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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7회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에서(2)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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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에서 (2)

이제 별당을 나와서 안채를 둘러본다. 안채는 주인이 사는 집인데 당호는 경덕재 敬德齋이다. 덕망을 공경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안채는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이다. 안채의 기둥에도 역시 주련이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박수량이 지은 강릉 경포대 시이다.

鏡面磨平水府深 경면마평수부심
只鑑人形未鑑心 지감인형미감심
若使肝膽俱明照 약사간담구명조
應知臺上客罕臨 응지대상객한임

거울 면같이 평평하고 수심은 깊은데
단지 사람의 모습만 비추고 마음은 비추지 못하네.
만일 속마음을 몽땅 환희 비춘다면
응당 알겠거니와 이 누대 위에 누가 머물 것인가.

청백을 노래한 이 시를 안채에 걸어 놓은 뜻은 아마도 박수량 하면 가장 떠오르는 단어가 청백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수량의 아이콘은 청백이다.

안채를 보고 나서 다시 정문 쪽으로 나와서 오른편에 있는 사랑채로 간다. 사랑채 이름은 강수재 講修齋이다. 수양을 가르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자기의 마음을 먼저 수양하여야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 수기치인 修己治人. 나랏일을 보는 것은 먼저 자기 몸을 닦는 것부터 시작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이렇듯 강수재는 자기 관리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강수재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 있다.

筆下光華元似錦 필하광화원사금
胸中溟海自無邊 흉중명해자무변
若爲化作遙東鶴 약위화작요동학
萬里隨公上碧天 만리수공상벽천

붓끝의 광채 원래 비단 같거니와
가슴속 바다 같은 도량 끝이 없네.
만일 요동의 학이 될 수 있다면
만 리 멀리 그대 따라 푸른 하늘까지라도 오를걸.

이 시는 1539년에 박수량이 ‘명나라의 공(龔)·오(吳) 두 사신을 전송하며 지은 시(別龔吳兩使)’의 일부이다.

당시에 예조참판인 박수량은 공 · 오 두 사신을 접대하는 실무책임자이었는데, 그는 이들과 전별하면서 칠언율시 두 수를 지었다. 이 시는 ‘청백리 아곡 박선생 실기’에 남아 있다.

먼저 1539년 1월28일의 중종실록을 살펴보자.

중종 34년(1539년) 1월 28일 1번째 기사

공(龔) ·오(吳) 두 사신에 대비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공(龔)·오(吳) 두 사신이 두목(頭目) 90여 인을 거느린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신과 두목들의 의복을 미리 준비해 둘 것을 각사에 말하여, 모든 일을 대개 갖추도록 팔도에 하서함이 옳겠다. 전에 보면 사신들이, 천자께 진헌한다느니 또는 친구들에게 준다느니 하면서 많이 청구하였었다. 50자 세면(細綿 : 가는 무명 베)과 모시를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미리 민간에서 거두어 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제용감의 일은 호조 참판이 전담해야 하는데 박수량(朴守良)이 병든 부모를 뵈러 하향하였으니, 반드시 때에 맞추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예조 참판 김희열(金希說)과 서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소세양(蘇世讓) 역시 앓는 부모를 뵈러 고향에 내려갔는데 그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아야 하니 속히 하서하여 빨리 올라오도록 하라. 또 사신이 나오는 시기가 반드시 5∼6월 사이가 될 터이며 경회루에서 자주 접견할 것인데, 전에 새로 칠은 하였지만 비둘기들이 드나들면서 많이 더럽혔으니 미리 청소하고 수리하는 것이 좋겠다. 못 가에 디딤돌들도 무너진 것이 많으니 날씨가 따뜻해지거든 수리하라고 미리 해당 관사에 말하라.”

중종 34년(1539년) 1월 28일 4번째 기사

박수량 · 김희열· 이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수량(朴守良)을 예조참판에, 김희열(金希說)을 호조참판에, 이찬(李澯)을 사간원 사간에 제수하였다.

이렇듯 중종임금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는 것에 철저히 대비할 것을 조정에 지시하고 병든 부모를 뵈러 자리를 비운 호조참판 박수량의 벼슬을 예조참판으로 바꾼다.

그러면 여기에서 박수량이 명나라의 공 · 오 두 사신을 전별할 때 지은 시 7언율시 2수의 전문을 읽어 보자.

제1수

다시 용문객(여기서는 명나라 사신을 말함)을 접견하고 비단 도포를 입은 사신을 배알하니
바람결에 고고 高高하게 서 있는 옥으로 깎은 나무인 듯
은총이 북극성(명나라 천자를 말함)으로 부터 내려 지초 같은 어찰을 반포하시는 데
사신의 부절이 동녘 변방 나라를 향하니 봉황새 깃털을 보겠네.

再接龍門拜錦袍 재접용문배금포
瓊枝玉樹倚風高 경지옥수의풍고
恩從北極頒芝札 은종북극반지찰
節指東藩覩鳳毛 절지동번도봉모

필법은 눈부셔 뱀이 풀 속에서 꿈틀 대는 듯
편장은 세상에 다시없어 바다가 파도를 뒤엎는 듯
구만리 날아오르는 붕새처럼 유계(중국 하북성에 있는 고을)로 돌아갈 것인데
고개 돌리면 놀란 먼지만이 짝달막한 쑥을 휘감으리.

筆法照人蛇入草 필법조인사입초
編章絶世海飜濤 편장절세해번도
鵬程九萬里幽薊 붕정구만리유계
回首驚塵捲短篙 회수경진권단고

제2수

향기로운 풀 우거진 넓은 들녘 가르며 휘감기는 하천
누대 가득 좋은 경치인데 떠나는 배는 어느새 강 복판에 있네.
별리 別離의 한이 봄날의 그리움 휘감아 견딜 수 없네.
떠나는 깃발은 저녁 안개 가르는 걸 어찌하리.
芳草平郊隔帶川 방초평교격대천
滿樓風景半江船 만루풍경반강선
不堪別恨牽春思 불감별한견춘사
其奈征旄劈晩烟 기나정모벽만연

붓끝의 광채 원래 비단 같거니와
가슴속 바다 같은 도량 끝이 없네.
만일 요동의 학이 될 수 있다면
만 리 멀리 그대 따라 푸른 하늘까지라도 오를걸.

筆下光華元似錦 필하광화원사금
胸中溟海自無邊 흉중명해자무변
若爲化作遙東鶴 약위화작요동학
萬里隨公上碧天 만리수공상벽천

이 시는 명나라 사신의 위엄을 극찬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전별시이다.

그리고 보니 사랑채 기둥에 걸린 주련은 전별시 제2수의 두 번째 7언 4구이다.

예조는 교육 · 문화 · 외교업무를 하는 자리이다. 예조 참판 박수량은 사신 대접의 실무책임자였다. 한편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총 책임자인 접빈관은 좌찬성 양곡 소세양 (蘇世讓: 1486∼1562)이다. 소세양은 황진이와 인연이 있는 중종 시절 최고의 문장가이다. 소세양과 황진이와의 일화는 지금도 풍류객들에게는 전설로 남아 있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소세양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관직에 입문한다. 1511년 26세에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이 때 같이 공부한 사람이 이행, 김안국, 성세창, 홍언필, 정사룡 등 당대를 주름잡은 명문장가 名文章家 들이었다. 1512년에 수찬 겸 경연검토관 시절에는 당돌하게 중종 임금에게 그동안 금기시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윤허를 얻어 현릉顯陵에 이장하고, 대묘 大廟에 위패를 두도록 했다. 이후 이조정랑 · 직제학 등을 거쳐 왕자사부 師傅와 승지 등을 지내고. 1533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판서 · 호조판서, 예조판서, 홍문관 · 예문관 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고 1539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 시기에 소세양이 공 · 오 두 사신의 접빈관을 한다.

청백당을 나오면서 박수량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그는 고부군수 · 보성군수 · 전라도관찰사 등을 한 목민관이요, 청백리일 뿐만 아니라, 사헌부 장령 · 사간원 사간으로 감찰과 언론 규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 · 좌승지를 하면서 임금을 직접 보필하였다. 또한 예조참판 등을 하면서 명나라와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