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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3회 광주 풍영정에서, 송흠의 차운시를 찾아보았지만...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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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광주 풍영정에서, 송흠의 차운시를 찾아보았지만...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는 7월 중순에 송씨 문중 분들과 함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을 찾았다. 송흠 선생이 보성군수로 근무한 시절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보성 동헌과 객관 그리고 열선루를 답사하고, 화순군 능주면 사무소 바로 옆에 있는 봉서루를 구경한 다음 풍영정을 들렸다. 특별히 풍영정을 찾은 이유는 <국역 지지당 유고>에서 송흠 선생이 돌아가신 해인 89세에 지은 차풍영정운을 보았기 때문이다.

풍영정은 영산강 상류 극락강과 선창산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중흥파크 맨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정자 들어가는 입구에 풍영정 안내판이 있다.


풍영정 風詠亭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호
소재지 광산구 신창동

조선 중기에 김언거(金彦琚 : 1503-1584)가 세운 정자이다.
‘풍영 風詠’이라는 이름은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김언거의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 (漆溪)이다. 1531년(중종 26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물러나 이곳에서 여러 문인 · 학자들과 어울리며 생활하였다.


정자 안에는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쓴 ‘제일호산 第一湖山’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송순 · 이황 · 김인후 · 기대승 · 고경명 · 이덕형 등 많은 문인들의 시가 현판에 남아 있다.


먼저 김언거(金彦琚)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언거는 자는 계진(季珍), 호는 풍영(豊咏) 또는 칠계(漆溪)이고 1531년(중종 26)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벼슬은 중종과 명종 대에 금산군수(錦山郡守), 사헌부장령, 헌납(獻納), 연안부사(延安府使), 홍문관교리, 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지은 정자의 이름 ‘풍영 風詠’은 <논어> 선진 편에서 증점이 공자에게 한 말인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를 읊조리고 돌아오겠다.”의 ’바람을 쐬다‘의 풍風과 ‘노래를 부르다.’의 영 詠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면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 전말을 살펴보자.

자로 · 증석 · 염유 ·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을 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의식하지 말고 얘기해 보아라.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만일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로가 불쑥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제후의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군대의 침략을 당하고 거기에 기근까지 이어진다 하더라도,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대략 3년 만에 백성들을 용감하게 하고 또한 살아갈 방향을 알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미소 지으셨다.

“구(염유)야, 너는 어찌하겠느냐?”
염유가 대답하였다. “사방 60-70리 혹은 50-60리의 땅을 제가 다스린다면, 대략 3년 만에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예법이나 음악과 같은 것에 관해서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


“적(공서화)아, 너는 어찌하겠느냐?” 공서화가 대답하였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배우고자 합니다. 종묘에서 제사 지내는 일이나 혹은 제후들이 천자를 알현할 때, 검은 예복과 예관을 갖추고 잔심부름이나 해보고 싶습니다.”

“점(증석)아, 너는 어찌 하겠느냐?”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뎅그렁하며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서서 대답하였다. “세 사람이 이야기 한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또한 각기 자기의 뜻을 말 한 것이다.” 증석이 말하였다. “늦은 봄에 봄옷을 지어 입은 뒤, 어른 5-6명, 어린아이 6-7명과 함께 기수 (기수 沂水는 노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강 이름이다 -필자 주) 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 (무우 舞雩는 하늘에 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 필자 주)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욕호기 浴乎沂하고, 풍호무우 風乎舞雩하며, 영이귀 詠而歸 하리이다.)”

공자께서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 는 점(증석)과 함께 하련다.”

<논어> ‘선진 편’ 제25장에서

증점은 공자의 제자로서 <대학>과 <효경>을 지은 증자(증삼)의 아버지이다. 증자는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로 공자의 문하생이며 〈대학〉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학>에서 유가의 덕목인 충(忠)과 서(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를 재확립하는 데 힘썼다.

김언거도 공자나 증점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나 보다. 그러니 정자 이름도 풍영정으로 지었으리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정자로 올라갔다. 풍영정은 현판이 두 개가 있고 <제일호산 第一湖山 >이라는 한석봉의 글씨가 걸려 있다. 둘러보니 수십 개의 편액에 이름 있는 문인들의 시가 적혀 있다. 석천 임억령과 하서 김인후(1510-1560), 퇴계 이황의 풍영정 10영 시, 주세붕(1495-1554)과 이황의 풍영정시, 면앙 송순과 규암 송인수(1499-1547)의 시. 제봉 고경명,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동악 이안눌과 석주 권필, 우산 안방준, 반계 유형원, 고봉 기대승, 고용후, 정홍명의 시 등 이름만 들어도 당시에 쟁쟁한 인물들의 시가 걸려 있다.

정자 마루위에 걸려 있는 편액들을 감상하면서 김언거의 풍영정 원운이 있는 편액을 찾았다. 그런데 어디엔가 있기는 있을 것인데 이 편액이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초서체 비슷한 글씨로 쓰여 진 편액이 여러 개이어서 찾지 못하나 보다. 사실 정자 답사를 하면서 초서체로 쓴 글씨는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한시들이 한글로 번역이 안 되어 있으면 아무리 한문을 잘 아는 고수라도 일단 헤맬 수밖에 없다.

아무튼 가장 먼저 김언거가 지은 풍영정 원운부터 감상하여 보자. 이 시는 광주직할시가 1992년에 발간한 광주의 <누정제영>에서 찾은 것이다.


풍영정 원운

주인 김언거 主人 金彦琚


벼슬길에 있으면서 전혀 쉬지를 못했는데
잠시 높은 각에 오르니 모든 근심이 줄어드네.
노를 젓는 사공의 외로운 얼굴, 달빛에 비추이고
물을 찾는 기러기 떼 소리, 바람에 차갑구나.

㬱緩年來未得休 체완연래미득휴
暫登高閣一刪愁 잠등고각일산수
月邊孤影人移棹 월변고영인이도
風外寒聲鴈下洲 풍외한성안하주

이름 있는 이 지역이 한 없이 화려하니
지나가는 길손들이 찾아와서 머무르네.
난간에 기대 앉아 여러 노선비들의 시편을 바라보니
칠수나산이 만추를 감싸네.


爲是名區開壯麗 위시명구개장려
仍敎行客故淹留 잉교행객고엄류
憑看諸老詩篇在 빙간제노시편재
漆水羅山護萬秋 칠수나산호만추


시는 칠언 율시이다. 압운은 첫 수는 휴 休 · 수 愁 · 주洲 , 둘째 수는 류 留 추秋 이다. 운은 매우 중요하다. 이 운을 따라 다른 문인들이 차운 시를 쓰게 되니까.

한편 정자 마루 중간에서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규암 송인수(1499-1547)의 차운 시를 찾았다. 이 시는 면앙 송순의 시와 함께 편액 되어 있다. 이 시는 아마 송인수가 1543년- 1544년에 전라관찰사를 한 시절에 이곳에 와서 지은 것 같다.

풍영정 운

모든 일을 쉬면서 반일동안 노는데
천애의 춘색을 바라보니 근심이 더 깊어지네.
산으로 둘러싸인 원근은 도화동 桃花洞 이고,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은 동서로 갈리었네.

半日偸間萬事休 반일투간만사휴
天涯春色逈添愁 천애춘색형첨수
山圍遠近桃花洞 산위원근도화동
水散東西杜若洲 수산동서두약주
부모 곁을 오래 비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어려우니
아름다운 임천 속에 어찌 오래 머무를꼬.
흰 머리 나는 이 사람, 전원으로 돌아감이 늦어지니
장한이 타던 외로운 배는 가을까지 기다려 주지 않네.

侍從久虛難浪迹 시종구허난낭적
林泉雖美莫淹留 임천수미막엄류
白頭如我歸田晩 백두여아귀전만
張翰孤舟不待秋 장한고주불대추


마지막 시 구절에 나오는 장한 張翰은 중국 진나라 때 사람으로 가을바람이 불면 언제나 고향인 송강 松江의 농어를 생각하여 일부러 배를 타고 귀향하였다 한다. 규암도 그러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지지당 송흠의 시가 적혀 있는 편액은 찾을 수가 없다. 샅샅이 둘러보아도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화순 봉서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편액은 후손들이 신경을 써서 관계되는 문중에 이해를 구해야 걸리는 것이다. 아무튼 송흠 선생의 한시 편액이 안 걸려 있어 너무 아쉽다.

<국역 지지당 유고>에는 이 시는 송흠 선생이 89세에 지었다고 적혀 있다. 송흠 선생은 89세인, 1547년 11월15일에 별세하였으니 이 시는 바로 돌아가신 해에 지은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만큼 의미가 깊다.

차 풍영정 운

송흠 89세(1547년)에 지음


도연명처럼 옷소매 떨치며 이곳에서 편히 쉬니
미로임을 깨달아서 세상 근심 피했도다.
오늘날 다행히도 어진 성대 聖代를 만났으니
기꺼이 유도 儒道를 붙잡아서 창주 (송나라의 주자)처럼 밝혔도다.

陶公拂袖感行休 도공불유감행휴
應悟迷塗欲避愁 응오미도욕피수
何幸方今逢聖代 하행방금봉성대
肯將吾道付滄洲 긍장오도부창주


모름지기 뜻 밝히고 풍영 風詠 까지 겸하여 읊조리니
늙음을 마음에 맡기며 머무르고 떠남이 마음대로 로다.
규암공의 소녀 운을 따라 이 시구를 읊게 되니
그대 마음 한구석에 겉과 속이 다른 춘추가 있을 까 두렵구려.


要須言志兼風詠 요수언지겸풍영
且莫委心任去留 차막위심임거류
追和圭菴小女韻 추화규암소녀운
恐君皮裡有春秋 공군피리유츈추


맨 마지막 구절의 피리춘추 皮裡春秋는 겉과 속에 춘추(공자가 편찬한 역사 책)가 있다는 말인데, 지지당 선생이 왜 이 구절을 썼는지 한참 생각을 해보아야 알 일이다.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 지를 생각한 것일까?

이 시를 읽어 보니 송흠 선생이 세상을 달관한 느낌이 든다.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이다. 뜻을 밝혀서 관직에 나가고 선비로서의 도리를 다 하였고 늘그막에 낙향하여 풍영까지 즐기고 있으니 이제 더 이상을 무엇을 바랄까.


(참고문헌)
o 광주직할시, 누정제영, 88 풍영정, 1992, 태양사
o 송흠 지음 , 이일영 번역, 국역 지지당 유고,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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