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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9회 사간 박수량, 좌찬성 이항의 죄를 묻다.(1)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9회 사간 박수량, 좌찬성 이항의 죄를 묻다.(1)

1530년(중종25년) 5월에 38세의 박수량은 사간원 사간(종3품)으로 임명되었다.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을 맡은 사간원에서 대사간 다음 자리였다.

김근사를 대사헌에, 심언광을 대사간에, 조종경을 집의에, 박수량을 사간에, 조인규와 심광언을 장령에, 유세린과 송순을 지평에, 주세붕을 헌납에, 김미와 엄흔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중종실록 1530년 5월 25일)

박수량은 이미 1529년 10월에 사간원 헌납(정5품), 1530년 3월에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루 거친 엘리트였고 대간으로서 적격이었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박수량과 함께 발령을 받은 사헌부 지평(정5품) 송순(1493-1582)이다. 담양출신인 그는 청백리 송흠의 제자인데 대신과 관리의 부패척결에 앞장섰다.

박수량이 사간에 임명된 지 두 달도 채 안 되는 7월4일에 사간원은 병조의 인사비리를 파헤치게 된다. 원래 관리의 규찰과 탄핵업무는 사헌부 소관이었지만, 간쟁이 주된 업무인 사간원도 관료를 규찰 · 탄핵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간원은 병조가 군직(軍職)을 승강(승진과 강등)시킬 적에 외람된 짓이 너무 심했다고 합니다. 근래에 승강시킨 장부를 가져다가 조사해 보니 배경이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높은 품계에 있음은 물론 혹 8품으로 송서(送西)된 자가 6품에 오르기도 하고 혹 5∼6품으로 송서된 자가 4품에 오르기도 했으며, 배경이 없는 사람은 오랫동안 낮은 품계에 있음은 물론 어떤 이는 전혀 녹봉을 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높은 품계에 있어야 될 사람이 낮은 품계에 있기도 하고 당연히 군직에 붙여지지 않아야 될 사람이 군직에 붙여져 있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병조가 사정(私情)을 쓴 것이 이러하니 관리를 추고하고 외람되이 승진된 자도 아울러 녹봉을 지급하기 전에 바꾸소서.” 하였다. (중종실록 1530년 7월 4일)

이러한 사간원의 보고에 대하여 중종은 “병조가 군직을 외람되이 승품시킨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당연히 추문해야 하겠다. 추문하면 외람되이 제수된 사람도 절로 바로 잡아질 것이다.”라고 전교한다.

7월13일에 사간원은 병조의 당상을 파직시킬 것을 청한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군직의 인원(人員)에 대하여 병조에서 사정(私情)을 써서 승강시켰으므로 녹봉을 지급하기 전에 개정하라고 본원(本院)이 아뢰었습니다. 임금께서 분부하시기를, 병조를 추문하면 외람된 자들은 절로 바로 잡아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이미 바로 잡으라는 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병조는 즉시 호조에 이문(移文)하여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응당 개정되어야 할 인원이 개정되지 않았으므로 그 틈을 타서 녹봉을 받았습니다. 이는 병조가 공론을 무시한 것임은 물론 임금의 분부도 폐기시킨 것입니다. 규찰하는 관원이 있는데도 전혀 꺼림이 없어 나라의 기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병조의 당상(堂上)을 파직시키소서. 또한 응당 개정해야 될 인원으로서 틈을 이용하여 은밀히 녹봉을 받은 자는 더없이 교활한 자들입니다. 아울러 모두 파직시키고 그 녹봉을 도로 거두어들이소서.” 하였다.

이 보고를 받자 중종은 즉시 삼정승과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병조의 일을 의논하게 한다. 한편 대사헌 김근사, 집의 조종경, 장령 심광언, 지평 유세린과 송순 등은 병조의 일을 미처 규찰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체직을 청한다. 병조의 인사비리는 사헌부가 상세히 규찰해야 할 일인데도 미처 규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종은 사직하지 말라고 전교한다.

중종의 하명을 받은 의정부와 대신들은 7월14일에 병조 사건을 의논하여 중종에게 아뢴다. 이 의논에는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좌찬성 이항(李沆)·김극성·조원기·한효원이 참석하였다. 우의정 이행과 병조 판서 조계상은 상피(相避)했기 때문에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다.

의정부가 의논하기를, “군직을 승강시킨 일은 끌어온 지가 이미 오랩니다. 지금 병조는 단지 일에 능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만, 대간의 의논이 파직을 논하고 있습니다. 삼가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군직에 붙여진 사람으로서 응당 개정해야 될 인원에 대해 이미 이름을 지적하지 않았다면, 녹봉을 받지 않기가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었던 녹봉을 도로 징수하는 것은 조종조에도 없던 일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530년 7월 14일)

이에 대하여 중종은 “대신들의 의논은 진실로 중한 것이다. 그리고 인물을 진퇴(進退)시키는 것 역시 중대한 일이다. 병조의 관리는 체직하라.”고 전교한다.

사간원은 병조 관리들의 체직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7월15일에 사간원은 이유 없이 높은 품계의 군직에 오른 남걸, 이조년 등 11명을 파직시킬 것을 청한다. 이들은 스스로 개정될 줄 알면서도 틈을 이용하여 몰래 녹봉을 받았고 대간이 규탄하는 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속히 파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이 문제는 이미 대신들과 의논했으니 파직할 수 없다고 전교한다.


이 때 사과 司果(정6품) 이조년이 좌찬성 이항에게 청탁한 사건이 발생한다. 7월17일에 사간원은 헌납 주세붕과 좌찬성 이항의 체직과 이조년을 추고하여 치죄할 것을 임금에게 청한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사간원이 또 아뢰기를,
“오늘 좌찬성 이항이 이조년이 녹봉을 받지 않은데 대해 변명한 글을 본원 사람이 다 앉아 있는 곳에서 헌납 주세붕에게 보내니 주세붕은 그 글을 받아서 동료들이 일제히 모여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히 내어 보였습니다. 주세붕이 언관으로서 재상의 사사로운 청탁을 따르고 그 글을 공공연히 동료들에게 꺼내 보인 것은 크게 사리와 체면을 상실한 처사이니 체직시키소서.

그리고 이항은 숭품(崇品)의 재상으로 사사로이 이조년을 비호하여 파직을 면해 주기를 바라고 변명의 글을 공공연히 공청(公廳)에 곧바로 보냈으니 대간을 업신여긴 것이 지극히 몰인정하여 실수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덕화를 널리 펴야 할 찬성 자리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체직시키소서. (중략) 이조년이 만약 변명하고 싶으면 그 글을 마땅히 정원에 올려야 하는데 사사로이 재상에게 부탁하여 그로 하여금 공공연히 주세붕에게 보내게 만들었으니, 추고하여 치죄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종은 이조년과 이항을 추고하고 주세붕을 체직하라고 전교한다.

“이조년은 지극히 그릇된 행동을 하였다. 아뢴 대로 추고하라. 주세붕은 논핵을 받았으므로 직에 있을 수 없으니 아뢴 대로 체직하라. 이조년은 이항에게 어떻게 되는 사람인지 모르나, 이항은 재상으로서 사사로이 대간에 촉탁했으니 과연 사리와 체모에 부당한 일이다. 찬성(贊成)은 경솔하게 체직해서는 안 되지만 추고하지 않으면 그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니, 우선 체직은 않더라도 추고는 해야 옳다.”
(중종실록 1530년 7월 17일)

추고된 이항은 1530년 6월27일에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는 1529년 11월26일부터 5개월 정도 병조판서로 근무하여 이번 병조의 인사비리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7월18일에 사헌부가 주세붕을 추고할 것을 청하자 임금은 허락한다. 7월19일에 사헌부는 이항을 분경을 범한 죄로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어서 대사간 심언광, 사간 박수량등은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리어 이항을 분경죄로 치죄할 것을 아뢴다. 7월 19일자 중종실록을 읽어보자.

사헌부가 홀로 아뢰기를, “이항을 추고하는 전지는 이미 내렸으나, 그는 분경(奔競)을 범하였으니 분경을 범한 것으로 고쳐 전지를 받들어 추고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심언광, 사간 박수량, 장령 김희열, 지평 송인수와 이임, 정언 엄흔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공론이 있는 곳은 대간뿐이며 대간을 중히 여기는 것은 조정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조정이 중하면 기강이 서서 임금의 세력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청명한 세상을 당해서는 재상이 감히 권세를 끼고서 대간을 만홀히(만만하고 소홀하게) 보지 못하고 대간도 지키는 바를 굽혀 재상에게 아부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합하여 공경해서 서로 사정(私情)를 봐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으므로 나라가 잘 다스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쇠퇴, 침체할 때에 미쳐서는 권세를 가진 자가 대간을 제멋대로 부려서 제 사사 私事 일을 성취시키고 공론을 가진 자가 종처럼 재상을 섬기면서 그 명예를 낚기 때문에 부정하게 영합하고 사악하고 왜곡되게 결탁하여 오직 이익을 도모하기에만 급급하므로 끝내는 어지럽게 됩니다.

지금 좌찬성 이항이 사악하고 왜곡되게 시골구석의 무뢰한들을 부추겨서 대간의 논박을 면하게 하려고 고장(告狀)을 가져다 언관(言官)에게 송부하여 구명 운동을 도모케 해서 스스로 거만을 떨었으니, 이는 대간을 업신여기고 조정을 가벼이 보기를 매우 기탄없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세붕은 그의 고장을 받아 동료들 가운데서 공공연히 꺼내 보였으니, 어찌 대간의 체모만을 상실한 것뿐이겠습니까. 세력이 있는 자에게 겁을 먹고 지조를 지키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나라의 법이 분경(奔競)을 엄중하게 금지하여, 범한 자가 있으면 문득 다스리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간청의 길을 금지하려는 것인데, 이항이 중앙의 요로(要路)에 앉아서 언관에게 간청을 하되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바로 분경의 금법을 범한 사람은 이항으로서, 스스로 죄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항은 본래 편벽되고 조급하고 천박하고 편협한 자질로 문학하는 사람인 양 외모를 꾸며 외람되게도 숭품에 올라서 널리 농토와 주택을 점령하고 권간(權奸)을 불러들이고 뇌물을 받아 제 집안을 살찌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병조를 맡았을 때에 서울에서는 그를 대해 말하기를 ‘이항이 병조 판서가 되면서부터 첨사와 만호의 값이 갑자기 올랐다.’고 하였는가 하면 아래로 군졸까지도 침 뱉고 욕하였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은데 관작을 함부로 함이 또한 이와 같으니 삼가 나라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의 하찮은 재능은 조정에서 쓸만한 기국(器局)이 아니며, 그의 도둑 같은 탐욕은 나라의 경제를 맡길 만한 경략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의 행적이 나라의 국법을 타락시켰으니 그 죄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항의 죄를 다스리시어 분경의 금지를 엄하게 하시고 주세붕의 직을 파면시키시어 권세 있는 자를 겁내는 습속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여기에서 분경(奔競)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인 말로, ‘바삐 뛴다.’는 의미이다. 즉 벼슬을 얻기 위해 권세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닌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는 엽관운동을 막기 위하여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도화하였다. 즉 이조와 병조의 제장(諸將)과 당상관, 이방과 병방의 승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등의 집에는 8촌 이내의 친가와 6촌 이내의 외가, 처가 그리고 이웃사람 등이 아닌 자는 임의로 출입을 금하였다. 이들이 임의로 출입하면 분경하고자 하는 행위로 보아 장(杖) 100대와 유배형 삼천리(소위 장일백류삼천리 杖一百流三千里)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제도는 초기에는 조문 弔問도 제대로 못한다는 민원이 발생할 정도로 강력히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원들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몰래 청탁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사간원의 차자를 읽은 중종은 이미 추고를 명한 이항은 조사를 한 다음에 다시 분경한 일을 추고해도 늦지 않다고 전교하면서 주세붕만 파직시킨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