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조회수 : 3526
제목 제17회 명종, 박수량 · 조사수 등 염근리에게 잔치를 베풀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7회 명종, 박수량 · 조사수 등 염근리에게 잔치를 베풀다.

1552년 11월4일에 명종 임금은 청백리 45명에게 잔치를 베풀고 포상을 한다. 이 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안현 · 박수량 · 홍섬 · 조사수 등 21명이었다. 대사헌 이준경 등 10명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고, 지방 수령 14명은 포상으로 가름하였다.

궐정(闕庭)에서 염근인(廉謹人)에게 일등악(一等樂)을 내리라고 명했는 데 근근인(勤謹人)들도 참석하였다. 각기 단목(丹木) · 호초(胡椒: 후추)등의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렸고, 저물녘이 되자 각기 백랍촉(白蠟燭) 한 쌍씩을 내렸다. (잔치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자 임금이 백랍으로 만든 초를 하사한 것이다. - 필자 주)

호조 판서 안현, 우참찬 박수량, 평안도 관찰사 홍섬(부임하지 않았었다.), 형조 판서 조사수, 대사성 이명, 예조 참의 이몽필, 좌승지 홍담, 우승지 성세장, 대사간 윤춘년, 판교 윤현, 우통례 윤부, 장령 유혼, 제용감 부정(副正) 우세겸, 사복시 정(司僕寺正) 박영준, 사복시 부정 임보신, 홍문관 교리 정종영, 부교리 박민헌, 공조 정랑 이증영,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 김몽좌 이상 19인은 염근으로 피선되었다.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 김사근,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조용 이상 2인은 근근 (勤謹)으로 피선되었다. (명종실록 1552년 11월4일)

이 날의 실록을 읽어보면 청백리라는 명칭 대신에 염근리, 근근리란 명칭이 나온다. 염근 廉謹이란 말은 ‘청렴하고 삼가다’는 의미이고 근근 勤謹이란 말은 ‘부지런 하고 삼가다’ 의미이다. 그런데 1695년(숙종 21)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청백리를 뽑으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로 불렀다 한다. 아무튼 청백리와 염근리, 근근리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 당시 박수량은 의정부 우참찬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552년 9월에 박수량은 전라도 관찰사 근무를 마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근되어 서울로 올라온다. 이 때 그는 사관 史官이 염근(廉謹) · 졸직(拙直)하여 전라도 선비 중에서 가장 어진 인물로 평가할 정도로 조정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면 이 날 참석한 청백리 중 눈여겨 볼 몇 사람의 면모를 살펴보자. 먼저 호조판서 안현(安玹)이다. 그는 일찍이 좌의정 상진이 명종과 문정왕후 앞에서 청백리로 천거할 만큼 청백한 사람이다. 그는 청렴 · 근검하여 사사로이 선물을 받지 않았으며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 하루는 손님이 좌석에 있을 때 그가 밥을 먹는데 오직 미역을 된장에 끓인 것뿐이었다. 안현은 맛도 보지 않고 밥을 마니, 손님이 말하기를 “국이 맛이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먼저 맛을 보지 않습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국이 설혹 좋지 않더라도 어찌 하겠소.” 하였다.

평안도관찰사 홍섬(洪暹:1504∼1585)은 아버지가 영의정 홍언필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송일의 딸인 명문 집안이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1531년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을 지낸 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의 무고로 흥양(지금의 고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537년에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에 석방되었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 · 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 7)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 다시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 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좌승지 홍담(洪曇 1509)∼1576)은 영의정 홍언필의 조카이다. 1539년 별시문과에 급제, 정언을 거쳐 1546년 예조와 이조의 정랑, 1547년 장령 · 응교를 역임하였다.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이 윤원형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다. 1550년 직제학 · 동부승지, 좌승지를 하였고, 1553년에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형조참판을 지냈다.

우승지 성세장(成世章: 1506∼1583)은 김안국의 문인이다. 1540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44년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1548년에 사헌부집의, 홍문관응교 · 사간원사간과 여러 승지를 지낸 뒤 1553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는 권신 이기가 구수담에게 죄를 주려는 데 대한 잘못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또 윤원형에게 관리는 능력에 따라 등용해야지 사사로이 권세를 이용하여 매관매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사헌 이준경, 동지중추부사 임호신과 주세붕, 동부승지 김개, 전 대사성 이황, 전한 송찬, 부장 허세린, 군기시 별좌 안잠, 행 사용 김팽령, 사재감 정 강윤권 이상 10인은 염근으로 피선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이날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명종실록 1552년 11월4일)

이 날 참석하지 못한 청백리 중에서 이준경, 임호신, 주세붕, 이황에 대하여 알아보자. 대사헌 이준경(李浚慶 : 1499∼1572)은 1565년 명종 말년에 영의정이 되어 선조 시절에 줄곧 영의정을 한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인데, 그는 1504년 갑자사화로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153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성균관대사성 ·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이어 1552년에 대사헌이 되었고 이후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그는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鈞 :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 유희춘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는 몸가짐이 청백하고 검소하였고 덕이 있어 ‘어진 정승’으로 불리었다.

동지중추부사 임호신(任虎臣 : 1506∼1556)은 1531년 식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대교를 거쳤다. 1533년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동지사인 아버지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서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나 권신 김안로에 의해 황간현감으로 쫓겨났다. 1538년 사간원헌납, 시강원필선을 거쳐 1541년 의정부검상, 이듬 해 충청도진휼경차관으로 나가 가흥창(可興倉)·아산창(牙山倉)의 곡식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휼하는 한편, 수령·방백을 문책하였다. 1551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경연특진관, 한성부좌윤, 우윤을 거쳐 155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1556년 호조판서에 기용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사직한 후에 죽었다. 청정하고 신중함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書院)을 건립한 사람이다. 그는 152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홍문관 수찬, 병조좌랑 · 사간원헌납을 역임했다. 1537년 권신 김안로의 배척을 피해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곤양군수로 나갔으나 이듬해 파직 당했다. 이후 승문원교리를 거쳐 1541년 풍기군수가 되었다. 1545년 성균관사성을 한 후 도승지 ·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뒤에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극한 효행과 청빈한 생활로 조야에 신망이 높았다. 한편 주세붕은 1554년 7월에 별세한다. 이 때 시강관 어계선 등이 동지중추부사 주세붕의 상구를 호송해줄 것을 아뢰어 명종은 박수량의 전례에 따라 호송하도록 지시한다. (명종실록 1554년 7월 25일)
전 대사성 이황(李滉:1501-1570)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성리학의 거유이다. 그는 1545년 을사사화 후에 권신 이기에 의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었다. 이후 그는 병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1548년에 이황은 풍기군수로 근무한다. 1549년 12월에 그는 전임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賜額書院인 소수서원 紹修書院으로 만든다. 이 후 이황은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관직에서 해임해 주기를 청하고, 회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 1월에 경상감사는 퇴계가 함부로 임지를 버리고 갔다 하여 그에게 두 계급 강등처분을 내렸다. 이어서 1550년 8월에는 충청도관찰사를 한 형 이해가 이기의 모함으로 귀양 가다가 죽는다. 이때부터 이황은 은퇴를 더욱 결심한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그냥 가만두지 않았다. 1552년 7월에 그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고 11월에 병으로 사임하였으나 다시 1553년에 대사성이 된다. 그는 성리(性理)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기질(氣質)이 뛰어나고 슬기로우며 가을 달 · 얼음항아리 같이 깨끗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숨어서 수양하고 물러나 도를 간직하는 데 뜻이 있었고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또한 명종은 지방 수령 14명에게 별도로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다. 향표리는 국산 비단이다. 청백리 송흠도 지방수령일 때 향표리를 받은 적이 있다.

외임(外任) 염근인(廉謹人)인 회령부사 이영, 강계부사 김순, 나주 목사 오상, 상주목사 신잠, 밀양부사 김우, 온양군수 이중경, 예천 군수 안종전, 강릉부사 김확, 신계현령 유언겸, 금구현령 변훈남, 한산 군수 김약묵, 지례현감 노진, 칠원현감 신사형, 선산에 사는 전 군수 김취문 이상 14인에게는 각기 향표리 1습을 하사하였다.(명종실록 1552년 11월4일)

여기에서 상주목사 신잠, 지례현감 노진, 그리고 전 군수 김취문에 대하여 알아보자.

상주목사 신잠(申潛 : 1491∼1554)은 신숙주의 증손자인데, 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또 재주가 있었다. 1519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인하여 급제가 취소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귀양 갔다가 양주로 이배되었다. 그 뒤 20여 년 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다가 1537년에 김안로가 처형되자 복직되어 태인 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 치적이 으뜸이어서 백성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이후 간성군수를 하다가 1552년 4월에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고 그 해 12월 재임 중에 죽었다. 그가 별세 시에 명종은 미두(米豆)를 8석씩 치부(致賻)하도록 하였다.

지례현감(知禮縣監 : 지례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이다.) 노진(盧禛 1518-1578)은 1546년에 증광문과에 급제,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고, 전적·예조의 낭관을 거쳐 지례현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높은 치성(治聲)을 들었으며 청백리로 뽑혔다. 1560년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 · 진주목사를 지냈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그 뒤 대사헌·이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의 벼슬에 연배(連拜)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고 1578년에 별세하였다.

그는 벼슬살이 30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일찍이 내직에 오래 있지 않고 네 번 목사와 군수를 하고 두 번 감사가 되었던 것은 모두 모친을 위한 때문이었다. 그는 원님과 감사 시절에는 쓸쓸한 객사에서 손님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출세를 즐기지 않고 항상 은퇴의 뜻이 있었고 벼슬살이도 청렴하고 근실하게 하였다.

김취문(金就文 1509∼1570)은 153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를 거쳐, 1541년 형조 · 예조좌랑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비안현감을 지냈다. 1544년에 강원도도사 1547년 호조 · 공조정랑을 지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도사 · 영천군수 · 청송부사 · 상주목사 · 나주목사를 거쳐, 1565년 교리와 호조참의 · 대사간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자주 외직으로 밀려났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을 괴롭힘이 전혀 없었다. 또한, 경세적(經世的)인 관심도 커서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임금에게 여러 번 시정(時政)에 대한 건의사항을 주청하였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