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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1회 장성 기영정에서 (3) - 전라감사 송인수, 송흠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21회 장성 기영정에서 (3) - 전라감사 송인수, 송흠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다

여기에서 송인수가 기영정 잔치에서 지은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하여 보자.

원운 元韻

감사 송인수, 시 諡 문정, 호 號 규암

호해의 영검은 우리의 영공이 있게 하였고
일생을 빙벽 氷壁같이 살아 청고함 닦았다네.
주상의 성은이 겹침에 포상이 연달았고
부모를 모시고자 하는 효심이 깊어서
여러 번 외직을 청하였네.

湖海維靈有我侯 호해유령유아후
一生氷壁苦淸修 일생빙벽고청수
主恩稠疊連褒賞 주은조첩연포상
孝意純深數乞州 효의순심수걸주

지지당 송흠을 한껏 칭송하는 시이다. 일생을 빙벽같이 청렴하게 지냈고, 중종임금이 성은이 지극하여 낙향하였어도 우찬성을 제수하기도 하였고, 다시 사직하고 돌아간 후에도 숭정대부로 숭품을 하고 판중추부사(종1품)에 임명하고, 잔치를 열어 주라고 특명을 내리기도 하였고, 101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여러 번 외직을 청한 효심은 널리 모범이 되었다.

서가에는 이 · 삼천권의 책만이 가득 꽂혀있고
연세는 높아서 지금 86세 춘추라네.
기영정 위에서 좋은 잔치 佳會를 벌였으니
단청에 옮기어 살면서 만년을 머무르리.

架揷二三千卷帙 가삽이삼천권질
年高八十六春秋 연고팔십육춘추
耆英亭上成佳會 기영정상성가회
移入丹靑萬世留 이입단청만세류

두 번째 시에서는 송흠 선생이 나이 들어서도 책을 읽는 열정을 높이 사면서, 기영정에서 벌인 잔치를 기록하고 마지막에는 더 오래 사시라는 기원을 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송인수에 대하여 알아보자.

송인수(宋麟壽 : 1499년(연산군 5)∼1547년(명종 2))는 청주 출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菴)이다. 김안국으로부터 공부를 배웠는데, 15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1525년 박사 · 수찬을 거쳐 정언 · 부응교를 지냈다. 1533년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송인수는 장령 掌令으로서 김안로를 강력히 탄핵하였기에 배척을 당하여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그는 제주에서 수토병 水土病에 걸려 사임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김안로의 파당들이 죄를 얽어서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사천 泗川으로 유배를 보냈다. 1537년에 김안로가 몰락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1538년 예조참의 겸 성균관대사성으로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2년 10월 이조참판이 된지 4개월 만에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3년 2월, 그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고, 소학을 장려하고 〈사서삼경〉을 간행하는 등 유학을 진흥시켜 인재 양성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관찰사가 너무 급하게 서둔다고 충고하였다. 규암은 옛적에 송의 유학자 정호 程顥가 주장한, ‘근본 문제부터 착수해야 된다.’는 것과 장재 張載가 말한, ‘남의 비난과 비웃음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들을 인용하여 대답하기를, “옳다고 생각하면 단연코 실천해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산림에 묻혀 있는 학자들을 찾아가서 예우를 하고, 함께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1544년 3월 송인수는 중종의 어명을 받들어 원로대신 송흠을 위하여 기영정 耆英亭 정자를 짓고 잔치를 베풀었다. 기영정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한편 송인수는 전라관찰사로 있으면서 무장현감 유희춘, 남평현감 백인걸과 마음이 맞아서 자주 어울렸다. 그는 부안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그녀와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데리고 다닐 뿐이었다. 송인수가 조정으로 발령이 나자 두 현감과 그 기생이 여산 礪山에서 전송을 하게 되었다. 허균의 <성옹지소록>에 전해지는 일화를 읽어보자.


“내가 이 기생이 영리한 것을 사랑하여 1년 동안이나 한 자리에서 지내면서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죽을까 염려 되어서였네.”라고 규암이 말하자, 기생은 곧 앞산에 있는 많은 무덤을 가리키면서, “과연 그렇습니다. 저기 보이는 여러 무덤들이 다 나의 서방이었습니다.”하였다. 이는 공을 원망해서 한 말이었으므로 모두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뒤에 그 기생은 늘 공을 칭찬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1544년 9월 그는 형조참판으로 다시 조정에서 근무하였다. 이어서 동지사가 되어 중국 북경에 갔다. 그를 따라간 사람들은 물건을 사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규암의 숙소는 쓸쓸하고 사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한 조각의 얼음과 옥’이라 했다. 청렴하기가 빙옥 氷玉 같았다.


1544년 11월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을 시켰다. 이는 계비인 문정왕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대사헌 송인수는 보름이 넘도록 윤원형을 탄핵하여 결국 가선대부의 직위를 빼앗아버렸다.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근심하며 그 탄핵을 멈추고자 하나, 규암은 듣지 않았다. 송인수의 매부 성제원이 나섰다. 송인수는 성세원을 존경하여 그가 말하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제원은 송인수와 같이 잠을 자면서 너무 고집 피울 필요가 없다는 뜻을 넌지시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규암은 거짓으로 자는 체하고 응답조차 아니 하였다. 송인수는 평소에 자기 마음을 비우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는데, 이 일에는 황소고집이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한성부좌윤에서 파직당하고, 청주 시골로 돌아갔다. 퇴계 이황이 규암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규암이여, 옛날 풍진에 묻혀 있을 적에도
소쇄함이 세속 사람 같지 않더니
이제 청주로 돌아가 농사짓기를 배운다 하니
청주에 풍년 들어 고야산(<장자>에 나오는 선경 仙境)처럼 풍성하리라


圭庵昔在風塵中 瀟灑不作風塵客
今歸淸州學耕稼 淸城穀熟如姑射


1547년 9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송인수에게 사약이 내려 졌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 기술>에는 송인수의 사약 받은 장면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글은 <해동잡록>에도 있다.



그가 사약 받은 날은 마침 공의 생일이었으므로 일가친척과 제자들이 많이 모였다. 이날 집안사람들은 조정의 명을 모르고 있었는데, 사당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므로 이상히 여겨 문을 열고 보았더니, 공의 아버지의 신주가 신주 상에서 창 밑까지 굴러 내려와서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괴로워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사약을 받게 되자 온 집안이 크게 울부짖는데도 공은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고 꿇어앉아 임금의 명을 받았다. 목욕하고 의관을 정돈하는 동작도 평소와 같았다. 스스로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무엇 때문에 내가 죽는지 모르겠다.” 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더니, 큰 글씨로 쓰기를, “천지신명은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하고, 그것을 아들에게 주면서, “내가 화를 입었다고 기죽지 말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주색을 조심하여 지하의 혼을 위로하여다오. 장례는 검소하게 지내되 예법을 어기지 말라. 부끄러움을 가지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만 못하니라.” 하고, 종제 기수에게 전해 주라는 편지에, “자식 하나를 그대에게 부탁하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글씨가 힘이 있어 펄펄한 생기가 풍겼다. 이어 조용히 죽었는데, 이날 밤 흰 기운이 무지개처럼 지붕을 뚫고 하늘까지 뻗치어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1547년 9월19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송인수의 졸기가 실려 있다.


전 참판 송인수를 청주에서 죽였다. 송인수의 자는 미수 眉叟이고 은진인恩津人이며, 청주의 마암에 우거하였었다. 기질이 청명하고 덕성이 순수하며 독실히 배워 힘써 실천하였다. 중종 때에 간신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아 멀리 사천현으로 귀양 가서 4년 동안 있으면서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였다. 김안로가 처벌되고서 조정에 들어왔는데 미처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금상 今上 초기에 또 다시 이기 · 윤원형 등에게 무함을 당하여 마침내 참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애통한 일이다.


그는 장가들던 날 저녁에도 불을 밝혀 놓고 글을 읽어 사람들이 “글에 미쳤다.” 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하니 사람들이 그의 강한 의지에 감복하였다. 그런 그가 외척들의 농간에 사약을 받았으니 천지신명도 참 무심하다.




한편 송인수의 송흠에 대한 기로 잔치는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1544년 3월22일 중종실록에도 송인수가 영광군에 순찰 가서 잔치를 베푼 기록이 있다. 이 잔치가 1543년 7월에 있었던 잔치인 것 같지는 않다. 시차가 8개월 이상 되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102권, 39년(1544년) 3월 22일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영광군에 순찰 나가, 판중추(判中樞) 송흠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은 논한다. 송흠은 이 고을 사람이고 정자는 곧 송인수가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이어받아 세운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어 영광스럽게 해 준 것이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榮達)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었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觀水亭)이란 편액(扁額)를 걸고 날마다 한가로이 만족하게 지내기를 일삼았으므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존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집에 있을 적이면 종일토록 의관(衣冠)을 반듯하게 하고 조금도 몸을 기울이지 않고서 오직 서책(書冊)만을 대하였고, 고을 안의 후진(後進)을 접할 때에는 비록 나이가 젊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당(堂)에서 내려가 예절을 다했었다. 그의 어머니도 가법(家法)이 또한 엄격하여 감히 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나이가 1백 살이었다. 송흠 또한 90이 가까운데도 기력(氣力)이 오히려 정정하였다. 특별히 조정에서 숭품(崇品)을 총애하는 은전을 입게 되었으므로 논하는 사람들이 인자한 덕의 효과라고 했었다. 도내(道內)에서 재상(宰相)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朴守良)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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