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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0회 사간 박수량, 좌찬성 이항의 죄를 묻다.(2)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0회 사간 박수량, 좌찬성 이항의 죄를 묻다.(2)

1530년 7월 22일에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우의정 이행은 최근의 재변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체직하겠다고 아뢴다. 중종은 임금의 잘못이니 삼정승은 사직하지 말라고 한다. 삼정승은 재차 아뢰어 체직을 청했으나 임금은 사직하지 말라고 명한다. 정광필 등은 민생의 곤란함이 극도에 이르렀고 경비(經費)는 매우 부족한 형편인데 사치의 폐단이 심각함을 거론하면서 왕자·공주·옹주들이 사치스럽게 집을 짓지 않기를 다시 아뢴다. 그리고 이항의 일에 대하여 말한다.

이항이 한 일은 매우 잘못입니다. 단, 이항이 만일 이조년이 이미 녹을 받은 일을 가지고 받지 않았다고 하여 이조년을 비호했다면 이것은 나쁜 행위이지만, 이조년이 과연 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조년의 변명 글을 간관(諫官)에게 보냈다면 실로 사정(私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간이 논한 것은 이 일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고 다른 일에 대하여 낱낱이 들어 논계(論啓)하였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이항은 성품이 본래 모질고 조급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라고 생각되나, 이항에게 다른 큰 허물과 큰 죄악이 있는지는 신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 하여 신들이 이항을 죄를 주지 말라는 뜻으로 아뢰는 것이 아니라, 상께서 그의 사람됨을 알고 그 거취(去就)를 잘 처리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중종실록 1530년 7월22일)

중종은 왕족의 사치를 경계하는 전교를 내리면서 이항의 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답한다.

이항은 사리(事理)를 아는 재상으로서 이조년의 소지(所志)를 공공연히 대간에 직송(直送)했으니 위에서도 괴이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런데 대간이 극론(極論)을 했기 때문에 분경(奔競)을 범한 죄목으로 고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추고하게 했다. 그리고 이항을 불러 물어보려고 했으나 대간이 지금 막 논계했기 때문에 하지 못했고, 대신과 의논하려 했으나 아직 그가 저지른 실정을 모르기 때문에 또한 하지 못했으니, 추고하여 그 실정을 알아 낸 다음에 다시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종실록 1530년 7월 22일)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은 삼정승이 이항을 비호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다. 바로 다음 날 대간들은 사직을 여러 번 청한다. 7월23일의 중종실록을 읽어보자.

대사헌 한효원, 대사간 심언광, 집의 임권, 사간 박수량, 장령 정세현과 김희열, 지평 송인수와 이임, 정언 김미와 엄흔 등이 아뢰기를,
“어제 삼공이 아뢰기를 ‘이항은 성품이 너그럽지 못해서 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대간은 사람이 실수한 것을 인하여 논하는 것이지 자기 한 사람의 애증으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항이 평상시 남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아뢰었으니 이것은 대간이 애증의 관계로 논한 것이 되는 셈이니, 신들은 직에 있기가 미안합니다.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삼공이 아뢴 일은 바로 재상을 너그럽게 용서하려는 뜻이나, 이항은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여 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논한데 대해서는 나도 그 아뢴 뜻을 모르겠다. 그리고 대간이 사대부를 논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실수를 인하여 말하는 것이지 어찌 애증으로써 말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삼공이, 이항의 소행을 사정(私情)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만, 이항이 그 족속(族屬)을 비호하고자 공공연히 대간에 간찰을 보낸 것을 어찌 사정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공의 뜻은 이항을 구명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간의 의논을 애증에서 나온 것으로 돌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직에 있기가 미안하니,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이 아뢴 뜻은 알지 못하겠거니와 대간은 공론을 따라 아뢴 것이다. 어찌 애증의 뜻이 있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간이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의 대신들은 공심(公心)으로 서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을지언정 사심(私心)으로 서로 그 실수를 비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공론을 가지고 실사(實事)를 근거로 이항을 논핵했는데 대신들이 사곡(邪曲)하게 구명 운동을 벌여 뚜렷한 죄를 사정이 없는 데에 돌리고 더러운 행실을 허물이 없다고 간주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여 남에게 미움을 산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언관(言官)을 만홀히 여겨 공공연히 청촉하는 것이 어찌 성품이 너그럽지 못한 소치(所致)이며 권간(權奸)을 불러들이고 뇌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실어 들이는 뇌물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 어찌 남에게 미움을 당한 소치라 하겠습니까?
이항은 국량(國量)이 매우 협소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숭품(崇品)에 올라 세력을 믿고 사의(私意)를 부리면서 남이 자기의 허물을 말하면 문득 그를 중상(中傷)할 것을 생각하여 사납고 괴팍한 마음이 날로 더욱 방자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내 말이 한번 나가면 사람들이 감히 나를 막을 자가 없다.’ 하고 방자한 짓을 꺼림 없이 하면서 조정의 이목(耳目)의 관리(官吏)를 종 부리듯 하려 하니, 항의 무례한 행위는 이 두어 일만 근거로 보더라도 그 대개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구제하고자 하나 할 말이 없자 그릇 그 성품의 편벽된 점을 들어 우연히 실수한 것이라고 핑계를 하고 도리어 대간의 말을 애증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니, 이것은 전하로 하여금 재상의 허물을 들을 수 없게 만들고 대간으로 하여금 그 직분을 행할 수 없게 만드는 소행이라고 생각할 때, 뒷날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한심스러움을 감당치 못하는 바이오니 시비를 밝히시는 것은 실로 전하의 통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였다.
“만약 대간이 아니라면 재상의 허물을 누가 즐겨 말하려 하겠는가. 대신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신의 뜻은 재상의 일을 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는 뜻을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지나치게 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구명운동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항의 일은 추고하여 아뢴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종실록 1530년 7월23일)

이 날의 실록을 읽어 보면 대신들과 대간의 갈등이 상당히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이항을 비호하는 대신들과 이항을 탄핵하는 대간들. 이런 상황에서 통치자 중종 임금은 어떤 입장일까?

한편 대간의 반발이 심하여지자 삼정승은 임금에게 대신과 대간의 의논을 모두 널리 채택할 것을 청하면서 사직을 청한다. 이항을 분경죄로 처벌당하는 것을 면하게 하자는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우의정 이행이 아뢰기를,
“신들이 이항이 범한 일을 가지고 지극히 심중하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들이 들은 대로 아뢰었던 것인데 지금 대간이 신들을 그르다고 합니다. 대간의 말이 어찌 옳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신들도 어찌 들은 바가 없겠습니까. 각각 들은 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간의 의논이나 재상의 의논을 모두 널리 채택해야 할 일입니다. 무릇 일은 마땅히 가부를 서로 정한 다음에 상께서 채택하여 취해야 하고 한결같이 대간의 말만 따라서는 안 됩니다. 신들이 직에 있기 미안하니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
(중종실록 1530년 7월 25일)

중종은 정승들이 체직을 청한 것에 대하여 “대신과 대간이 서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항의 일은 각각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아뢴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 한다.

7월27일에 중종은 이항의 추고를 어느 율로 정할 것인지를 대신에게 의논하게 한다. “이항의 추고는 지난번 내가 그 조율을 본 다음에 결정하라는 일로 전교하였는데, 지금 분경(奔競)을 범한 율을 따르면 곤장 일백에 유배 삼천리로 조율해야 한다. 어느 율을 써야 마땅한지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라.”

이러하자 삼정승은 이항을 분경죄로 논함은 지나치다고 아뢴다.

삼공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조년이 이미 녹을 받았는데 이항이 대간에게 구제해 주기를 요청했다면 분경을 범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조년이 녹을 받지 않았음을 변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항이 그 소지(所志)를 보내어 사리를 밝혀 진술하려고 한 것이었고 보면 공사(公事)를 청촉한 것으로 논하는 것도 지나친 듯 한데 더구나 분경을 범한 죄에야 이르겠습니까?” (중종실록 1530년 7월 27일)

중종은 “대신의 의논이 이러하고 대간이 당초에 덕화를 널리 펴야 하는 찬성 자리에 둘 수 없다고 하였으니 체직만 하는 것이 옳겠다.”고 전교하면서 좌찬성 이항을 체직한다. 대신과 대간의 논의를 절충한 처분이었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은 이항이 좌찬성 자리를 물러났다 하여 탄핵을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분경죄로 몰고 갈 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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