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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30회 다시 송흠의 묘소에서(2) - 묘갈명을 읽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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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다시 송흠의 묘소에서(2) - 묘갈명을 읽다.


송흠(1459-1547)의 묘소는 단출하다. 망주가 좌우에 있고,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가 있다.
묘소 옆에는 거북이 등위에 세워진 묘갈비가 있다. 묘갈비의 윗부분에는 전서체로 ‘판중추부사 겸 세자이사 世子貳師 지지당 송선생 묘갈명 墓碣銘’이라고 적혀있다.

판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종1품 벼슬이다. 중추부는 문무당상관으로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기관인데, 정1품인 영중추부사 바로 밑애 판중추부사가 2명 있었다. 세자이사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의 서열 3위인 종1품 벼슬이다.


묘갈비는 1975년에 세워졌는데 묘갈명 墓碣銘은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이 그의 제자인 송흠의 7대손 옥강 송명현 (1659-1743)의 부탁을 받아서 1683년에 지었다.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 제41권에는 신도비명 神道碑銘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묘갈명과 신도비 글을 모두 윤증이 지었으니 내용이 같다.)

그러면 묘갈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우리 중종조에 호남 삼계현(森溪縣)에 어진 대부 휘 송공 흠(宋公欽)이 있었으니 자는 흠지(欽之)이다.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고 벼슬살이를 청빈하게 하였으며, 지위는 숭반(崇班)에 올랐고 80세를 넘기고 돌아가시었다. (중략)


공은 1459년 3월 13일에 태어나 1480년(성종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들어갔다. 연산군의 혼조(昏朝)를 당해서는 고향에 물러나 거처하며 후진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1502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제를 마치자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는 홍문관 정자로 소환되어 저작(著作), 박사(博士), 수찬(修撰), 사간원 정언ㆍ헌납, 병조 정랑, 전라 도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공은 모친의 연세가 높기 때문에 외직을 구하여 보성군수(寶城郡守), 옥천군수(沃川郡守), 순천부사(順天府使), 여산군수(礪山郡守)에 연달아 보임되었다. 또 조정에 들어와 사헌부 장령, 여러 시(寺)의 정(正),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1524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다가 광주 목사(光州牧使), 나주 목사에 옮겨 제수되었다. 1528년에 조정에 들어와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1529년에 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갔는데, 고을에 재임하는 동안 모친을 봉양하는 데 외에는 처자와 첩, 종은 굶주림과 추위만 가까스로 면할 정도였고 체차되어 돌아갈 때에는 집에 한두 섬의 양식도 없었다. 다스리는 곳마다 염근(廉謹)하다는 이유로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전후로 7번 임금의 옥음(玉音)을 받았으니, 임금이 포상하고 총애함이 매우 컸다.

1532년에 중종이 의정부로 하여금 정신(廷臣) 가운데 청절(淸節)한 성품이 평소 드러나고 연로해도 변하지 않은 자를 선발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이에 참찬 조원기(趙元紀)와 공을 선발하여 아뢰니, 조원기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리고 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려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옮겨 제수하도록 명하면서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장려하였다.

1534년에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모친의 연세가 99세였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모친을 봉양하게 해 주기를 청하니, 유시를 내리기를, “방면(方面)의 직임이 중하니 가볍게 체차할 수 없지만 봉양 때문에 간절히 사직하니 특별히 소청을 윤허한다.” 하였다. 공의 당시 나이도 76세였다.

집으로 돌아가 효성을 다해 봉양하여 모친 곁을 떠나지 않고 춥거나 덥거나 의관을 풀지 않았으며 음식물은 반드시 맛을 본 뒤에 올렸다. 모부인이 101세에 임종하니 초상을 예제대로 극진히 치렀고 노쇠하다고 해서 적당히 하지 않았다. 제사도 경건하게 지냈으며 삭망(朔望)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조상의 기신(忌辰)에도 반드시 참여하니 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1538년(중종33)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고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두루 제수되었다.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노쇠하다는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자 상이 윤허하고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1541년에 의정부 우참찬에 특별히 제수되자 공이 성상의 돌보아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궐에 나아가 사은숙배한 다음 곧바로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경회루(慶會樓) 남문(南門)에서 술을 하사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쌀과 콩 40곡(斛)을 지급하게 하였다. 공이 표전(表箋)을 올려 사례하고 가마를 타고 도성을 나갔는데 삼공(三公) 이하 온 도성 사람들이 나와 강가에서 전송하였다. 고사(故事)에 의정부 당상은 임금의 비지를 얻지 못하면 도성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이날 삼공이 사인(舍人)을 보내 정원에서 계품하게 하자 상이 윤허하였으니, 이 또한 특별한 대우이다. 찬성 김안국(金安國), 참찬 권벌(權橃),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사인 송인수(宋麟壽)ㆍ김로(金魯), 검상(檢詳) 나숙(羅淑) 등 제공이 모두 모였고 그 나머지도 모두 당시의 이름 있는 자들이었다. 공이 직접 기술한 기행록(紀行錄)이 남아 있다.

1543년에 또 특명으로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규암(圭庵) 송인수가 본도의 절도사로 부임하였는데, 공의 별업(別業)에 가서 정자 하나를 지어 ‘기영정(耆英亭)’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어 축하해 주었다.

1547년(명종2) 11월 15일에 시골집에서 임종하니 나이 89세였다. 이듬해 1548년 1월에 거처하던 삼계현 선방산(船舫山) 곤향(坤向)의 언덕에 예장하였다. (중략)

기묘년(1519, 중종14)에 화를 당한 뒤에는 스스로 지지당(知止堂)이라고 호를 지었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고향에 살면서 예양(禮讓)을 돈독히 숭상하고 명행(名行)을 연마하였으므로 문하에서 배출된 명류 인사가 매우 많았으니,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 그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편액을 ‘관수(觀水)’라고 써서 걸고 직접 시와 서문을 아울러 지어 뜻을 담았다. 뒤이어 화답한 이는 퇴휴(退休) 소세양(蘇世讓),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휴수(休叟) 이문건(李文楗) 및 규암공이었는데, 연구(聯句)로 지어 방대한 작품이 되었으니 밝게 빛나 완상할 만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혼인하면서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리이고 사대부 집에서는 매우 부끄럽게 여길 바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녀를 모두 빈한하지만 행실이 있는 선비를 골라 시집보내고 장가들였으니, 이는 더욱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부인 하음 봉씨(河陰奉氏)는 감찰 인(寅)의 따님이다. (중략)


명(銘)은 다음과 같다.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 萊子嬰兒之啼
백기 양진은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 伯起暮夜之知
소부는 동문밖으로 물러 나고 / 疏傅東門之退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네 / 潞公洛社之會

세상에 드문 미담인데 / 曠世美事
공이 실로 모두를 겸비하였네 / 公實兼備

스스로 성취하는 것은 사람이고 / 自致者人
온전히 내려주는 것은 하늘이네 / 全畀者天
여기 나라의 아름다운 많은 일들을 보게 되었으니
/ 于以見國家之亨嘉
어찌 공 한 몸의 영화에 그치겠는가 / 奚止公一身之英華

아 백년이 지나도록 / 吁嗟百祀
풍모와 운치를 잇지 못하였기에 / 風韻莫嗣
내 공의 무덤에 명을 지어 / 我銘其丘
공의 숨은 덕을 밝히노라 / 用闡厥幽

일반적으로 묘갈명의 맨 마지막 부분인, 명 銘은 묘갈명의 주인공에 대한 평가임과 동시에 찬사이다. 윤증의 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명문 銘文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 萊子嬰兒之啼


노래자(老萊子)는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70세의 나이에도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는 인물이다. 송흠도 99세의 어머니를 위하여 76세의 나이에 전라감사 벼슬을 사직하고 모친이 101세에 별세할 때 까지 극진히 봉양을 하였으니 정말 효심이 지극한 분이다. 그의 시호가 효헌공 孝憲公이었으니 얼마나 효의 근본이 되는 인물인가!


양백기는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 伯起暮夜之知



양백기(楊伯起)는 후한(後漢) 때의 학자 양진(楊震)을 말하는 데, 그는 일찍이 동래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茂才)로 천거를 받았던 창읍령(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金) 10근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니,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하고 금을 물리쳤다 한다.

이후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는 것을 4지 四知”라 하며 공직자의 부패를 방지하고 청렴을 강조하고자 하는 실천규범으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었다.


송흠을 양백기로 비유한 것은 그가 중종 시절 대표적인 청백리로 정암 조광조의 삼촌인 조원기와 함께 여러 관료들의 존경을 받았고, 전근할 때 나라에서 내어주는 7필의 말도 본인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가 탈 말 3필만 받아서 삼마태수 三馬太守란 별호도 있으며, 예산을 절약하기 위하여 여산군수 시절 호산춘이란 술을 직접 빚었고, 보성군수 등 외직의 수령을 일곱 번이나 하면서 중종 임금으로 부터 여러 번의 표창과 함께 국산 비단을 포상 받았다. 그래서 송흠은 명종시절 청백리인 박수량과 함께 장성의 대표적인 청백리이다.



소부는 동문으로 물러 나갔고 / 疏傅東門之退

소부는 한(漢)나라 소광(疏廣)이다. 선제(宣帝)때 황태자의 태부(太傅)로 있었는데,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이미 높아졌는데도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소부(少傅)로 있던 조카 수(受)와 함께 사퇴하고 장안의 동쪽 성문으로 나가 고향에 내려갔다.

이것은 송흠이 1541년에 우참찬으로 부름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으나 중종임금에게 사직을 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간 것을 한나라 소부에 비유한 것이다. 이 때 송흠은 삼정승 이하 여러 대신들의 특별한 전별을 받았다.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으니 / 潞公洛社之會


노공(潞公)은 송나라 때 장상(將相)을 지낸 문언박(文彦博)의 봉호이다. 사마광(司馬光), 부필(富弼) 등 13인과 함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는 노인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는 송흠은 1543년에 또 특명으로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당시 전라감사 규암 송인수가 기영정(耆英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세상에 드문 미담인데 / 曠世美事
공이 실로 겸비하였다 / 公實兼備


송흠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 일에는 충성하고 청렴하며, 그의 호가 지지당인 것처럼 물러날 자리를 알고 그칠 줄을 알아 절제하고 겸손하게 살아, 노인으로서 공경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대단하며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가!


스스로 성취하는 것은 사람이고 / 自致者人
온전히 부여하는 것은 하늘이다 / 全畀者天
여기에서 나라의 아름다운 많은 일들을 보게 되었으니 / 于以見國家之亨嘉


한문의 형가(亨嘉)는 《주역(周易)》〈건괘(乾卦)〉에 “형은 아름다움의 모임이다.[亨者 嘉之會也]”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윤증이 형가로 표현 한 것은 송흠(宋欽)의 훌륭한 행적들을 아름다운 일로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어찌 공 한 몸의 영화에 그치겠는가 / 奚止公一身之英華
아 백년이 지나도록 / 吁嗟百祀
풍모와 운치를 이을 이 없네 / 風韻莫嗣
내 그 무덤에 명을 지어 / 我銘其丘
그 숨은덕을 천명하노라 / 用闡厥幽

이제 연재 글을 마친다. 지지당 송흠 선생. 그는 진정으로 이 시대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다.


( 2011.8.8 연재를 모두 마치면서, 김세곤 삼가)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