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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3회 박수량, 청백리에 두 번 뽑히다. (4)-영중추부사 이기 李芑, 파직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3회 박수량, 청백리에 두 번 뽑히다. (4)-영중추부사 이기 李芑, 파직되다.

명종이 국정쇄신을 위하여 청백리를 선발할 즈음에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로 있던 이기(李芑)는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었다. 1551년 10월24일에 홍문관 부제학 조사수, 직제학 이탁, 전한 윤춘년 등 대신들은 이기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기의 잘못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둔전(屯田)은 군국(軍國)의 경비를 충당하는 것인데 양전(良田)을 많이 점유하여 자기의 사물로 삼으며, 방납(防納)은 백성을 좀먹는 간특한 술책인데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자신의 이익으로 삼으며, 또 관작(官爵)은 국가의 귀중한 그릇인데 오직 뇌물이 들어오고 분경(奔競)하는 사람들이 문전에 가득하며, 양민(良民)은 국가에서 부리는 것인데 사반(私伴)이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남의 노비를 탈취하고도 본래부터 자기에게 있던 것처럼 하고 주군에 끝없이 징색합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의 장관이 조금만 자기 뜻에 어긋나면 무고로 중상하고, 청의(淸議)를 가진 선비가 자기의 실수를 논하면 죄로 조치하는 등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해가 갈수록 더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방관(傍觀)만 하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이런 풍습이 물들게 되면 장차 약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인데, 공론이 막히어 발설(發洩)되지 않습니다. 이러고도 국가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이 같은 사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상께서 아무리 세도(世道)를 만회하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그러니 일벌 백계(一罰百戒)를 늦출 수 있겠습니까.

영중추부사 이기(李芑)가 비록 막대한 공이 있으나, 역시 막대한 죄도 있습니다. 국가가 공허해지고 백성이 곤궁해지는 것은 실상 이 사람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명종실록 1551년 10월24일)

여기에서 사반(私伴)이란 사사로운 반인(伴人)을 말한다. 원래 반인은 당상관 이상을 시중들게 한 신역(身役)이 없는 양인(良人)을 말하는 데, 이런 반인을 사적으로 차출하여 부리는 것을 사반 私伴이라 한다

한편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을사년(1545년) 변란에 이기가 원훈 元勳으로서 다시 정승이 되었는데 그는 공훈을 믿고 방종을 일삼았으니 탐욕스럽고 음험하여 평생에 조그마한 원망만 있어도 역적의 무리로 지목하여 살해하기도 하고 귀양 보내기도 하여 조정에 사람이 텅 비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겁을 먹고 그를 두려워하였다. 또 전에 자기를 논박한 것을 원망하여 구수담(具壽聃)을 살해하였고, 자기를 간한 혐의로 그의 조카 이원록(李元祿)을 귀양 보냈다. 이로부터 이기의 권세가 더욱 성하여져 사람들이 감히 그의 과오를 말하지 못했다. 경술년(1550년) 가을 조강에 입시하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별감 몇 사람이 들어다가 장청(將廳)에 두었는데 끝내 폐질인(廢疾人)이 되었다. 그런데도 탄핵을 당한 뒤에야 체직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공론이 격렬하게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10월25일에는 사헌부, 사간원 대간들은 모두 사직하겠다고 하면서 이기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으나 명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기는 본래 음흉한 사람으로서 자기의 공만 믿고 마음대로 방자하게 굴면서 정권을 농락하고 사림을 제압하여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조금만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죄로 다스리니 그 권세는 날로 치성(熾盛)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벼슬의 제수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오므로 뇌물을 바치고 청탁하려는 사람들이 그의 문을 메우니 현능 여부는 가리지도 않고 오직 재물의 경중에 따라 하였으며, 만약 전조(銓曹)의 장관이 조금만 자기 뜻을 거스르면 공공연하게 성을 내며 끝내 죄에 빠뜨려 해를 입히는 등 조정의 명기(名器)를 자기 한몸의 뇌물 얻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또 둔전(屯田)이 있는 지방의 병사와 수사 및 수령들에게 촉탁하여 그 둔전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으니, 황주(黃州)·봉산(鳳山) 및 전라도 · 청홍도 병영(兵營)의 둔전은 모두 그에게 빼앗겼고 그 밖에도 빼앗긴 곳을 낱낱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들 병영과 각 읍은 이로 인하여 잔폐하여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양민들의 감축이 오늘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상께서 이를 염려하시어 경석(經席)에서 누차 간절하신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기는 오랫동안 수상 자리에 있으면서 성상의 마음을 잘 이어받아 준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정수(定數) 외의 사반(私伴)이 한 고을에 십여 명에 이르고 전국에 없는 고을이 없으니 이를 합하여 계산하면 몇 백 명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방납(防納)은 바로 간사한 백성의 모리(謀利)하는 술책이므로 비록 필부라도 약간의 식견이 있으면 오히려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기는 삼공의 반열에 있으면서 차마 못할 짓을 하였으니, 그의 용심(用心)을 알 만합니다. 열읍(列邑)에서 한없이 거두어들이는데 수령들도 그 뜻을 받아서 뇌물 실은 짐바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또 노비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공공연히 탈취하고, 만약 그 억울함을 송관(訟官)에게 호소하여 그 소장을 접수시킨 자가 있으면 즉시 그 송관의 장을 불러다가 위협으로 겁을 주었습니다.

이기의 형편없는 정상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공론은 형적도 없고 도리어 서로 이를 본받아 습속이 날로 비루해지고 탐욕의 기풍은 날로 치성하여 민생을 피폐하게 하여 백성이 이미 흔들리매 나라의 형세가 위험하여 패망의 화가 조석에 임박해 있으니 식견 있는 인사라면 어느 누가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일벌백계의 본보기를 보이지 않는다면 온 나라가 함께 망하는 화를 장차 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멀리 귀양 보내어 많은 사람의 심정을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공이 크고 죽음이 임박한 대신을 어찌 귀양 보낼 수 있겠는가. 공론이 이와 같다면 마땅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경계할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수 밖의 반인(伴人)과 둔전을 강탈 점유한 사실은 열읍에 조사해 보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명종실록 1551년 10월 25일)

11월1일, 2일, 3일에도 사헌부와 사간원은 이기를 쫓아낼 일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11월4일에는 대사간 김주 · 대사헌 권찬이 이기를 멀리 귀양 보내라고 상소하였다. 그들은 나라는 이미 염치를 찾아볼 수 없고 탐오의 풍습만 날로 성하여 근본조차 흔들리고 있는데 이렇게 된 것은 영중추부사 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는 이기의 권세가 워낙 커서 사람마다 입을 다물고 공론이 막혔지만 이제라도 이기를 처벌하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역시 불허하였다.

11월 5일과 6일에도 양사에서는 이기를 쫓아낼 것을 세 번 청했으나 불허하였고, 홍문관도 역시 청했으나 불허하였다. 11월 7일에는 영경연사 윤개가 이기를 쫓아낼 것을 청하였다. 윤개는 대간들이 업무를 전폐하고 논집(論執)한 지 거의 보름이나 되었는데 공론을 따르고 따르지 않는 데에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이 달려있는 것이니, 이를 참작하시어 이기를 죄주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내 11월 7일에 영의정 등 삼정승이 이기의 처벌을 청하지 않은 일로 대죄를 한다.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가 아뢰기를,
“이기의 일은 공론이 이와 같은데 미처 아뢰지 못했으므로 대죄(待罪)합니다.”하니, 답하기를,
“대간과 시종의 논계만으로도 족한데 무슨 아뢸 말이 있겠는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심연원 등이 아뢰기를, “이기의 일은, 공론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죄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영부사는 현재 녹(祿)만 잃지 않았을 뿐이다. 죽음에 임박한 늙고 병든 대신에게 차마 죄줄 수 없다.” 하였다.
(명종실록 1551년 11월7일)

11월 8일에도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이기를 쫓아낼 것을 두 번 청했으나 불허하였고, 9일에는 승정원까지 나섰다. 그들은 이기를 쫓아낼 것을 임금에게 청했으나 명종은 불허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전폐하고 복합(伏閤)한 지 벌써 보름이 넘었습니다.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고 울분이 더욱 격렬해지니,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공론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권신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면서 온 세상의 입을 막아 말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국가에 복록이 있어 다행히 공론이 제기되었으니, 이는 치란과 흥망의 큰 전기입니다. 탐포하고 음흉한 정상을 상께서 깊이 아셨으니 반드시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셔야 합니다. 세도(世道)를 만회함이 이 일에 달려있는데도 지금까지 미루기만 하시니, 인심의 의구(疑懼)함이 없지 않으며 공론의 격렬함이 전날보다 더 심합니다. 신들이 지척의 자리에 있고 여론이 이와 같음을 소상히 알고 있으면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론이 울분해 하고 대간이 일을 전폐한 것을 모르지 않지만
이기는 이미 권세가 없으니 끝내 조정에 서서 정사에 관여할 리가 없다. 공이 있는 사람은 반역의 죄가 아니면 옛날에도 말감(末減)해주었으니, 어찌 공을 헤아리지 않겠는가. 그는 녹만 잃지 않았을 뿐이다. 죽을 날이 임박한 늙고 병든 대신을 차마 찬축할 수 없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명종실록 1551년 11월9일)

참 한심한 임금이다. 그러나 조정대신 모두가 이기의 처벌을 거론하자 명종은 곤혹스러웠다. 아니 을사사화의 공신 이기를 계속 비호하고 있는 수렴청정한 문정왕후가 난처하였다.

11월9일에 다시 양사는 이기와 이무강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명종은 드디어 이기의 충복인 이무강을 문외 출송한다. 11월 10일에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은 합동으로 이기와 이무강의 귀양을 두 번 청하였다. 명종은 하는 수 없이 이기를 파직시킨다.

양사가 이기와 이무강의 일을 두 차례 아뢰니, 답하였다.
“영부사는 파직만 하라. 이무강의 간사함은 위아래가 소상히 알고 있으니, 어찌 다시 간사한 술법을 쓰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명종실록 1551년 11월10일)

이리하여 영중추부사 이기는 11월10일에 파직된다. 대간과 조정 대신들이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지만 가장 가벼운 징계인 파직으로 마무리된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