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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회 백비 白碑에 새긴 뜻은 - 강릉 경포대에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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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백리, 박수량 기행
제1회 백비 白碑에 새긴 뜻은 - 강릉 경포대에서
전남 장성 소나무 숲
한 묘지 앞을 지키는 낯선 비석
이름도, 내용도 없이
단 한자의 글자도 새기지 않아
붙여진 이름 백비 白碑
이곳에 묻힌 이는
조선의 선비 박수량 (朴守良 1491-1554)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
충청도사, 동부승지, 형조판서...
39년의 공직생활
그러나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청빈한 삶
그가 죽었을 때 집에 돈이 없어
가족이 상여를 메고 고향도 가지 못하니
신하들이 임금께 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명종실록 1554년 1월19일)
그리고 왕이 하사한 묘비
공을 적어 그 덕을 기릴까
글자 하나 새기지 않는 깊은 뜻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지킨
청렴의 절개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이름
조선의 청백리
벼슬로서 기억하지 말고
당신의 맑고 청렴한 마음으로,
그 뜻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백비에 담았습니다.
(이종범 조선대학교 교수의 멘트)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지킨
청렴의 절개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이름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
이름조차 없는 묘비에 아로새겨진
목민관의 참 뜻을 생각합니다.
2011년 10월 하순에 KBS 1 TV에서 청백리 박수량에 관한 방송을 보았다. KBS가 한국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매주 한 개 씩 주제를 정하여 방영하는 ‘한국의 유산’. TV로 박수량의 백비를 보니 가슴이 뭉클하여 진다.
요즘처럼 청백리가 그리운 때도 없다. 공직자나 교사나 공공기관의 직원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돈에 깨끗하지 못하고, 이번 정권은 깨끗하리라고 믿었는데 권력 실세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있다. 오죽하였으면 국민권익위원회가 부패신고를 하면 포상금을 준다고 할 까?
요즘 장성군이 청백리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한다. 박수량과 송흠의 청백 정신을 기리는 답사 교육이 공직자, 공공기관 직원과 시민들로 부터 호응을 받고 있단다.
필자는 2011년에 장성군 인터넷 홈페이지에 청백리 송흠을 연재하였고 <청백리 송흠>이란 책도 내었다. 이번에 다시 청백리 박수량 연재를 시작한다. 역사 기록에서 박수량을 찾고 역사 현장에서 박수량의 숭고한 뜻을 다시 한 번 느끼고자 한다.
특히 이번에는 박수량의 인물됨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박수량은 청백리로만 알고 있는데, 중앙 관료로서 박수량은 어떤 일을 하였고, 목민관으로서 그는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였으며, 아들로서 박수량은 부모에게 얼마나 효도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답사 기행도 전라도 장성뿐만 아니라 서울, 강릉, 전주 등 박수량의 흔적이 있는 곳을 폭넓게 찾아 나설 생각이다.
강릉 경포대에서 - 박수량의 시를 음미하다.
가장 먼저 가는 곳은 강릉 경포대이다. 필자가 지금 살고 있는 강릉은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고장이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태어난 곳이다.
경포 鏡浦는 수면이 거울과 같이 청정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수이고, 그 위에 세워진 경포대는 관동팔경 중 제1경이다. 춘천국립박물관은 최근에 개관10주년 특별기획전으로 경포대 전시를 하였다.
경포대하면 생각나는 것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이다. 정철은 전라도 담양에서 낙향 중에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아 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 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이렇게 시작하는 <관동별곡>에는 경포대가 등장한다.
저녁놀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밟아
신선이 타는 수례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리나 뻗어 있는 얼음 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리어
큰 소나무 숲 그 속에
흠뻑 걸쳐 놓은 것 같고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속 모래알도 헤아릴 만하구나.
한 척의 배를 띄우고 닻줄을 풀어
정자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은 곁에
동해바다가 거기로다.
조용하구나, 이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동해바다의 경계여.
이보다 갖춘데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홍장의 고사가 야단스럽구나.
경포대를 간다. 경포 호수 앞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낙락장송 소나무를 감상하면서 걸어 올라가니 경포대가 있다. 경포대에는 중종 시절에 우참찬을 한 심언광의 시와 숙종의 어제 御製 시 등이 걸려 있다. 경포대라고 써진 현판도 두 개나 되고 제일강산 第一江山이란 현판도 있다.
경포대는 아주 시원하다. 여름에 이곳에서 낮잠을 한 숨 자도 좋겠다. 마루에 앉아서 바로 앞에 보이는 경포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는 너무 맑고 잔잔하다. 그래서 ‘거울 같은 포구’로 이름 붙이어졌나 보다.
청백리 박수량도 이곳 경포대를 다녀갔다. <청백리 아곡 박선생 실기> 책에는 박수량이 지은 경포대 7언 절구 시가 있다. 박수량의 자작 글들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는데 경포대 시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鏡浦臺 경포대
鏡面磨平水府深 경면마평수부심
只鑑人形未鑑心 지감인형미감심
若使肝膽俱明照 약사간담구명조
應知臺上客罕臨 응지대상객한임
거울 면인양 평평하고 수심은 깊은데
단지 사람 모습만 비추고 사람 마음은 비추지 못하네.
만약 속마음을 몽땅 환하게 비춘다면
응당 알겠거니와 경포대 위에 머물 사람이 드물 것이네.
박수령의 한시 漢詩처럼 거울 같은 호수에 사람 모습만 비치어서 그렇지 사람의 속마음까지 환히 비친다면 어느 누구가 경포대에 오를 것인가. 자신 있게 오를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것이다. 청렴한 사람, 세상을 깨끗하게 산 사람만 찾아올 것이다. 아예 탐욕한 자는 마음이 드러날 까 보아 이곳에 안 올 것이고, 낮에는 깨끗한 척 하지만 밤에는 더러운 행동을 하는 박쥐같은 사람도 검은 마음이 탄로 날 까 보아 경포대에 안 오르리라.
문득 ‘4지 四知’란 말이 생각난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는 4지는 아무도 모를 줄 알고 뒷구멍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 자체를 경계한 말이다.
중국 후한 後漢의 재상 백기 伯起 양진 楊震이 동래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 茂才로 천거를 받았던 창읍령 昌邑令 왕밀 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왔다. 왕밀은 금 金 10근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 我知子知 何謂無知]” 하고 금을 물리쳤다 한다.
박수량은 경포대에 와서도 자연 경치를 감상하기 보다는 청렴을 생각하였다. 중종 시절, 명종 시절은 부정부패가 극심한 시대이었다. 훈구 대신과 왕실 외척들의 탐욕이 극에 달하여 백성들은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하여 홍길동 같은 의적도 나오고 임꺽정 같은 대도 大盜도 나왔다.
박수량의 시를 감상하니 마음이 숙연하여 진다. 지금껏 단순히 경치만 감상한 것이 부끄럽다. 박수량은 항상 탐욕을 경계하고 절제하면서, 신독 愼獨의 자세로 세상을 살았다. 이런 청백리를 기리는 의미로 강원도 강릉시가 경포대에 청백리 박수량의 시 편액을 걸어 놓으면 좋겠다.
첨부사진 : 1. 강릉 경포대
2. 경포대에서 바라본 경포 호수
3. 경포대에 걸려 있는 제일강산 편액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