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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9회 장성 기영정에서(1) - 전라감사 송인수, 송흠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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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장성 기영정에서(1) - 전라감사 송인수, 송흠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다


7월의 주말에 기영정을 간다. 기영정은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 있다. 정자를 들어가는 입구에는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정취를 돋우고 있다. 우선에 안내판을 먼저 본다.

기영정 (耆英亭)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에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규암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 송흠을 위하여 관수정 건너편에 지은 정자이다. 병자호란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철종 7년(1856)에 송인수의 10대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하여 고쳐지었다.

건물은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바닥에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사방을 낮은 평난간을 돌렸는데, 땅의 위치가 높아 누마루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기영정은 용암천 위의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보니 기영정 정면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관수정이 보인다. 기영정 위에는 상당히 넓은 땅이 있고, 아래는 개울이 흐른다. 이름하여 용암천. 기영정은 현판이 두 개이다. 하나는 송인수의 후손인 송겸수가 쓴 기영정 글씨이고 다른 하나는 신석희가 쓴 현판이다.

정자 마루에는 편액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송인수와 송흠의 기영정 시 등이 있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기영정 중수기이다. 편액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고 한글 해설이 없어 알기가 힘들다. 먼저 기영정 시가 적혀 있는 편액을 별로 능통하지 못한 한자 실력으로 띄엄띄엄 읽어본다. 거기에는 맨 오른편에 ‘기영정 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가정 계묘 9월초라는 글씨가 있으며 ‘천고 호남’으로 시작하여 ‘만불류’로 마무리하면서 지지당이라는 글씨가 있다. 그 다음에는 경제 敬題 원운 元韻 이라고 적혀 있고 ‘호해유령’에서 시작하여 ‘만세류’로 한시가 끝나고, 그 다음에 감사 송인수, 시 諡 문충, 호 규암이라고 적혀 있다. 그 다음에는 참판 김우급이 기영정에 와서 느낀 소회를 적은 시이다.

<국역 지지당 유고> 책에서 송흠의 기영정 시를 찾았다. 그랬더니 기영정 연시기 宴時記(책 P122-129)가 있다. 기영정 잔치 때의 글을 송흠이 지은 것이다. 1543년 계묘년 9월 1일에 썼고 뒷부분에 송흠의 기영정 시와 송인수의 원운 시가 붙어 있다. 기영정 편액의 시와 대조하여 보니 그대로 일치한다.

그러면 송흠이 지은 기영정 잔치 글을 읽어 보자.


기영정 연시기 宴時記


내 나이 85세로 노병이 번갈아 침노하여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 지난 7월 7일 정사에서 임금의 특지로 숭정대부에 특진되었다. 또 26일 정사에는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황공하고 감격하여 보답할 길이 없었다. 그때에는 감사 송인수가 어진 정사를 행하는 데 더욱 노인 봉양을 잘 하였다.

1543년 7월 4일자 중종실록을 보면 중종임금은 여든이 넘은 송흠에게 품계를 한 단계 올려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숭정대부가 된 것이다. 숭정대부는 조선시대 종일품(從一品)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중종 38년(1543년) 7월 4일

승정원에 기구(耆舊)를 장려하도록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서는 기구(耆舊)20490)를 존중하고 장려해야 옳다. 더구나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기로(耆老)를 무시하고 염치가 아주 없으니, 장려하는 뜻을 보여야 마땅하다.

관안(官案)20491) 을 살펴보면, 윤금손(尹金孫)은 정2품이 된 지 이제 38년이나 되었으니, 현용(顯用)은 없었더라도 이는 노성(老成)한 사람이 다. 조윤손(曺閏孫)은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변방(邊方)의 일에 익 숙한데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것은 온편하지 못하다.

송흠(宋欽)은 청렴·개결한 것으로 칭찬받으며 지위가 정2품에 있다. 윤 금손 · 송흠은 나이가 다 여든이 넘었으니, 숭품(崇品)20492) 에 올려야 마땅하다. 조윤손은 서용하여 비변사(備邊司)의 당상(堂上)을 삼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후략)

[註 20490]기구(耆舊) : 나이가 많고 오래 벼슬한 사람. ☞
[註 20491]관안(官案) : 관원의 성명·내력 등을 모아 적어 둔 문서. ☞
[註 20492]숭품(崇品) : 1품의 별칭. ☞

한편 판중추부사는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둔 종일품(從一品) 관직인 판사(判事)로 정원은 2명이다. 위로 영사(領事: 正一品) 1명이 있고, 아래로 지사(知事: 正二品) 6명,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8명 등이 있었다. 중추부는 조선시대 정일품아문(正一品衙門)으로 관장하는 일정한 직무는 없고, 소임(所任)이 없는 문무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의미로 만들어진 관청이다.

이어서 송흠의 잔치 글을 계속 읽어 보자.

이에 내가 특별히 임금의 은총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고 또 나에게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라는 중종임금의 명을 기쁘게 여겨 잔치를 베풀어 축하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주목사와 본 고을(영광군) 수령으로 하여금 삼계로 가서 잔치할 터를 가려 집을 짓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개인 집이나 공관은 협소하여 큰 잔치를 벌이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두 고을의 관원에게 터를 보게 하였는데 일시에 달려와 관수정의 남쪽에 잔치할 만한 장소를 택하였다.

산과 골짜기는 휘돌고 지세는 평탄하고 넓어서 위에는 수 백 명이 앉을 만하고 아래로 내려다보면 맑은 물을 당겨 손으로 움킬만 하니 참으로 승경이라 하겠다.

정자를 낙성하니 감사가 27일 진원 珍原 으로부터 곧바로 관수정에 도착하여 나와 서로 만났다. 이튿날 나를 새 정자로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인근 고을의 수령 10명이 또한 참석하였다. 나주목사 조희가 예를 관장하였는데 성대한 의용과 풍부한 음식은 예전에도 없었던 일이다.

기영정은 전라감사 송인수가 특별히 송흠에게 잔치를 베풀기 위하여 특별히 지은 정자이다. 9순을 바라보는 노인을 위한 연회장을 지은 것이다. 이 정자는 나부목사와 영광군수가 책임을 맡았고, 연회는 전라감사는 물로 인근 열개 고을의 수령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나주목사 조희가 사회를 본 것으로 적혀 있다.

조희(曺禧 1490년∼1564년)는 전남 담양(潭陽) 출신으로 1513년(중종 8)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517년(중종 12) 정축(丁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온성판관(隱城判官)·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병조정랑(兵曹正郞)·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나주목사(羅州牧使) · 통례원좌통례 (通禮院左通禮)를 역임한 후 동래부사(東萊府使)까지 올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 찾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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