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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6회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에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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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에서

박수량 생가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청백당 淸白堂을 간다. 청백당은 홍길동 테마파크 내에 조성된 한옥이다. 이 한옥은 명종임금이 하사하였다는 99칸 집을 재현하여 지은 것인데 일반인들에게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

청백당 입구에는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당’ 안내도, 유허비와 하마석 그리고 ‘아곡 박수량 선생과 청백당’ 안내판이 있다.

유허비와 하마석은 원래 다른 곳에 있었는데 한옥이 조성되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유허비 앞면은 ‘정혜공 아곡 박선생 유허’라고 적혀 있고, 뒷면은 유허비 음기 陰記가 한문으로 쓰여 있다.

<청백리 아곡 박선생 실기>에서 유허비 음기 번역 글을 찾았다.

정혜공 부군 府君의 이름은 수량이요, 호는 아곡이다. 성종임금 때인 1491년에 장성읍 서쪽에 위치한 하남 마을에서 출생하여 38년 동안 조정에서 할동하시어 벼슬은 경상 卿相에 이르렀으나 가정에는 저축된 음식이 없을 뿐 아니라 두어칸 되는 집도 없었다. 그러므로 명종임금 때인 서기 1551년에 청백리로 기록되었으며 큼직한 99칸의 집을 소곡리에 세워 주었으니 이는 조정으로부터 부군의 청빈함을 특별히 포상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영화를 누리게 한 것이다.

아! 세상일이란 상전이 벽해가 되는 것처럼 바뀌어 장엄한 99칸의 집은 둔갑술에 의하여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빈터만 남아 있다.

시종일관 분명한 사실이 삼백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방 노소老少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오고 있으니 이는 믿음직한 사적이 올바르게 전해 왔다고 이를 것이다.

또한 하마석 下馬石 하나는 지금까지도 마멸되지 않고 옛터의 곁에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 유허비를 세우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 어느 누구나 정혜공의 유허인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날 세워진 이 비석은 자손 모두에게 부군을 사모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에 감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던 바를 모아 이 비석 뒷면에 기록한다.

후손 균응 삼가 지음
한편 ‘아곡 박수량 선생과 청백당’ 안내판에는 이곳에 청백당이 지어진 내역이 설명되어 있다.

명종임금은 박수량의 청빈함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였다. 어사는 직접 보고 느낀대로 “어머님이 살고 있는 시골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은 날이 한 달에 절반이나 되고, 집은 비가 새고 있을 정도로 청빈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임금은 이곳에 99칸의 집을 지어 청백당 淸白堂이란 이름과 함께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장성군은 홍길동 테마파크 내 고택 한옥 체험 숙박시설을 박수량 선생의 청백리 정신 의미를 부여하여 ‘청백당’이라고 하고 ‘청백한옥’이란 이름으로 개관하여 많은 이들이 한옥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청백 淸白의 의미를 보다 심도 있게 음미하여 보자.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청 靑은 오행 가운데 나무 木으로써 동쪽에 해당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으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며, 유학의 덕목 중 인 仁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울 동대문 이름은 흥인지문 興仁之門이다. 백 白은 오행 가운데 금 金으로 서쪽에 해당하고, 결백과 진실, 순결 등을 뜻하며, 유학의 덕목 중 의 義를 의미한다. 따라서 서울 서대문 이름이 돈의문 敦義門이다.

따라서 청백리는 단순히 부정부패하지 않고 청렴결백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의가 함께 이루어진 관리라야 청백리이다. 처신은 청렴하게 하고 백성을 사랑으로 성심껏 대하여야 청백리이다.

이제 청백당으로 들어간다. 대문을 들어서니 한옥 안내 표시판이 있다. 왼편으로 가면 별당, 안채, 행랑채가 있고, 오른편으로 가면 초당, 사랑채, 행랑채이다. 발길을 왼쪽으로 돌리어 안채 뒤에 있는 별당부터 구경한다. 원래 별당은 집 주인이 다목적 용도로 사용한 집인데, 역사 드라마에서 별당 아씨라는 이름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우리에게는 아직 혼인 안 한 규수 閨秀가 거처한 집으로 각인되어 있다. 별당의 명칭은 숙연당 淑然堂이다. 정숙한 부덕 婦德을 갖춘 집이라는 의미 같다.

그런데 별당 기둥에는 주련이 4개 걸려 있다. 7언4구 한문을 읽어 본다.

吏悉心力趨事政
民忘勞思效其德
官鳩財物備其用
工殫巧手稱其法

주련을 자세히 보니 맨 아래에 한글로 운이 달려 있고 번역문도 적혀 있다.

이실심력추사정
민망노사효기덕
관구재물비기용
공탄교수칭기법

벼슬아치들은 마음을 다해 일을 서두르고
백성들은 피곤한 줄 모르고 힘을 다하였네.
관리들은 재물을 거두어 비용으로 삼고
공인 工人은 기교를 다하여 법도에 맞게 하였네.

이 글이 바로 박수량이 12세 때 무장현 茂長縣 백일장에서 장원한 읍취루부 挹翠樓賦의 한 구절이다. 무장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일대인데 동쪽은 고창군, 서쪽은 서해 바다, 남쪽은 영광군과 인접하여 있다.

읍취루는 무장현 관아에 딸린 누각으로 여기에서 관청 손님을 맞고 연회를 하였다. 최근에 전라북도 고창군은 무장현 관아읍성 복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성곽 일부와 관아인 취백당 그리고 읍취루를 복원하였다.

읍취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에 ‘신루(新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현감 최검(崔儉)이 고쳐 짓고 읍취(挹翠)라 이름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1502년(연산군 8년)에 무장현감 최검은 무너지고 부서진 읍취루를 다시 짓는다. 이때 아전과 백성과 관리와 공인 工人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누각을 지었다.

현감 최검이 이름 지었다는 읍취 挹翠란 취 翠를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취는 비취색(翡翠色), 청록색(靑綠色). 짙푸른 색(色)인데 청색보다 더 진한 색이다. 그러므로 읍취루는 푸르름을 귀하게 여기는 누각이다. 한편 무장 관아의 이름 또한 취백당 翠白堂인데 이 이름도 청백당과 비슷한 의미이다.

한편 누각이 준공되자 무장현감은 전라감사를 초청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면서 백일장도 연 것 같다. 이때 박수량이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제치고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 12살의 소년이 장원을 하였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요즘 같으면 신문과 뉴스에 대서특필 감이다.

박수량이 지은 부는 읍취루 낙성식에 즈음하여 무장현감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이다. 이 부에는 현감 이름이 최후 崔侯로 나오는데 그가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현감 최검 崔儉인 듯 싶다. 박수량은 부의 중간 중간에 현감의 덕을 칭송한다.

태평해져 인생 백 년 동안 걱정이 없게 된 것은
어진 원님 최후 崔侯께서 수자리에 오셔서이지.
위엄과 용맹 떨쳐 변방을 방비하시고
몸소 공검 행하시고 효성스러우시네.
(중략)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을 하여
게으름 피우지 않으시니
이 누대에 오르시어 직무를 수행하시네.
방백의 선정을 따르고
밝으신 조정의 밝은 법도를 받드네.
분노를 풀어주는 인자한 기풍을 살리시고
아뢸 곳 없는 궁핍한 백성들을 알아주시네.

한편 박수량은 ‘좋은 현감을 만나서 백성들이 복을 받는다.’로 읍취루 부를 끝맺는다. 어느 조직이든 지도자가 잘 하여야 한다.

결론 삼아 노래하거니와
최후 崔侯께서 지혜를 부리시니
층층 누대 우뚝 섰네.
방백이 발문을 짓고
군자들이 이를 따라 쓰네.
정교 政敎가 펼쳐지니
소인들은 보호를 받네.
우람한 기둥 흔들리지 않으리니
백성들은 그 복을 간직하리.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