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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8회 사관, 명종의 청백리 잔치를 비평하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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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사관, 명종의 청백리 잔치를 비평하다.

1552년 11월4일 명종실록 뒷부분에는 명종의 청백리 잔치와 포상에 대한 사관의 평이 여러 개 붙어 있다. 이를 읽어 보자

사신은 논한다. 대저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법인데 뽑힌 자들이 모두 자신을 반성해 보아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추천하여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의가 일어나 비웃음을 샀을 뿐만 아니라 피선된 자들 가운데도 함께 참여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한 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당국자(當國者)인 윤원형과 심통원은 염근리로 참여되지 못하였으니 타오르는 불꽃같은 위세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었던가?

사신은 논한다. 피선된 가운데 몇 명의 염근한 선비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더러는 권귀(權貴)의 문(門)에 실절(失節)한 자도 있고 더러는 어두운 밤에 뇌물을 받은 자도 있는데, 이들이 함께 뒤섞여 나와 아름다운 이름을 도둑질하여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었으니, 자신을 반성하여 보아 허물이 없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윤원형은 양양(梁楊 두 여동생을 왕비로 보낸 후한의 권신 양기 梁冀와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 楊國忠을 말함)의 권세를 끼고 마음대로 탐욕을 부려 남의 것 빼앗기를 싫증낼 줄 몰랐다. 이런 일로 시랑(豺狼 : 승낭이와 이리)의 마음을 고쳐 염근의 풍조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사신은 그것이 가능할지를 모르겠다.

사신은 논한다. 내수(內需) · 사탕(私帑, 사금고)의 재정(財政)이 매우 급박한데 잔치를 열고, 선물을 하사하는 것으로 청신(淸愼)한 사람들을 권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이 임금의 처사를 믿지 않는데야 어쩌겠는가. 더구나 선발된 염근리 중에 한두 사람은 합당한 자가 있지만, 기타는 소렴 곡근(小廉曲謹 : 작은 청렴과 근신)일 뿐이어서 진위(眞僞)를 알 수 없고 무능한 자들까지 섞였으니, 식자 識者들이 비웃었다. 또 탐욕하지 않음을 보배로 여기고 일처리를 제사(祭祀)처럼 공경히 하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도 때를 맞추어 다스리는 것을 살피지 못했으니, 이를 공선(公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를 읽어 보면 사관은 다음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는 청백리 선정의 문제점이고, 둘째는 명종의 잔치와 포상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셋째는 권신들의 탐욕이 판치는 세상을 몇 몇 염근리 포상으로 고칠 수 있을 까 하는 의구심이다.

첫째, 사관은 청백리 선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진정한 청백리가 왜 없을까 마는 권신의 문을 기웃거려 포상을 받은 자도 있고, 밤에 슬쩍 뇌물을 받은 자도 있으며, 작은 청렴과 근신으로 청백리가 된 자도 있었으니 당시의 지식인들은 비웃었다.

사실 그랬다. 훌륭한 청백리로 알고 있는 자들도 실록에는 냉정한 평가가 내려졌다. 그런 사람들이 안현과 김개 그리고 주세붕이다.

먼저 삼정승이 대표적인 청백리로 칭송하는 안현에 대한 사관의 비평을 보자. 이는 1553년 1월29일의 명종실록에 나타난다.

송세형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안현을 이조 판서로,【안현은 성품이 비루하고 아첨을 잘하였다. 권간(權奸)에게 아첨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서는 청근하다는 이름과 공손한 기색이 있었으나 족히 볼 만할 것이 없었다.】 박수량을 한성부 판윤으로, 남경춘을 사헌부 지평으로, 이감을 홍문관 교리로, 이언충을 부교리로, 강사상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명종실록 1553년 1월 29일)

김개는 1551년 11월4일자 실록에 혹독하게 평가되고 있다.

사인(舍人)이 삼공(三公)의 뜻으로 아뢰기를,

“청간(淸簡)한 사람을 초계(抄啓)하였습니다. 그러나 정2품 이상은 상께서 아실 것이므로 초계하지 않았습니다. 뽑힌 사람은 조사수 · 주세붕· 이준경· 김수문·이세장·홍담·성세장·이영·김순·윤춘년·윤부·윤현·김개·이황·송익경·변훈남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 청간하고 염근한 사람을 초계한 것이 뭇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많았으니, 김개와 같이 거짓을 꾸며 명예를 구하는 무리도 또한 뽑힌 사람 속에 들어 있어 맞지 않는다는 비난이 많았다. (명종실록 1551년 11월 4일)


학문이 높고 청렴한 주세붕도 1530년에 사간원 헌납으로 있을 때 권신 에게 달라붙어 파직 당한 적이 있었다. 좌찬성 이항(李沆)이 이조년(李兆年)이 녹봉을 받지 않은데 대해 변명한 글을 헌납 주세붕에게 보내니, 주세붕은 언관(言官)으로서 그 글을 받아서 사간원 동료들이 일제히 모여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히 내어 보인 것이다. (명종실록 1530년 7월17일)


두 번째로 사관은 흉년이 들고 백성이 곤궁한 시기에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치러야 하는 지에 의문을 표시한다. 실제로 그랬다. 명종 시절은 흉년과 재해가 계속되었다. 1552년 6월13일에는 영의정 등 삼공이 가뭄과 재해에 대한 책임을 느껴 자신들의 체직을 청할 정도였다.

삼공이 빈청(賓廳)에 나아와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여 전혀 추수할 가망이 없으니, 이처럼 절박한 재변이 어디 있습니까? 신들이 모두 부적격자로서 음양(陰陽)을 섭리(變理)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니, 신들을 체직시키고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널리 택하여 재상의 자리에 두소서. 그리고 상께서도 실다움으로 하늘에 응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재상의 간언을 받아들이신다면, 재변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년에는 수해와 한해 寒害가 없는 해가 없었다. 금년에는 비가 알맞게 내렸기 때문에 추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마침 농월(農月)을 당하여 절박한 재변을 만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저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내가 부덕한 소치이지 어찌 경들의 잘못이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옛사람이, 실다움으로 하늘에 응할 것이요 겉치레로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성심으로 재변에 응하면 천심(天心)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재변이 너무 박절하여 위에서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이 비록 형식적인 일이지만 민망히 여기는 마음에 그만둘 수 없으니 아울러 거행하도록 하라. (중략)”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에 수해와 한해뿐만이 아니라 천지산천의 변과 일월성신의 이변, 곤충·초목의 괴이가 겹쳐 나타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인사(人事)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천심(天心)이 노한 것을 헤아려보면, 견고(譴告)를 보임이 그침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을사년 이래로 이기(李芑)·윤원형 등이 흉모(凶謀)를 부려 큰 옥사를 일으켰고,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생살여탈(生殺與奪)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온 조정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화의 그물에 빠져 어떤 이는 죽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내쫓기기도 하여 남은 자가 없었으므로 유명존몰(幽明存歿) 사이에 원망과 분노가 쌓였다. 신원(伸冤)시켜 하늘의 마음에 응답하려 한다면 어찌 이 일보다 먼저 할 일이 있겠는가? 심연원 등이 처음 이 일에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정 왕후가 안에서 섭정(攝政)하고 윤원형이 밖에서 천권(擅權 :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함)하여 을사사화로 조정에다 함정을 만들어 놓고 조금이라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고 사론(邪論)이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았다. 그래서 지금 신원을 청하면서도 단지 형옥이 잘못되고 관리들이 파면된 것에 대해서만 말하였을 뿐 억울하게 죽은 혼이나 멀리 귀양 간 사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른바 죄가 중요한 일에 관계된 자란, 모두 당시 귀양 가 있다가 방환된 사람을 가리킨 것인데, 말하기가 두려워 머뭇거리는 것이 언사에 드러났다. 이는 그 말이 무익(無益)할 뿐더러 도리어 사림에 해만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을사년 초에는 명종이 어려서 아직 위(位)에 있지 않았으니, 한 소제(漢昭帝)의 명석함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상관걸(上官桀)의 사특함을 분변할 수 있었겠는가? 임금은 알지를 못하고 신하는 말을 할 수 없어 원망이 하늘까지 사무쳤는데도 신설(伸雪)할 데가 없었으니 재변이 이른 것은 실로 당연하다 하겠다. 뒷날 천심이 화 내린 것을 뉘우치고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만세 후에라도 선악이 저절로 분변될 것이다. (명종실록 1552년 6월 13일)

또한 청백리 잔치가 일어나기 한 달 전에는 공신연 행사 도중에 천둥이 크게 치면서 연회가 중지되는 일도 일어났다.

상이 근정전 뜰에서 공신연을 베풀 때 크게 천둥이 치면서 비가 내렸다. 영의정 심연원 등이 아뢰기를,
“당초 궐정에 잔치를 내릴 때 신들이 미안하게 여겨 아뢰었으나 위에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황공하여 감히 다시 아뢰지 못했는데 지금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내림)할 때에 이 같은 재변이 이르렀습니다. 천인(天人) 사이는 그림자보다 빠른지라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준비한 예(禮)이니 그만둘 수 없다. 빈청(賓廳)으로 옮겨 행하라.”
하였다. 심연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신들이 이미 선온주를 마셨고 또 사물(賜物)을 받았으니, 예 역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연회를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때 아닌 천변(天變)이어서 매우 미안하다. 그러나 주악(奏樂)은 하지 말고 연회를 끝까지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연원 등이 세 번째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이 그럴 뿐만 아니라 상께서도 하늘의 노여움에 외경심을 나타내야 하니,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명종실록 1552년 9월 30일)

셋째, 사관이 한탄한 것은 문정왕후(1501-1565)와 윤원형( ?-1565)의 탐욕정치였다. 문정왕후는 불교를 숭상하여 국고를 탕진하였고, 상벌을 함부로 내리는 등 정권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녀의 수렴청정이 1553년에 끝났어도 문정왕후는 죽을 때 까지 명종을 억누르고 정치에 간섭하였다. 명종이 말을 안 들으면 궁중의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매를 때리기도 하였다. 명종은 그야말로 눈물의 왕이었다.

여기에 한 술 더 뜬 이는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었다. 그는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렀고, 첩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총애를 입고 벼슬을 팔아 먹고 뇌물을 받았다. SBS 인기사극 <여인천하>에는 이런 사회상이 고스란히 방영되어 있다. 탐욕과 타락이 지나친 세상이었으니 청백리를 표창한 들 세상이 깨끗해질리 없었다. 그리하여 의식 있는 선비들은 아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남명 조식 같은 이가 그러하였다. 1565년에 윤원형이 죽자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윤원형이 권력을 쥐고 뒤흔든 지 20년 사이, 조정의 정사는 혼탁했고 염치는 깡그리 쓸려버렸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나라의 명맥은 문드러졌다. 종묘와 사직이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