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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4회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 광주목사 임구령의 파직을 청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4회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 광주목사 임구령의 파직을 청하다.

이기 李芑,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다.

1551년 12월 28일에 명종 임금은 이기 李芑를 다시 영중추부사로 임명한다. 이기가 파직 된지 두 달도 채 안 된 때이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이기의 발령을 취소하라고 간언한다. 귀양 가야 할 사람을 파직으로 마무리한 것도 논란이 많은데 다시 벼슬을 준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임금에게 아뢴다. 그러나 명종은 불허한다. 큰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봉록을 잃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기는 그야말로 정권 실세였다.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양사가 다시 이기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자고로 큰 간적(奸賊)이 흉측한 계책을 부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내부적으로 임금의 총애를 굳히고, 외부와 연결하여 지원을 확보한다. 그렇게 하여야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감히 논란하고 동요할 수 없다. 이기가 다시 서용되었으니, 어찌 내외의 지원이 없이 갑자기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아, 통탄할 일이다. (명종실록 1552 년 1월 11일)

명종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원들은 자리를 걸고 연일 連日 영중추부사 이기를 탄핵한다. 1552년 2월5일에 대사간 김주는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임금에게 청한다. 언관들의 사기를 꺾지 말고 언로를 열라고 아뢴다. 그러나 명종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사간 김주(金澍)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의 호선(好善)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고의 호선이고, 임금의 실덕(失德)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간언을 막는 것이 가장 심한 실덕입니다. (중략) 이기(李芑)가 탐욕스럽고 흉험한 것은 전하께서 이미 통찰하였으면서도 파직시킨 지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숭반(崇班)에 서용하시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전하께서 호오(好惡)에 대해 분명치 않은 것인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중략)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해와 같이 도량을 넓히시어 우부(愚夫)의 말이라 해서 채택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이 마음에 거슬리더라도 반드시 도리에 맞추어 봄으로써 공론이 행해지고 기강이 서게 하여, 사기(士氣)가 진작되고 염치가 신장되게 하시면, 이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 광주목사 임구령의 파직을 청하다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이기를 탄핵을 계속 한지 두 달이 흘렀을 즈음인 1552년 2월 하순,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은 광주목사 임구령(林九齡)을 파직하라는 서장 書狀을 올린다. 1552년 2월29일자 명종실록을 읽어보자.

박수량이 광주 목사의 파직을 청한 것에 대해 전교하다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의 서장(書狀)【*.】을 정원에 내리면서 전교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파직을 청한 그 일이 사실이라면 가하거니와, 사실이 아니라면 조관(朝官)의 파직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아직 그 직에 있기 때문에 아전이 비호하여 사실대로 공초(供招)하지 않는다고 하니, 목사를 직위해제하고 추문하라.”

【*박수량은 서장에서, “이기(李芑)의 사반인(私伴人)을 조사할 때 광주 목사 임구령이 권문(權門)을 비호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조정에서 조사 나온 관리가 아전을 온갖 방법으로 힐책하여도 임구령이 아전을 항상 협박하여 사실대로 고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그대로 직에 두게 되면 끝내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속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임구령은 임백령(林白齡)의 아우로 을사 정난(乙巳靖難)의 공(功)에 참여된 사람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기가 국권을 잡으매 모든 정치가 자신으로부터 나와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호(豺虎 :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을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소의 무리가 서로 비호하며 주선하여 사당(死黨)을 조직,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권간(權奸)의 마음은 거스르지 않았다. 그 기세가 꺾인 후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한창 치열할 때이랴. 타인도 오히려 그 뜻에 순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동맹한 자이겠는가.
이기는 못하는 짓이 없는 사람인데 그래도 감히 찬탈하지 못한 것은, 조종(祖宗)의 덕택이 아직 사람들에게 입혀져 있고 성상의 덕업이 바야흐로 성행하여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하늘에 사무친 죄 만 갈래로 해체하여도 오히려 속죄하기에 부족할 것인데, 상의 권호(眷護)가 이와 같이 지극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군자는 이렇게 그 노적(老賊)의 마음이 더욱 거만해져서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사신은 논한다. 박수량은 명신(名臣)이다. 벼슬 초기부터 권문(權門)을 추종하지 않고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켰으므로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도록 남의 집을 빌어서 살았다. 이기의 사반(私伴)이 팔도에 퍼져 있었는데 방백(方伯)으로 있는 자가 모두 한 결 같이 숨기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그러나 박수량만은 유독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의론(時議)들이 가상하게 여기었다.

여기에서 실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실록의 요지를 보면 (1)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은 다른 방백들은 조사를 하지 않고 있는 이기의 사반인 조사를 한다. (2) 박수량은 임금에게 광주목사 임구령이 조사를 방해하고 있으니 파직하라고 보고한다. (3) 박수량의 보고를 받은 명종은 광주목사를 직위해제하고 추문하라고 지시한다.

먼저 이기의 사반인 조사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반(私伴)이란 반인(伴人)을 사적으로 차출하여 부리는 것을 말하는 데, 반인은 당상관 이상에게 수행원으로 시중들게 한 신역(身役)이 없는 양인(良人)이다. 따라서 양민은 노비가 아닌 만큼 당상관이 부릴 경우에도 그 사용은 상당히 제한되었고 정수(定數)도 있었다.

그런데 권신 이기는 사반(私伴)을 마음대로 부리었다. 1551년 10월24일에 조사수 등 조정 대신들은 “양민(良民)은 국가에서 부리는 것인데 이기가 부리는 사반(私伴)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아뢰었고, 10월25일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권신 이기가 부리는 정수(定數)외의 사반(私伴)이 한 고을에 십여 명에 이르고 전국에 없는 고을이 없으니 이를 합하면 몇 백 명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기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공 功이 크고 죽음이 임박한 대신을 어찌 귀양 보낼 수 있겠는가” 하면서, “정수 밖의 반인(伴人)과 둔전을 강탈 점유한 사실은 열읍에 조사해 보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런 명종의 말씀에 따라 이기가 부리는 사반인 조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조정의 조사관이 팔도에 파견되어도 다른 지역 관찰사들은 권신 이기의 보복이 두려워 조사를 제대로 안 한다. 방백들은 이기를 호랑이처럼 무서워하였다. 그가 1545년 을사년에 윤임(尹任)등을 살해하고 훈적(勳籍)에 오르고는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한때의 명현(名賢)들을 남김없이 귀양 보내고 죽였기 때문이다. 그런 희생자들이 송인수, 이약빙, 임형수, 이언적, 유희춘, 노수신, 백인걸, 송순 등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만은 유독 이기의 권문을 추종하지 않고 소신껏 일처리를 하였다.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박수량은 비리를 낱낱이 파헤쳤다. 여기에 박수량의 소신이 돋보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인물평에 상당히 인색한 직책인, 사관 史官도 박수량을 명신이라 평하였다

한편 박수량은 이기의 사반인 조사과정에서 광주목사 임구령이 조사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임구령이 권신 이기를 비호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아전을 협박하여 사실대로 고하지 못하게 하게 한 점을 직시한다. 조정에서 조사 나온 관리가 아전을 온갖 방법으로 힐책하여도 임구령 때문에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박수량은 임구령을 속히 파직시키라고 임금에게 보고한다.

박수량이 권신 이기의 오른팔인 임구령을 파직하도록 청한 점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시기는 권신 이기가 다시 복직되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즈음이었다. 박수량은 자칫하면 구수담(1500-1549)처럼 죽을 수도 있고, 간언하다가 귀양 간 이기의 조카 이원록처럼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수량은 일찍이 함경도경차관으로 파견 나가서 종성관리의 죄상을 밝혔듯이 박수량은 엄정하게 공권력을 행사하여 임구령의 죄상을 밝힌 것이다.

이 점에서 박수량은 단지 유리알처럼 청렴결백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청렴성은 백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정의로운 관료였다.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고 권력실세라도 예외 없이 비리를 척결하고자 하는 공직자였다.

광주목사 임구령은 누구인가?
그러면 광주목사 임구령(林九齡)은 누구인가? 임구령은 임백령(林白齡)의 아우로 을사정난(乙巳靖難)의 공신이다. 그는 몇 해 안 되어 높은 지위에 오르고 당상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을 자기 아버지처럼 섬기었다.(명종실록 1552년 3월19일)

임구령은 해남사람으로 오형제 중에 막내였는데, 그의 형제 이름은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다. 임구령의 바로 윗 형이 임백령이다. 임백령은 셋째 형 억령(億齡)과 함께 절의의 선비 눌재 박상(朴祥)에게서 공부를 배웠는데, 박상은 임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며,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 하고, 임백령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너는 정승이 되리라.” 하였다.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할 때 호조판서였던 임백령은 윤원형을 설득하여 이기, 정순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을사사화는 1545년 9월에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이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윤임, 유관, 유인숙 등 대윤 일파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1545년 8월22일 병조 판서 이기, 지중추부사 정순붕, 공조 판서 허자, 호조 판서 임백령이 형조 판서 윤임(尹任), 좌의정 유관(柳灌),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의 죄를 논의하여 그들을 유배 보낸다. 이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조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고 역모죄를 씌워 9월11일에 이들을 참형한다.

야사 野史에는 윤임은 그의 첩 옥매향 때문에 화를 입었다고 한다. 임백령이 사랑하는 기생 옥매향을 윤임에게 빼앗기자 원한을 품었다는 것이다. 유관은 이기의 원한을 사서 죽었다 한다. 중종이 이기를 병조판서로 삼으려 하자 이조판서 유관이 ‘이기는 뇌물을 받은 관리의 사위라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을사사화의 일등공신은 이기와 임백령, 정순붕, 허자이었다. 임구령과 윤돈인, 정현 등은 2등 공신이었다. 임구령은 명종실록에 두 군데 나타나듯이 을사사화 때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임백령은 아우 임구령을 윤돈인(尹敦仁)에게 보내어 현재 국사가 위의(危疑)에 처해 있고 윤임 등에게 반측(反側)한 정상이 많은데,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으로서 남의 일 보듯 지금까지 처리하는 일이 없으니, 어찌 옳다 하겠는가.’ 하였다. 윤원형의 친척 윤돈인은 이를 즉시 윤원형에게 전하자 윤원형이 크게 기뻐하여 밤중에 미복 차림으로 임백령을 만나 계략을 결정하였고, 임백령은 드디어 허자 등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그리고 보니 을사사화를 기획한 이는 임백령이고 이를 수행한 이는 임구령이다. (명종실록 1546년 7월19일)

임구령은 을사년에 정순붕의 아들 정현(鄭礥), 윤원형의 종숙 윤돈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재상의 집을 가만히 엿보았는데 종적이 흉칙하고 비밀스러워 여우같았다. (명종실록 1560년 10월10일)

한편 임백령과 임구령이 을사정난에 적극 참여한 것과는 달리 임억령(1496-1568)은 동생 임백령이 함께 모의하도록 권유하였지만 오히려 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 나온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준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好在漢江水
安流莫起波

이 시는 괜스레 붕당이나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