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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6회 임구령, 다시 복직하여 권세를 누리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6회 임구령, 다시 복직하여 권세를 누리다.

그러면 1552년 3월에 파직된 임구령은 어찌되었을까? 그는 파직 당한지 9개월 만에 다시 복직한다. 권력 실세 윤원형을 아버지처럼 모신 그는 1552년 12월2일에 홍주목사로 제수된다. 부패한 관리 임구령이 다시 홍주목사가 되자 사관은 인사가 잘못되었다고 평한다.

유잠을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박민헌을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구령을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임구령은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으로 그의 형 임백령의 세력을 딛고 외람되게 공훈(功勳)의 자리를 차지하여 갑자기 당상(堂上)에 올랐으므로 물의 物議가 일어났다. 백성들에게 사납고 포악한 폐단을 끼쳐 백성들을 매우 괴롭혔으니, 공훈을 믿고 교만 방지하기를 거리낌 없이 한 탓 아니겠는가.

경대부(卿大夫)의 자제라 하여 그 부형(父兄)의 연고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직위를 제수하였으니 이는 공선(公選)이 아니며, 이로 말미암아 인사행정이 잘못되었다.
(명종실록 1552년 12월 2일)

한편 1560년 10월10일에 명종은 을사 공신들에 대하여 잔치를 베푼다. 이 잔치에는 임구령 등 을사정난 공신들이 참석하였다.

이 시기는 난세였다. 이상 기후가 발생하여 겨울철인데도 무지개가 나타나고 천둥이 치는 것이 여름철과 다름없었다. 농사는 수년 동안 흉년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고, 각 지역에 도둑들이 극성을 떨었다. 임꺽정이 황해도, 경기도 등 5개도를 누비며 강탈과 노략질을 한 시기도 이 때였다. 임꺽정은 백성들 사이에 의적으로 통하였으니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얼마나 심하였으면 그랬을까. 더욱이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인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유학을 신봉하는 퇴계 이황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종과 교종을 모두 부활시키고 승과를 치르는 등 불교를 진흥시켰다. 그녀는 백성들의 어려움과는 아랑곳없이 궁중에서 윤원형의 첩 정난정 등 권신의 부인들과 자주 잔치를 열었다.

사헌부에서는 이런 형편을 고려하여 임금에게 중삭연을 정지할 것을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명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금년 농사가 흉년이라서 백성들은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습니다. 공신중삭연(功臣仲朔宴)은 부득이 거행해야 하는 대례가 아닙니다. 상께서 백성들의 식량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진풍정(進豊呈)을 정지하라고 명하신 것은 백성을 걱정하는 뜻이 지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훈구에게 보답하는 잔치를 꼭 흉년 든 해에 행해야겠습니까? 세상물정이 모두 편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정지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공신의 잔치를 내가 즉위하고 나서 몇 번이나 하였는가? 참으로 정지할 수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헌부가 세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종실록 1560년 10월 5일)

따라서 을사공신에 대한 잔치를 벌인 10월10일의 명종실록에는 사관의 혹평이 실려 있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공신중삭연을 거행하였다. 전교하기를,“내가 16년이나 되도록 공신의 잔치를 폐하였으니 마음이 어찌 편하였겠는가. 오늘 이 잔치를 처음으로 베풀었으니 함께 흠뻑 취해야 한다.” 하고, 이어서 상 賞을 차등 있게 내렸다.

사신 史臣은 논한다. 국가에서 공훈이 있는 사람을 대우해주는 의식은 의당 거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풍년인가 흉년인지도 살피지 않고 구차하게 거행하였으니 이미 잘못되었다.

더구나 인물의 현명과 무능 여부를 따지지 않고 관작을 함부로 주었으니 자격 없는 사람들을 높은 벼슬자리를 주는 조롱이 바로 오늘에 있다.【그때 김명윤이 갑자기 숭록으로 승서되었고, 박한종은 이미 세자의 관례(冠禮)를 거행했을 때 정헌(正憲)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지금 또 숭정으로 초승되었다. 임구령은 초야의 비루한 사람이고, 신수경은 흉패하기 짝이 없으며, 최언호는 용렬하고 무식하며, 윤돈인은 교만하고 방자하며, 안세우는 아첨하는 소인이며, 정현은 교만하고 무식한데 모두 상 賞을 가자하여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외람하게 여겼다.】

【임구령은 임백령의 아우인데, 을사년에 정순붕의 아들 정현, 윤원형의 종숙 윤돈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재상의 집을 가만히 엿보았는데 종적이 흉칙하고 비밀스러워 여우 같았다. 유관 등이 화를 입은 뒤에 모두 공신의 칭호를 얻고 점점 승진하여 당상으로 승서되었는데 위인이 탐욕스럽고 방자하며 집에 있을 때는 행실이 금수와 같았다. 여러 번 군읍의 수령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백성들에게 긁어 들이는 일만 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원망하여 다 흩어졌다. 신수경은 윤원로·구엄과 함께 인종의 수명을 헤아려 점쳤으니 신하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은 죄가 심하다. 아들 신의가 공주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대간이 감히 논하지 못하고 왕법도 가하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훈적에 올려 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분에 하며 그의 고기를 먹고 싶어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아, 을사년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간흉들이 뜻을 얻어 위로 임금을 속였고 사류를 죽이거나 귀양 보내서 국가를 텅 비게 하였으니 망하지 않은 것이 머리털 한 가닥 차이였다. 그런데 도리어 위사공신의 칭호를 얻고 거짓된 이름으로 녹훈(錄勳)되었으니 하늘에 가득 찬 죄를 이루 다 벌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임금은 삭연(朔宴)으로 총애하였고 벼슬을 높여 주었으니, 이는 신하들을 권하여 화를 즐겁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난(亂)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칠 것인가? 정말, 통탄할 일이다.

(명종15년(1560년) 10월 10일)

다음날 사간원은 명종이 중삭연을 거행한 뒤에 공신들에게 품계를 올려 준 것을 거둘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삭연을 거행한 뒤에 가자 加資를 직접 받은 자가 12명이나 되니 세상 물정 物情이 지극히 온당하지 않게 여깁니다. 은혜를 베푸는 의식이 한결같이 참람하게 되었으니 이같이 한다면 뒷날에는 무엇으로 이어가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정국공신 성율, 위사공신 한경록 · 김명윤 · 박한종 · 송기수 · 이만년· 임구령 · 신수경 · 윤돈인 · 최언호 · 안세우 · 정현에게 가자한 성명을 속히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어제 처음으로 공신연을 거행하여 전례를 참작하여 하였으니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명종실록 1560년 10월 11일)

이어서 사헌부도 아울러 성율 · 김명윤 등에 대한 가자를 거둘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덕에 힘쓰는 이에게는 관작으로 권장해 주고 공에 힘쓰는 이에게는 상으로 권장해 준다 하였으니, 대개 덕은 관작으로 보답하고 노고는 상으로 갚는 것입니다. 공 있는 이에게 상을 주는 은전이 한 가지가 아니고, 관작이란 오직 제왕이 가지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보답해주는 도구이며 함께 천직을 다스리는 도구이므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마땅히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높은 작질과 중한 표장(表章)이 하루아침에 지나치게 베풀어져서 12명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수성(守成)하는 평온한 시대에 있어야 할 일입니까? 성율·한경록·김명윤·박한종·송기수·이만년·임구령·신수경·윤돈인·최언호·안세우·정현에게 가자한 성명을 속히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사간원에 다 하유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번거롭게 답해야 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종실록 1560년 10월 12일)

1561년 4월에 명종은 남원부사 임구령을 인견한다. 이 날의 실록도 임구령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혹독하다. 사관의 눈에는 임구령은 여전히 부패한 관리였다.
상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이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남원 부사 임구령【그의 형 임백령을 인연으로 하여 역시 훈록에 참여하였는데, 사람됨이 음험하고 흉측하여 사류(士類)를 함몰시키는 것을 일삼았는가 하면 공로를 믿고 교만 방자하였다. 그래서 집에 있을 적에는 작폐가 심하여 온 고장이 원망하였고 지방관이 되어서는 가렴주구가 지나쳐 온 고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과 석성 현감(石城縣監) 윤충서를 인견하였다.
(명종실록 1561년 4월 29일)

명종 시절은 정말 난세였다. 왕권은 흔들렸고 윤원형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왜구가 쳐들어오고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였으며 도둑이 의적이 되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나라, 썩은 조정, 무능한 정부이었다.

이런 시절에 관료를 한 청백리 박수량은 사관의 평가 그대로 명신(名臣)이다. 그는 이기나 윤원형 같은 권문(權門)을 추종하지 않고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키고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