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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8회 송약선, 임진왜란 때 순절하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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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송약선, 임진왜란 때 순절하다.


8월초에 송씨 문중 분과 함께 송흠의 4대손인 송약선(宋若先: 1568-1597)의 묘소를 간다. 송약선은 임진왜란 때 무관으로서 근무하다가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이다. 그의 묘소는 장성군 삼계면 발산리 대무마을에 있다. 마을회관에서 주차를 하고 1-2분 걸으니 왼편에 송씨 문중의 재실이 하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집이 하나 있고 그 집 옆에 놓인 산길을 따라서 올라가니 묘소가 여러 개 있다. 맨 위에 있는 묘소가 송약선과 부인 박씨의 합장 묘소이다.

먼저 참배를 하고 묘비를 살펴보았다. 비의 앞면에는 “ 증 통훈대부 호조좌랑 정촌 신평 송공약선지묘 배 숙인 밀양 박씨”라고 되어 있다, 옆면 3면은 송약선의 묘갈명이다. 비는 1997년에 12세손 송병일이 세웠는데 묘갈명은 홍종호 洪鍾皓가 지었다.

이미 읽은 <호남절의록>과 <신평송씨 대동보> 내용과 함께 묘갈명을 읽으면서 송약선의 행적을 요약한다. 송약선은 1568년에 태어났는데 강개 慷慨하고 지절 志節이 있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나라가 왜적의 침략을 당함에 비분강개하고 시 두 수를 쓰고 창의를 한다.

제1수

통곡하노라 ! 왜적이 서울에 침략해 오니
백년 사직이 하루 아침에 기울어지네.
남도에서 같은 마음의 선비를 만나
칼 짚고 대장기를 휘두르며 의병을 일으키겠노라.

제2수

충신의 의는 무겁고 내 몸은 가벼운데
국가의 난리에 어찌 살 바를 바라겠느냐.
문득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칼 짚고 일어서니
맹세코 후일에 나라가 평온해 질 날을 보겠노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굉중 · 이용중 형제, 강항, 임수춘 등 18명과 함께 창의하여 의곡과 무기를 모아 금산의 고경명 의병에게 보내고, 또 영광의 이굉중 · 이용중 형제, 임수춘 등과 함께 영광에서 양곡 1,200석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에게 보내었다. 기효증은 이 양곡을 선조 임금이 있는 의주의 행재소에 바친다.

그런데 1592년 10월2일에 영광군수 남궁견이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자 영광군민들은 불안 해 하였고, 영광의 지도층 55명이 자발적으로 향토방위를 한다. 이응종을 수성 도별장으로 하고, 성의 방위체제를 24개 부서로 편성하여 55명을 책임자로 임명한다. 이 시기에 송약선은 영광에서 군관생활을 하였는데 그도 수성에 함께 참여 하였다. 이들 55명은 영광군 영광읍 관람산 아래의 임진수성사에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송약선은 다시 남원성 전투에 참여한다. 1597년 7월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거제도의 칠천량에서 전멸하자, 일본 수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해로 진출하게 되었고 우키타(宇喜多秀家) · 고니시(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 5만6천명은 진주를 점령하고 섬진강을 따라 구례 석주관에서 의병을 섬멸한 후 남원으로 들어갔다. 조선과 명(明)의 연합군 4,000여 명은 남원에 병력을 집결시켜 이에 대응하고자 했다. 양원(楊元)의 명군 3,000명과 접반사 정기원은 남원으로 가서 성을 지켰다.

8월 6일 구례현감 이원춘이 남원성에 들어오고 이어서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등이 남원성에 들어왔다. 13일에 일본군이 남원성에 도착하자 이 날 밤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14일, 15일 이틀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이복남 · 이신방등 장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 장수 양원만이 살아서 탈출한 채 성은 함락되었다. 또한 성을 방어하던 2000명의 병사와 1만여 명의 주민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전라북도 남원시에 위치하고 있는 만인의총은 남원성 싸움에서 전사한 군 · 관 · 민을 합장한 무덤이다.

<호남절의록>에는 송약선도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서 왜군의 적의 칼에 피살당함을 수치로 알고 활시위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되어 있다. 송약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부인 박씨도 스스로 순절하였다.
그 지아비에 그 지어미이다. 묘갈명에는 “부 夫는 군을 위해 죽고, 부 婦는 부 夫를 위해 순절하였으니 충 忠과 열 烈이 일문 一門에 남았다.”고 적혀 있다.

지지당 송흠은 충효와 청백 그리고 86세의 나이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문을 올려 판옥선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고, 후손인 송약선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혈충 血忠과 고절 苦節로서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 청사에 빛날 그 조상에 그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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