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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4회 청백리 박수량 묘소에서 (2)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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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청백리 박수량 묘소에서 (2)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이미지 1제4회 청백리 박수량 묘소에서 (2)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이미지 2
제4회 청백리 박수량 묘소에서 (2)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박수량 묘소를 내려오면서 입구에 세워진 경계석에 둘러진 비를 살펴본다. 자세히 보니 신도비이다. 신도비 맨 위에는 전서체로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정혜박공 신도비명’이라고 적혀 있다. 전서는 의정부 우찬성 이용원이 썼다. 신도비가 세워진 때는 정해 3월이다. 정해년을 서기로 환산하여 보니 1887년이다. 신도비는 경연관 서연관 송병선이 글을 짓고 공조판서겸 의금부사 최익현이 글씨를 썼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로서 송시열의 9세손이다. 1905년 11월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 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그는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1905년 음력 12월 30일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신도비 글씨를 쓴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도 잘 알려진 구한말의 애국지사이다. 그는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애국정신을 배웠는데 1876년에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곧바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 · 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에 최익현은 전라북도 태안에서 궐기하였다. 그는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대마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신도비의 내용은 주로 김인후의 묘지명을 언급하였는데 명종임금이 99칸의 집을 지어주었고 식수를 어사정 御謝井이라 이름 지어 준 것과 순조 임금 때인 1805년에 정혜 貞惠란 시호를 내리었고 장성군 삼서면 모암서원에 위패가 모시어진 점등이 추가되었다.

신도비 후반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이 서술한 책이 병화에 타서 정확한 문헌적 증거는 말하지 못하지만 후세에 믿을 만한 것은 오직 김하서 선생이 지은 비문이다 할 것이니 김하서 선생의 글은 무엇보다도 귀중할 것이다.

이를 보면 신도비도 하서 김인후의 묘지명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송병선이 지은 비명을 읽어 본다.

명에 이르되,
아! 정혜공이시어
산 정기를 받으시었네.
뛰어난 재주로 벼슬은 경상 卿相에 올랐도다.
청백하고 청렴하심이여.
장차 누구가 짝이 될 것인가?

임금의 은택이 샘에 넘치고
담재(김인후의 자)가 쓴 글이 묘지에 자상하도다.
금빛처럼 반짝이고 옥처럼 단단하여
마음을 간직하고 행동을 닦으셨다네.

이에 다시 생각해 보니
김선생의 이 한 말씀 제일일세.
저 건너 금호산 바라보소.
소나무도 싱싱하지만 산봉우리도 높았네.
큰 빗돌에 새기지 마소.
구전으로 전파되었네.
두서없는 나의 말 한마디 더하리다.
공의 청백에 욕됨이 없어야 하고
공의 묘소 황폐 않게 하려면,
자손 모두 노력해야 하리라.

이제 박수량 생가로 발길을 향한다. 승용차에서 박수량이 임종할 때에 지었다는 시 한수를 음미하여 본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 있으니
어찌 생각을 번잡하게 하랴

화복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마음이 흔들리랴.

내 몸을 잃지 않고
내 일을 다 하였으니

유유자적할 뿐,
이외에 또 다시 그 무엇을 찾을 것인가.

入洛有咏 입락유영
死生有命寧煩念 사생유명녕번염
禍福隨天不動心 화복수천부동심
不失吾身吾事畢 부실오신오사필
悠悠此外㪅何尋 유유차외갱하심

운명과 천명에 맡기고 부동심으로 욕심 안 부리고 절제하면서 살았던 박수량 선생. 이 시대에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가?

사진 - 박수량 신도비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