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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5회 광주목사 임구령이 파직되고, 권신 이기가 죽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5회 광주목사 임구령이 파직되고, 권신 이기가 죽다.

을사정난 공신이 된 임구령은 벼락출세를 한다. 일등공신 임백령이 친형이고 최고 실세 윤원형과 이기를 아버지로 모시었으니 승승장구였다. 그는 3년이 채 안 되어 4품에 오른다. 1547년 2월6일에 그는 제용감 濟用監 첨정이 된다. 제용감은 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관서이다. 사관은 임구령의 고속 승진에 탄식을 한다.

임구령은 임백령의 아우다. 형 때문에 훈적에 참여되었으며, 처음 별좌였던 그가 3년이 채 안 되어 갑자기 4품에 올랐다. 인품이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관작이 매우 외람되어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그는 형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세력을 믿고 탐혹(貪酷)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으니 낭관의 직을 보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요행인데 벼슬이 다시 첨정으로 올랐다. 그 악을 조장함이 심하니,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닌가. (명종실록 1547년 2월 6일)

2월8일에 사간원은 승진이 빠른 임구령의 관직을 바꿀 것을 건의한다. 임구령이 공은 있다고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첨정에 오른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명종은 처음에는 이미 제수한 것인데 꼭 바꿀 필요가 있는가 하다가 다음날 간원이 다시 아뢰니 따랐다.

7월에 임구령은 다시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이 된다. 내섬시는 조선시대 각 궁과 전에 대한 공상(供上)과 직조(織造)등을 관장하는 관서이다.

이어서 임구령은 1547년 10월에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가 되었고 1550년 2월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된다.

한편 을사공신인 임백령은 1546년 7월에 사은사로 중국에 갔다 돌아오다가 병들어 죽는다. 임구령은 형의 상여를 호상한다. 여기에서 임백령에 관한 사관의 평을 읽어보자.

사신은 논한다. 임백령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사람 대하는 데 겸공(謙共)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재간이 능숙했다. 근면하게 봉직(奉職)하였고 민첩하게 옥사(獄事)를 처리했으며, 영광(靈光)에 걸군(乞郡)하고 영남을 안찰(按察)하여 자못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종 말년에 사림에서 현량과의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을 때 임백령이 불가하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몹시 미워하였다. 고관(高官)이 된 뒤에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하지 못하여 모든 처사에 거짓이 많았으며,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염근한 듯하였으나 그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려 해도 증거가 없고 추앙하려 해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말년에 이르러 이해가 얽히고 사변(事變)에 봉착한 뒤에야 그의 속셈이 환히 드러났고 별의별 낭패한 일이 수없이 많았으니, 아! 이 어찌 인신(人臣)의 좋은 경계가 되지 않았겠는가.

또 사신은 논한다. 임백령은 해남의 촌사람이요, 향리의 외손으로 의용(儀容)이 아름답고 언어가 공교로웠으며, 겉으로는 공손한 듯하나 속으로는 칼날을 숨기고 있어 조그마한 혐의도 반드시 갚고야 말았다. 을사년 가을에 이기· 정순붕 · 윤원형 등과 결탁하여 밀지를 이용해 옥사를 빚어냄으로써 대신이 죽임을 당하고 일시의 현류(賢類)가 일망타진되었으므로, 모두가 다 지적하였다. (후략)
(명종실록 1546년 7월19일)

광주목사 임구령 파직되다.

한편 박수량의 보고에 의하여 직위 해제된 임구령은 즉시 하옥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 그는 심문을 받기도 전에 모든 자백을 한다. 이리하여 이기가 부린 사반인이 광주지역에만 10명 이상 있음이 밝혀진다. 사반인이 한 고을에 10명이니 전라도 전체로 보면 100명은 족히 될 것이고 팔도 전체로 보면 수백 명도 넘을 것이리라. 노비도 아닌 양민을 이렇게 많이 거느렸으니 노비는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이렇듯 이기는 권력을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엄청난 사조직을 거느렸던 것이다. 이러니 누구든지 권신 이기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왕실도 이기의 눈치를 보았다.

1552년 3월18일에 명종은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킨다.

전 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키다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전라도 감사의 서장(書狀)을 보니, 광주에 이기(李芑)의 사반(私伴) 10인이 있다고 한다. 전 목사 임구령을 파직하라.”【임구령을 체직하여 하옥하자 신문하기 전에 자백하였다. 앞으로는 은닉하여 거짓으로 보고하고 뒤로는 아랫사람을 공갈하여 바르게 납초(納招)하지 못하게 한 실상이 현저히 드러났으므로 이렇게 하명한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사반 10인을 한 고을에서 점유하였는데도 목사로 있는 자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기망하였으니, 두 사람의 죄는 모두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파직만을 명하였으니 아, 이것을 ‘내가 너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독실히 잊지 않는다.’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임구령은 임백령의 아우로 함께 훈적에 기록되고, 몇 해 안 되어 높은 지위에 오르고 당상이 되었다. 이기와 윤원형을 자기 아비처럼 섬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함께 악행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명종실록 1552년 3월 18일)

한편 사관은 임금이 임구령을 파직이란 가벼운 처벌을 한데 대하여 지나치게 너그러운 처사라고 평하고 있다. 직필을 하는 사관 입장에서는 을사정난 공신들을 너무 감싸고 있는 명종이 못마땅하였으리라.

이기에 대한 탄핵이 계속되었으나 임금은 불허하다

이기의 사반인이 광주 한 고을에만 10명이상 있음이 밝혀지자, 양사는 이기의 탄핵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

양사가 다시 이기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대간이, 이기가 방자한 짓을 한 죄를 논할 때마다 상이 ‘종사(宗社)에 큰 공이 있는 노성 대신(老成大臣)을 실직시킬 수는 없다.’고 하교하였다. 아, 진신(縉紳)을 살육하고 국맥(國脈)을 해친 자가 큰 공이 있는 노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임금이 어리니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이는 오로지 윤원형이 이기· 정순붕 · 허자 · 최보한 · 임백령의 무리를 사주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다 같이 공신의 이로움을 점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몰래 궁액(宮掖)과 내통하여 흉도(凶徒)들을 칭찬해 왔기 때문에 상이 구문(舊聞)에 익어서 이와 같이 칭찬하는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명종실록 1552년 4월 1일)

그런데 4월 7일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이기의 탄핵을 중지하고 만다.

양사가 이기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이후부터 흉당(凶黨)이 기세를 떨치게 되었으니, 국가의 일이 차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명종실록 1552년 4월 7일)

이러하니 이기의 권신들은 더욱 활개를 쳤다. 당장에 임구령을 파직케 한 전 광주목사 이거(李璖)가 불이익을 당하였다. 이거는 광주 목사로 있을 적에, 사유(師儒)의 적임이라 하여 임기 전에 체직시켜 조정으로 올라오게 했다. 그런데 조정에서 내직으로 근무하지 못하고 다시 경상도 상주목사로 제수된 것이다. 이는 이조 판서 송세형(宋世珩)의 장난이었다. 이거가 임구령을 파직 당하게 만든 것을 미워한 때문이었다. 송세형은 임백령 처(妻)의 외숙이요 임구령은 임백령의 아우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 흉허물 없이 두터이 지내는 사이였다. (명종실록 1552년 4월 12일)

권신 이기. 마침내 죽다

중풍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이기는 얼마나 오래 살려고 권력에 연연하였을까? 이기는 양사의 탄핵이 중지 된 지 20일후에 마침내 죽는다. 그는 권력형 부정부패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이기의 졸기를 읽어보자.

영부사 이기가 졸하였다. 이기는 이의무의 아들이다. 그의 아우 이행(李荇)·이미(李薇)가 모두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랐는데, 형제들의 품성이 음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기는 처음 장리(贓吏 : 부패한 관리)의 사위라는 것으로 청현직(淸顯職)에 서용되지 못하고 산질(散秩)을 역임하여 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중간에 김안로의 비위를 거슬려 죄를 입고 귀양살이하다가 김안로가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이기는 인품이 흉패하고 모습은 늙은 호랑이와 같았으므로 그 외모만 보아도 속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평소 집에서 책을 펴고 글을 읽으며 자칭 학문의 심오한 뜻을 깨쳤다 하고 조그마한 일에 구애하지 않고 대범한 척하였다. 일찍이 송도의 유학자 서경덕과 학문을 논하다가 서경덕이 그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자 노기를 나타냈다.

중종 말년에 재신(宰臣)이 그가 쓸 만하다고 천거함으로써 흉계를 부릴 길이 드디어 통하게 된 것이다. 윤임의 일이 있자 이를 자기의 공으로 삼아 재상의 지위를 점거하고 또 권병(權柄)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정사가 그에게서 나왔고 권세는 임금을 능가하였다. 당당한 기세는 타오르는 불길 같아 생살여탈(生殺與奪)을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공경·재상·대간·시종이 모두 그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 따라서 모든 화복은 그의 희노(喜怒)에 좌우되고, 은혜를 갚고 원수를 갚음에 있어 사소한 것도 빼놓지 않았다. 자신을 의논할 경우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다가 끝내는 철저히 보복하여 전후 살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이며 조심하여 감히 이기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실어오는 물건이 상공(上供)보다 많았으며, 귀천(貴賤)이 마구 몰려들어 그 문전은 마치 저자거리와 같았다. 그의 자제(子弟)·희첩(姬妾)·비복(婢僕)·배종(陪從) 등이 배경을 믿고 작폐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이기의 아들 이원우 역시 교활 우매하고 연소한 일개 무인인데, 아버지 이기의 연줄로 승지가 되었다. 동료들이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기가 끝내 수상(首相)이 되어 스스로를 정책국로(定策國老)에 비기면서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므로 대간이 이에 사력(死力)을 다해 논박하여 상위(相位)만은 체직시켰으나 호랑이를 찔러 완전히 죽이지 못한 두려움은 남게 되었다. 이기는 다시 수상이 되자 과연 맨 먼저 발의한 대간을 죽이는 등 마구 흉독을 부렸다.

하루는 입시(入侍)하였다가 갑자기 풍현증(風眩症)을 일으켜 상 앞에서 넘어졌다.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와 인사(人事)를 살필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수년 동안 권병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간이 논계한 뒤에야 비로소 체직하였고, 그가 거의 죽게 됨에 미쳐서는 온 조정이 논계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기는 평소 무사를 많이 길렀는데 그 의도를 알 만하다. 나라에 화를 심고 사류를 죽이고 생민을 해쳤으며, 그의 사반(私伴)이 나라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아우 이행의 아들 이원록이 이기의 소행을 뼈아프게 여겨 숙부라고 부르지 않자 이기가 노하여 그를 귀양 보냈다. 이기는 끝내 흉측한 몸을 보전하고 있다가 편히 자기 집에서 늙어 죽었다. 이런 사람에게 임금의 은총이 끝까지 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 그의 고기를 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자지 못하는 것을 통한하였다. 3일간 정조시(停朝市)하였다.
(명종실록 1552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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