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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6회 조선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1555년에 만들어지다. - 송흠이 건의한 지 11년 후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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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조선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1555년에 만들어지다. - 송흠이 건의한 지 11년 후


중종임금은 병조에 지시하여 송흠이 건의한 판옥선 제조를 검토하라고 여러 차례 지시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544년 11월에 승하한다. 중종(1488∼1544. 재위 1506∼1544)은 연산군의 폭정에 의해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의 반정(反正)에 의해 추대된 임금이다. 그는 조광조를 등용해 이른바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이상 理想 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훈구파의 반발과 임금도 사림파의 지나친 개혁정치에 염증을 느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신진 사림세력이 숙청되었다. 이후 훈구파와 외척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갈등의 시대에 치세를 한 그는 지금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에 모시어져 있다. (사진 : 중종 능)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은 1545년 7월에 승하한다. 이후 13세의 명종이 즉위하자 중종 비 문정왕후 윤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1545년 을사사화와 1547년 정미사화로 윤원형일파가 득세하는 외척의 시대가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은 사실상 방치상태였고, 을묘왜변이 일어난다.
을묘왜변은 1555년 5월에 왜구가 선박 70여척으로 전라도 남해안을 일시에 침입한 사건이다. 그들은 영암 달량포(達梁浦) 성을 포위하였고 해남 어란도(於蘭島) · 장흥 · 강진 등 일대를 다니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절도사 원적(元積),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전라도 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 왜구를 토벌하였다.
원래 큰 사건이 터지면 대책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조정은 해안 방위에 구멍이 크게 뚫렸으니 왜구의 대규모 침략에 대비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다시 송흠의 상소문을 검토하여 판옥선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555년 9월 명종의 참관아래 망원정 앞의 한강변에서 시험 운행이 이루어진다.
판옥선은 만들어진지 37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수군이 23전 23승을 한 것도 판옥선과 화포 덕분이다. 그러면 판옥선의 구조와 성능, 그리고 장 · 단점에 대하여 알아보자.
판옥선 板屋船은 전투함으로 일명 판옥전선이라고도 한다. 종래의 맹선은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평선(平船)인 데 반하여, 판옥선은 가목 위에 깔아 놓은 배 안의 갑판과 상장 위에 깔아 놓은 상장 갑판을 가진 2층 구조로 된 전투함이다. 그러므로 노역을 하는 격군(格軍)들은 아래 위 두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안심하고 노를 젓고, 군사들은 상장갑판 위 넓고 높은 장소에 자리 잡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매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태운 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수용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속력이 느리다는 점만 제외하면 선체가 경고하고 커서 적이 기어 올라와 백병전을 할 수 없고, 인원과 화포를 많이 적제하고 있어 강력한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며 화포를 구사하기 때문에 여타의 군선보다 강력한 화력과 명중률이 우수한 장점을 지닌 군선이었다.
그러나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것이 단점이었다. 또한 화포 요원이 죽고 다치는 전투적 결함이 발생하였다. 이를 보완키 위해 거북선이 출현케 된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하고 단점을 보완키 위해 선형이 변화된 군선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거북선을 전투에 투입한 후 거북선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계속 지자포, 현자포를
쏘고 뒤이어 포환과 활, 돌을 비와 우박이 퍼붓듯 하니 적의 사기가 이미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 바쁘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거북선 때문이라는 것과 거북선이 철갑선 내지 잠수함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서 거북선이 잠수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상당수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다. 거북선이 일류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점에 주저함이 없다. 거북선이 철갑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기록은 <이충무공 전서>이다. "신은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을 걱정하여 기존의 군선과는 다른 모양의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두 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 대포 구멍이 두개...." 위 기록에서 거북선등에 쇠못을 꽂았다. 판자 덮개에 거북무늬를 그렸다는 것이 거북선의 철갑 주장의 유일한 사료이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는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거북선에 관한 모든 사료에는 판에 송곳칼을 꽂았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철판위에 송곳칼을 꽂은 것이 아니라 판자위에 송곳칼을 꽂은 기록을 가지고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주장하기는 너무 무리이다.

더구나 철갑선이라면 철로 만든 배라는 의미인데 16세기에 철선을 바다에 띄운다는 것은 아무리 조선의 조선술이 발달하였다 하더라도 지나친 주장이다. 철이 물에 뜨려면 고도의 과학기술이 발달하여야 한다. 왜 이런 오해가 있었을까. 거북선에 놀란 왜적들은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오해하였고,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별로 검증도 없이 일본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거북선은 다만 적이 배에 기어오를 수 없도록 갑판에 송곳칼을 설치한 배이다. 그리고 선체는 판옥선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그러면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끈 배는 어느 배인가? 바로 주력 전함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조선의 일본 해군 및 왜구에 대한 전술 개념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선의 전통적인 사격술을 발전시킨 포격전을 위한 해상 포대로서 또한 왜적의 장기인 백병전을 방지하기 위한 높고 장대한 보루로서 설계된 판옥선은 조선의 일본에 대한 전술 사상을 완벽하게 실현한 조선 최초의 전함으로 임진왜란 때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사진 2장 , 해남의 우수영에 있는 판옥선, 서울 광화문 지하 충무공이야기 사진). 물론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왜적을 혼란시킨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끝으로 송흠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송흠은 1504년부터 1506년까지 3년간 보성군수를 하였는데 이 시는 말년에 보성 열선루에서 지은 시이다. 이 시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왜구의 침범에 노심초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양의 열선루에서 차운함


왜적은 웅천으로 은덕을 아예 저버리고 침노하고 있고
대장은 군사를 뱀나루 가에 주둔시켰네.
노심초사하여 몸소 해석하여 보니
임금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일세.

(참고문헌)

o 최영희 지음, 임진왜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o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 미디어, 2004
o 해군 충무공리더십 센터, 충무공 이순신, 2006
o 정판성, 정걸장군 연구, 청학, 2008
o 김동수등 8인, 보성 열선루와 이순신, 전남대학교 역사문화센터/보성문화원, 2005
o 송흠 저 · 이일영 역, 국역 지지당 유고, 효성사, 1992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o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한국사이야기 11,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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