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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회 박수량의 졸기를 명종실록에서 읽다. - 광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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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박수량의 졸기를 명종실록에서 읽다. - 광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의 유적을 찾기 위하여 전남 장성군을 간다. 강원도 강릉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박수량의 졸기를 읽는다. 그의 졸기는 1554년 1월19일자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명종 16권, 1554년 1월 19일 2번째 기사

지중추부사 박수량의 졸기

지중추부사 박수량(朴守良)이 죽었다. 임금께서 전교하였다.
“염근(廉謹)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내 매우 슬프다. 특별히 치부(致賻)하라.”

【박수량은 호남 사람이다. 초야에서 나와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여러 번 지방에 보직을 청하였다. 일처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그의 아들이 일찍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그는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聖恩)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집도 10여 간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중종께서 특가(特加)로써 포장하여 지위가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저축이 조금도 없어서 처첩들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으므로 대신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비록 덕망은 없었지만 청백의 절개 한 가지는 분명히 세웠으니 세상에 모범이 될 만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청백하여 급촉(急促)한 실수가 많았다. 그의 청렴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지 학문의 공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신은 논한다. 박수량은 건사(建事)하는 재능이 없었고 포용하는 국량이 작았는데, 다만 몸가짐을 청근(淸謹)하게 하였을 뿐이다.


○知中樞府事朴守良卒。 傳曰: “廉謹之人, 今其亡矣, 予甚慟焉。 別致賻可也。”【守良, 湖南人也。 起自草萊, 歷敭華秩, 爲親屢乞外補。 處事極其精詳, 而淸白尤著於世。 其子嘗欲作第於京, 讓之曰: “我本鄕産, 偶蒙聖恩, 得至於此。 汝輩安得作第於京乎?” 且戒其家毋過十餘架。 中廟朝特加以褒之, 位至六卿, 其卒也, 家無甔石之儲, 妻妾不得從喪南歸, 大臣啓請, 僅得襄事。 雖無德望, 有所建明, 淸白一節, 亦足爲範於世也。 然淸之過多, 有急促之失。 蓋其淸出於天性, 而非有學問之功也。】
【史臣曰: “守良無建事之能, 小包容之量, 只淸謹自守而已。”】

이 졸기는 명종의 전교와 사관의 인물 평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명종의 전교를 다시 읽어보자.

“염근(廉謹)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내 매우 슬프다. 특별히 치부(致賻)하라.”

명종은 박수량을 염근한 사람으로 알아주었다. 명종 시절에 박수량은 염근리로 두 번이나 뽑히었다. 1546년 4월에 염근리가 된 이후 1552년 11월에는 염근리 33명중에 한 사람으로 뽑히었는데 명종은 이들에게 밤늦게 까지 잔치를 베풀고 돌아갈 때에 길을 밝히라고 관촉 官燭까지 하사하였다.

이렇게 박수량을 신임하던 명종 임금이었으나 그도 한 때는 박수량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야사에는 박수량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박수량이 국유재산을 사유재물로 삼는다고 모략을 하였다. 그래서 명종은 비밀리에 암행어사를 시켜서 진상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어명을 받은 암행어사는 과객으로 가장하여 박수량의 장성 본가를 살피었다. 박수량의 집은 청빈 일색이었다. 암행어사는 이를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명종임금은 다시 다른 어사를 시켜서 재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어명을 받는 두 번째 암행어사 역시 박수량의 청빈함을 보고하였다. 그 때야 비로소 명종은 박수량을 신임하고 중책을 맡기었다 한다.

명종의 박수량에 대한 신임은 각별하였다. 명종은 왕궁에서 직영한 농장에서 재배한 쌀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사실은 명종이 그에게 보낸 어찰에 기록되어 있다.

어찰 御札

경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도다. 건강은 어떠한지 궁금하오. 듣건대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때가 한달 중에 거반 居半(거의 절반)이나 된 다는 데,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오.

나의 동원에 벼가 막 익었음에, 몇 말을 타작하여 보내노라. 비록 물량은 적으나 마음을 씀은 크니 경은 어찌 여길는지?
마땅히 대궐에 들어와 나를 보좌하여야 할 것인데... 간절히 바라고 바라노라. 나머지는 격식을 갖추지 못하오.

인정전 仁政殿에서 쓰다.

다음은 박수량 졸기의 사관의 평가를 살펴보자. 사관은 비교적 인색하게 박수량을 평가하고 있다. 비록 덕망이 부족하고 포용력도 적었지만 청백 하나는 세상에 드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신 史臣은 “박수량이 일처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아들이 일찍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그는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聖恩)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집도 10여 간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관이 실록에 박수량과 그의 아들과의 개인적인 일을 기록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만큼 사관은 이 일화를 증거삼아 박수량이 청백하게 살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사관은 “박수량은 지위가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죽었을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처첩들이 상여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갈 돈도 없었으므로 대신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임금께 주청한 대신은 대사헌 윤춘년을 말한다. 1554년 1월 28일자 명종실록에는 윤춘년의 주청 기록이 실려 있다.

명종 9년(1554년) 1월 28일 1번째 기사

조강에 나아가서 정사를 의논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 윤춘년이 아뢰기를,
“죽은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할 때도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본가가 장성에 있는데, 그의 가속(家屬)들이 상여를 모시고 내려가려 하나 그들 형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이 사람을 포장(褒奬)한다면 청백한 사람들이 권려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량은 청근(淸謹)하다는 이름이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매우 슬프다. 포장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후략)


대사헌 윤춘년(尹春秊 1514∼1567)은 명종 임금의 외삼촌이고 정권을 농락한 윤원형의 친척인데, 당시에 그는 윤원형의 총애를 받아 출세한 실세였다. 윤춘년은 성격이 경박하고 자부심이 강하여 일찍부터 대학자로 자처하는 등 공명심은 많았으나, 주색을 즐기지 않고 비교적 청렴·결백하였다고 하며 1552년에 박수량과 함께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윤춘년의 주청에 이어 명종 임금은 박수량의 상사를 치루는 데 조정에서 지원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이는 같은 날자 실록의 두 번째 기사에 실려 있다.

명종 9년(1554년) 1월 28일 2번째 기사

박수량의 집에 상사를 치루는데 도움을 줄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박수량의 집이 곤궁하여 상사를 치를 수도 없고 시골로 내려가는 것 역시 어렵다 하니, 일로(一路)에 관인(官人)들로써 호송케 하고 상을 치르는 물품을 지급하라. 그리고 증직(贈職)하는 것이 좋겠다.”

사신은 논한다. “수량의 염근은 남쪽 선비의 으뜸이었다. 守良之廉謹, 南士之良也。 윤춘년이 경연에서 ‘수량의 청백을 포장하여 사풍(士風)을 권려해야 한다.’고 아뢰었으므로 이 명命이 있었다. 겉으로는 청근한 듯하나 外若淸謹 실상 안으로는 비루한 자 內實鄙陋者들은 어찌 이마와 등에 땀이 흐르지 않았겠는가. 寧無顙背之汗乎?”

실록 말미에 사신은 “겉으로는 청근한 듯하나 실상 안으로는 비루 鄙陋한 자들은 어찌 이마와 등에 땀이 흐르지 않았겠는가.”라고 적어 가짜 청백리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낮에는 깨끗하고 군자인체 하지만 밤에는 더럽고 도둑인 위선자가 얼마나 많은가?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