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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5회 송흠, 수군 개혁론을 건의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5회 송흠, 수군 개혁론을 건의하다.

송흠이 올린 상소의 핵심은 중국의 해적과 왜구의 침범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군의 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나라가 개국 이래 150여 년 동안 태평하여 군정(軍政)이 해이하여졌고, 변장이 된 자는 안일에 젖어 있음을 비판하고 변장들이 여러 번 중국 배한테 욕보았어도 속수무책임을 한탄하면서 왜구의 침략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리하여 송흠은 수군개혁론을 펴는 데 첫째 중국의 당선 唐船처럼 판옥선을 제조할 것, 둘째 무기와 화포 등을 개량할 것, 셋째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수군을 정예화 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면 송흠이 상소한 시기인 1544년 조선의 해상 방위 상황을 살펴보자. 이 시기는 중국의 해적들이 수시로 해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 큰 사건은 1544년(중종39년) 4월에 사량진 왜변 蛇梁鎭倭變이 일어난 것이다. 왜구는 20여 척의 왜선으로 경상도 통영의 사량진을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수군 1명을 죽이고 10여 명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1510년에 일어난 삼포왜란과는 아주 다르지만 대 일본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였다. 이 왜변으로 인해 일본과의 외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당시 조정은 일본과 절교를 하고 있는 상태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살펴보자. 조선은 1392년 건국 직후부터 명나라와는 사대외교를 펴왔으나 일본에 대하여는 강경과 유화 정책을 번갈가면서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였다. 고려 말 부터 왜구는 조선의 포구를 수시로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태조 이성계도 1380년에 전라도 지리산 근처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쳤고, 이런 공적 등으로 전라도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조선 초에도 왜구의 침범이 근절되지 않자 마침내 세종1년(1419년)에 세종임금은 이종무에게 대마도 정벌을 하도록 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후 조선은 1426년부터 부산포(동래), 제포(웅천) 염포(울산)등 삼포를 개항하여 일본의 왕래와 교역을 허용하였다. 이어서 1443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서 도항중인 대마도주에게 모든 도항자를 규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줌으로서 체계적인 통제와 함께 비교적 유연한 허용이 이루어졌다.

삼포의 개항으로 왜구의 침입은 크게 감소되었지만 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크게 증가하여 조선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였다. 중종 시절에 들어와서 왜인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왜인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삼포왜란 三浦倭亂을 일으켰다. 1510년 4월, 제포에 거주하고 있는 왜인들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명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하여 첨사 이우증을 살해하였다. 또, 제포를 공격 첨사 김세균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절도사(前節度使) 황형(黃衡)과 전방어사(前防禦使)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 ·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마도주의 아들 소는 피살되고 삼포 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기었다. 그리고 이 상태는 1512년 임신약조가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신약조 이후 왜구의 침략은 한때 잠잠하였으나 다시 1522년과 1523년에는 전라도와 황해도에 침범을 하는등 간헐적인 침범이 있었다. 그리고 1544년에 사량진 왜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왜군들의 침범에 대한 조선 수군은 방위체계는 어떠하였을까. 먼저 조선의 군선을 알아보자. 조선 초기의 군선은 맹선 猛船이었다. 맹선은 평시에는 조운(漕運)선으로, 전시에는 군선으로 이용되는 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선(大船)·중대선(中大船)·중선(中船)·쾌선(快船)·맹선(孟船)·별선(別船)·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 추왜별선(追倭別船) 등 여러 종류의 군선들이 증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군선이 일정한 규격 없이 건조되어 군선으로서 쓸모가 없었으므로 1461년(세조 7) 10월 신숙주(申叔舟)가 각지의 군선을 개량하여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1465년에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된 것이 맹선의 전신이다.
병조선은 세조대에 개발되어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하여 대 · 중· 소 맹선으로 개명되어 그 뒤 1세기 동안 조운과 전공(戰攻)에 겸하여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맹선에 대한 제반 규제는 수군(水軍)의 군비감축이라는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국대전≫의 군선 및 선군(船軍)의 수를 비교해 보면, 군선이 829척에서 739척으로 줄었고, 선군이 5만 177인에서 4만 8800인으로 감축되었다. 더욱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조선 829척 중 무군선(無軍船)이 57척뿐인데 ≪경국대전≫에는 737척의 군선 중 249척의 무군선이 기록되어 있어 세조 때 오히려 군용선의 감축이 있고 조운의 사용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맹선은 군선으로서는 너무 둔중하여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성종 때에 거론되었고, 중종 때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삼포왜란 ·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면서 군선으로서의 역할에 대하여 의구심이 더 많아졌다. 실제 전투에 배치된 맹선들은 해상에서 왜구를 만나면 속도가 느리고 기동이 둔하여 맹선에 비하여 선체가 작고 날렵한 왜구의 배를 따라잡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 수군들은 왜구의 배를 나포하기 위해 왜군선과 크기가 유사한 ‘비거도선’이라는 소형 경쾌선을 군선으로 활용하였다. ‘비거도선’이란 당시 어로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소형 선박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군선이 소형 경쾌선으로 선형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1510년에 삼포왜란이 발생했다. 그런데 삼포왜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형 경쾌선으로의 선형변화가 해양방위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다시 지적되었다.



"소형선이 비록 속력이 빨라 왜선을 추격할 수는 있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부적합했습니다. 그것은 군졸과 병기를 많이 승선시키지 못하여, 적선을 추적했으나 적들이 칼을 들고 돌격해 오면 용감한 우리 병사라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제 대선으로 대처하면 선체가 높아 적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고 화포를 쏘면 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소형 경쾌선이 해전에 부적합하다고 지적된 것은 군졸과 무기를 충분히 적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형 경쾌선으로 왜구의 배를 추격했지만 백병전에 능한 왜구들이 쉽게 우리 군선으로 돌격하여 오히려 역으로 제압당했다는 것이다. 또한 삼포왜란은 대규모 왜인들의 침탈 행위로서 종전 소규모의 왜구 침탈과는 그 성격이 다른 준 準 국제전이었다. 전쟁에 준한 대규모의 침략에서는 소형 경쾌선이 조선수군의 군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제기한 사람이 서후이고 송흠이다. 서후는 1521년에 경쾌속선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대함을 만들 것을 건의한다. 그는 군기(軍器)에 큰 관심을 나타내어 100근이나 되는 강노(强弩 : 여러 개의 화살을 연달아 쏠 수 있도록 만든 큰 활)를 만들어 중종에게 바치기도 하였고 120근의 궁노(弓弩 : 큰 활)를 제작하기도 하는 등 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신이다.


중종 16년 신사(1521,정덕 16) 5월7일 (무오)

조강에 나아가다. 참찬관 서후가 역승의 일과 전함에 관한 일로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서후(徐厚)가 아뢰기를, “신이 선위사(宣慰使)로 경상도(慶尙道)에 왕래하였는데, strtolower('<')중략> 또 남방(南方)의 전함(戰艦)은 옛날부터 두어 오는 것인데, 지금은 대맹선(大猛船)을 쓸데없다 하여 다 버리고 소선(小船)만 쓰고 있습니다. 소선이 다른 배를 쫓기에는 빠르지만 육박하여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며, 또 전사(戰士)를 많이 태우지 못하고 적군이 기어오르기도 쉽습니다. 만일 한 적(賊)이 칼을 빼어들고 돌입하면 맹사(猛士)가 많더라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대함(大艦)은 높고 가팔라서 기어오르기는 어렵게 되었고 내려다보며 제어(制御)하기에는 편리합니다. 이것이 모두 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함에 관한 일은 병조에 묻겠거니와 역승의 일은 전에 이미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게 하였다. 대저 역승은 원래 찰방만 못한 것이다. 그러나 《대전(大典)》의 법을 경솔하게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1544년에 송흠도 전선개혁안을 낸다. 이 안은 판옥선 출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보다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저 당선 唐船이라고 하는 것은 사면이 판으로 옥을 만들었고, 그 안이 넓어서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고, 항해와 전투에 필요한 기구와 무기를 싣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적이 없어 해전을 하면 모두 승리합니다. 우리나라 군선은 이것과 달리 연변(沿邊)의 요해지(要害地)에 전함을 갖춘 것이 별로 없고, 비록 공선과 사선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선체가 협소하고 사면이 트여서 적의 공격을 막아줄 방패막이가 없습니다. 또 화포는 오래되고 화약의 힘은 효력이 없으므로, 저 중국 사람의 화포에 비하면 참으로 아이들 장난입니다. 그 밖의 기계도 다 잔폐(殘弊)하여 연마되지 않았으니, 적을 만나 반드시 지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 따라서 군선을 당선과 같이 판옥선으로 만들도록 하십시오."

송흠은 군선이 갖추어야 할 요소 중의 하나인 인원과 무기를 충분히 적재하면서, 전투 시 아군의 피해를 감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즉 당선 唐船이라고 지칭되는 명나라의 군선처럼 우리도 판옥선을 만들어 해양방위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