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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7회 수강사 유허지에서 -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각마을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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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수강사 유허지에서 -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각마을

주말에 장성 역사인물 답사를 한다. 장성군청의 강대익 문화재 계장과 장성문화원의 공영갑 씨 그리고 필자 부부이다. 답사하고자 하는 역사인물은 송흠(1459-1547), 박수량(1491-1554), 김인후(1510-1560), 변이중(1546-1611) 그리고 기정진 (1798∼1879)이다. 그리고 보니 장성에는 청백리와 거유 巨儒들이 참 많다. 문불여 장성

이들 중 가장 선배인 지지당 송흠 선생과 관련하여서는 기영정과 관수정 그리고 묘소를 먼저 간 후에 수강사를 간다. 수강사는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각마을에 있다. 새로 지어진 수각마을회관에서 기념비를 보았다. 거기에는 수강사 유허비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인재 忍齎 김방현이 엮은 글이다.


수각마을 마을회관 기념비

수인산의 정기를 받아 남으로 뻗어내려 (중략)
그런가 하면 유물 · 유적으로는 수강사(지) 유허비가 수옥리 수각163-2 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지지당 송흠(1459-1547)을 우봉 용암사에서 수각으로 이배 주향하기 위하여 서기 1702년(숙종28년)에 건립하였으나 1864년 (고종 5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69년 유지에 수강서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후략)


마을 입구에서 수인산 쪽으로 3-4분 정도 걸어가니 채소밭이 있고 그 근처 나대지에 비석 하나와 주춧돌 몇 개가 있다. 여기가 바로 수강서원 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비를 살펴보았다. 비석의 앞면에는 “수강서원 유허비”라고 적혀 있고, 뒷면은 “효헌공 孝憲公 송선생 .. . 숭정기원후 ... ”로 되어 있다.

송흠 선생은 1547년에 별세하였다. 그로부터 150여년 되던 해, 지조 있는 선비들이 조정에서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주청한다. 1687년에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1654-1689)가 건의를 하였고, 1695년 12월21일에 박태상(朴泰尙 : 1636-1696)이 시장 諡狀을 올린다. 박태상은 인품이 담박하고 속되지 않아 평안도 관찰사, 이조판서 등 요직을 여러 번 지냈으나 항상 가난했고, 인재 등용에 공도(公道)를 철저히 실천한 선비이다.

마침내 숙종임금은 1696년 7월에 송흠에게 효헌공 시호를 내린다. 예조애서는 효헌 孝憲, 효정 孝貞, 간민 簡敏이란 시호 세 개를 올렸는데 효헌으로 낙점을 한다. 효헌은 한자 그래도 해석하면 효도를 헌법처럼 여긴다는 의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자.

숙종 22년(1696 년) 7월 24일
조대수·박소·김남중 등에게 관직과 시호를 내리다

조대수(趙大壽)를 보덕(輔德)으로 삼고, 증 영의정(贈領議政) 박소(朴紹)에게 문강(文康)이라는 시호(諡號)를,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남중(金南重)에게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판중추(判中樞) 송흠(宋欽)에게 효헌(孝憲)이라는 시호를, 진원 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에게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에게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후백(李後白)에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헌공 송흠의 신위는 1699년 11월23일에 용암사에 봉안되었다. 용암사는 1694년에 세워진 장성군 삼계면 기영정 바로 뒤에 있는 사당인데, 소론의 영수인 명재 윤증(1629-1714)의 할아버지 팔송 윤황(1571∼1639)과 아버지 윤선거(1610-1669)를 모신 곳이었다. (나중에 윤증도 이곳에 배향됨) 대사간이었던 할아버지 윤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를 이끈 성혼의 사위이고,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예학 김장생(1548-1631)의 제자이며 송시열과 같이 수학하였다.

그런데 신위를 배향함에 있어서 서열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나 보다. 그리하여 송흠의 후손과 함평이씨의 후손은 이곳 수각마을에 수강사를 짓고, 지지당 송흠과 죽곡 이장영의 신위를 배향한다.

마을회관 기념비에 나와 있듯이 1702년 5월26일에 송흠의 신위는 용암사에서 수강사로 옮기어진다. 신위를 옮길 때 제문은 능주목사 남정중이 지었다. 그 해 수강사에서 첫 제사를 지낼 때의 축문을 한번 읽어보자. 축문은 판서 임방 任埅이 지었다.


충효는 지극한 성품이요.
간결은 평소의 품행이라
청풍과 꿋꿋한 그 절조는
백세의 뒤까지 우러르리.

忠孝至性 충효지성
簡潔素履 간결소이
淸風苦節 청풍고절
百世仰止 백세앙지


수강사가 세워진 후 8-9년 되던 때 송흠의 7세손 옥강 玉岡 송명현 (宋命賢: 1659-1743)은 묘정비를 세우고자 스승인 윤증에게 수강사우기 壽岡祠宇記를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1683년에 이미 송명현의 부탁을 받아서 묘갈명 墓碣銘을 지어준바 있는 윤증은 글을 쓸 수 없다고 사양한다. 송명현은 낙담을 하다가 양팽손의 후손 양득중과 상의를 한다. 그리고 양득중은 1711년에 수강사우기를 짓는다. 이 글에는 송흠과 이장영을 모신 내역이 적혀 있다.

1708년에 송흠과 같이 배향된 죽곡 竹谷 이장영(李長榮 : 1521- ?)은 본관이 함평(咸平)으로서 1540년(중종 35)에 진사가 되었고, 1546년(명종 1)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성균관 주변에서 관노(館奴)와 소란을 벌이는 군졸을 구타하였다가 동료유생과 함께 국법을 집행하는 군졸을 구타하였다 하여 의금부에 하옥 당하였다. 이 일은 사기를 억누르는 일이라 하여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함양군수 등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

수강서원 옛 터를 둘러보면서 아쉬운 점은 이곳에 안내판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안내판을 세워서 수강서원과 송흠 그리고 이장영의 그 내역을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를 측량하여 서원 배치도를 대략으로라도 만들었으면 한다. 사당을 다시 지어서 장성의 역사인물을 기리고 청렴과 충효의 교육장으로 활용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