고하라고 전교한다. 중종은 “박운은 공신(功臣)의 아들이므로 그 죄를 감하여 주려 했었다. 지금 홍문관이 아뢴 것을 보니 박운의 일 때문에 대간이 논박, 체직당하기에 이르렀음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박운을 정상 참작 없이 분경죄를 적용하여 장 杖 일백에 유배 삼천리에 처하라. 또 이항의 일은 재상이 뇌물을 받았으니 추고하지 않을 수 없다. 사헌부에 이르러 죄상을 밝히라”고 전교하였다.

이런 어명이 있자 좌의정을 역임한 이행은 1월19일에 임금에게 국가의 원훈인 박원종의 서얼 아들인 박운을 선처하여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중종은 매우 단호한 입장이었다. “박운은 분경을 범한 죄로 죄준 것이다. 근래 분경이 풍속을 이루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로 이항도 추고했으니, 이 사람의 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이어서 1월 28일에도 영의정 정광필이 분경죄로 귀양 간 박운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아뢰었다. 정광필은 박운이 원훈 박원종의 제사를 모시는 입장이니 박원종의 공로를 생각하여 선처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종은 “전날 좌의정 이행이 이에 대하여 이미 말하였다. 처음에는 원훈의 아들이라 해서 죄를 감하여 주려 하였는데 대간이 박운의 일로 하여 체직 당했고, 또 이항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하기에 분경을 범한 율로써 죄준 것이며, 요즈음에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고 분경이 풍속을 이루고 있어서 국가에 관계가 있는 만큼 이 풍습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중종은 박운이 비록 원훈 박원종의 아들이라 하여도 분경죄는 묻고, 재상 이항도 추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만큼 부패척결 의지가 강하였다.

그런데 1531년 3월27일에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다. 파직을 당하여 경상도 상주에 머물고 있던 전 좌찬성 이항이 서울에 올라와 궁궐에 들어와서 상소를 한 것이다. 원래 추국 중에 있는 자는 상언은 할 수 있어도 상소는 할 수 없는데 감히 상소를 한 것이다.

이 날 이항은 억울하다고 장문의 상소문을 올린다.

그는 병조판서였을 때 박운이란 자가 응패두에 차임(差任)해 주기를 요구하면서 서대(犀帶) 1벌을 자신의 집에 들여보냈다고 하여 추고 받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 서대(犀帶)란 정일품과 종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로서 무소뿔 서각으로 장식된 귀중품이다. 이항은 이 일로 옥에 갇히어야 마땅한데 중종이 특별히 용서해 주시는 뜻을 보이신 점에 대하여 감격스럽고 황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뇌물죄는 매우 무거워서 자기 한 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누(累)가 자손에까지 미치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 율(律)을 적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아뢴다.

지금 조정에서는 박운의 말만 믿고 장오의 죄를 자기에게 가하니 너무 원통하여 자신이 경상도 상주에서 달려왔다면서 조정에 선 지 34년 동안 일찍이 한 번도 죄지은 적이 없는데, 하물며 장오(贓汚)로 죄를 지었겠느냐고 이항은 항변한다. 그는 절대로 서대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다시 한 번 박운을 조사하여 주라고 하면서, 조목조목 자신이 죄 없음을 밝힌다. 그러면서 장오법이 비록 엄하기는 하나 국조(國朝)이래로 장오죄는 수령 등 하위직에는 시행하였어도 재상의 직에 있는 자는 일찍이 그 죄를 받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이 죄를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한다. 또한 조종조 이래로 선왕이 대신을 예로 대우하던 아름다운 뜻이 자신에 이르러서 비로소 무너진 것이 가슴 아프다고 하면서 은근히 중종을 원망한다.

이항의 상소는 너무나 당돌하다. 추국 중에 있는 자가 외람되이 궐 안에 들어와 청렴을 자처하며 소장(疏章)을 올리는가 하면, 입계하여 조종(祖宗)의 법을 훼상하기에 이르렀고, 대신을 박대한다는 말로 임금을 절박하게 나무라고 있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