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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5회 다시 관수정에서(8)- 노극창, 유부, 정순명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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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다시 관수정에서(8)- 노극창, 유부, 정순명

6월 하순에 다시 관수정을 찾았다. 정자에 있는 편액을 다시 살펴본다. 그리고 아직까지 해설을 하지 못한 관수정 차운 시 들을 한글로 번역하고 시를 쓴 인물 내역을 알아본다. 송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알아보는 작업들은 16세기 호남 선비들의 인맥과 학맥을 탐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먼저 담양부사 노극창의 차운시부터 읽어본다. 노극창(盧克昌: 1482∼1568)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영경(榮卿)이고 호는 송계(松溪)이며 호군(護軍) 노상지(盧尙枝)의 아들이다. 1490년(성종 21)에 아버지 노상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 우치(牛峙)에서 함평군 나산(羅山)으로 옮겨 산 것으로 전해진다. 문헌이 드물어 노상지와 노극창의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시조의 사적(事蹟) 등을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실제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松岩里)와 죽암리에 마을이 형성되어있고 그 후손들이 노극창을 시조로, 함평을 본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같이 교유한 인물로는 지지당 송흠, 모재 김안국 · 하서 김인후· 규암 송인수 등이 있다.
그는 1514년(중종 9) 별시에 급제하였고, 성균관사성 · 남원부사 ·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敬 次

深秋爽氣襲人寒 심추상기습인한
撥刺游鱗拂玉欄 발자유린불옥란
己見里門通德榜 기견리문통덕방
還隨別業富春灘 환수별업부춘탄


삼가 운에 맞춰 씀

늦가을 시원한 기운에 차가움이 엄습하고
발랄한 고기떼 옥난간에 부딪히네.
일찍이 이문 里門에서 통덕 급제 방 及第榜을 보았는데
도리어 별장의 부춘탄을 찾아왔네.

여기에서 통덕은 통덕랑의 준말로서 정오품 문관을 가리킨다.
별업 別業 부춘탄 富春灘은 중국 섬서성 항주 근처에 있는 부춘강의 여울이다. 중국 항주관광 안내도를 보면 항주는 절강성의 성도 省都로 중국 7대고도중의 하나로 근처에 서호와 부춘강, 청산호등이 있다. 이 부춘강에는 바로 엄자릉이 머물렀다는 여울 엄릉뢰가 있고, 엄자릉이 낚시 하던 곳인 엄자릉 조대가 있다. 이 곳 부춘강-신안강- 천도호는 이색적인 관광지로서 병풍같은 산과 맑은 강물이 절경이다.
그러면 엄자릉에 대하여 알아보자. 엄자릉의 이름은 엄광(嚴光:기원전3년∼서기43년)으로서 자(字)가 자릉(子陵)인데 보통 엄자릉(嚴子陵) 또는 줄여서 엄릉(嚴陵)이라고 부른다. 그는 어릴 적에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 4 ~AD 57)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 9~25 )나라를 제압하고 서기 25년에 황제가 되자 엄릉은 모습을 감췄다. 광무제는 황실 유(劉)씨 가문의 일원으로, 한조의 창시자인 고조(高祖:BC 206~195 재위)의 후예로 추정된다. 22년 왕망의 급진적인 개혁조치로 신나라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게 되자, 그는 곧 군대를 일으켰고 강력한 유씨 문중과 다른 부유한 호족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23년에 왕망을 격파했다. 2년 뒤에 수도를 중국 동부에 있는 자신의 고향 낙양으로 옮기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했다. 동한이라는 이름은 이같이 수도를 동쪽으로 천도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조관희 엮음,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2003년 참조)

광무제가 사람을 시켜 엄릉을 찾아보게 했더니 “양가죽 옷을 입고 못에서 낚시하고 있다(披羊裘, 釣澤中)”고 하였다. 그런데 광무제는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는 예전 친구사이처럼 대했고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 그의 무례함을 들어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광무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광무제와 함께 밤새 얘기를 나누다 임금의 침상에서 함께 잠이 들었는데 예전의 버릇대로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잤다. 태사 太史가 글을 올려 ‘객성(客星)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주 빠릅니다.(客星犯坐甚急)’고 하니, 광무제 유수가 “짐의 친구 엄광과 함께 누웠을 뿐이라네.(朕故人嚴光共臥耳)”라고 논란을 잠재웠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벼슬을 내리자 엄광은 벼슬을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엄광이 은둔한 곳의 지명(地名)을 엄릉산(嚴陵山) 또는 엄릉뢰(嚴陵瀨)라 하며, 낚시질하던 곳을 엄릉조대(嚴陵釣臺)라 부르기도 한다.

엄자릉은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여 고기나 낚는 고아한 풍모와 빛나는 절개의 상징인물로 중국 역대 문인이나 은자의 찬양을 받았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독작청계강(獨酌淸溪江)>이란 시를 써서 엄릉을 흠모하였다.


나는 술 한통을 가지고,
홀로 강조석(江祖石)에 올랐네.
천지가 열려서부터,
몇 천개의 바위가 다시 생겨났네.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웃으니,
하늘은 햇살을 서쪽으로 비쳐주는구나.
(나는) 이 조어대(釣魚臺)에 올라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엄릉(嚴陵)은 낚시를 오랫동안 드리웠네.
산중인에게 말을 건네면
당신도 함께 어울릴 수 있을 것인데.


我携一樽酒,
獨上江祖石.
自從天地開,
更長幾千石,
擧杯向天笑,
天回日西照.
永望坐此臺,
長垂嚴陵釣.
寄語山中人,
可與爾同調.


노극창의 차운 시를 보면 노극창은 송흠을 엄릉과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말년에 개울에서 은거하면서 고기를 낚고 세월을 낚는 현인으로. 그리고 보니 이전의 여러 시인의 시에서도 엄릉, 부춘탄, 엄릉뢰가 나왔는데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인가 보다.

그러면 제2수를 살펴보자.

歸來自足風雩詠 귀래자족풍우영
逝者應爲智者觀 서자응위지자관
自足高標淸配水 자족고표청배수
澹然相對照心肝 담연상대조심간


潭陽府使
盧克昌

다시 돌아와 풍우를 읊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가는 자는 마땅히 지자 智者를 보아야 하네.
자족하면서 고고하게 맑은 물과 짝하였으니
평안하고 자연스럽게 마주하며 폐와 간을 비춰보네.

담양부사
노극창


다음은 류부의 차운시이다.



敬 次

惱殺世間熱幾寒 뇌살세간열기한
歸來北秩好憑欄 귀래북질호빙란
跡高上下嚴陵瀨 적고상하엄능뢰
名重低昻居易灘 명중저앙거역탄


괴로운 세간에 그 열기를 얼마 식혔나
대궐로 돌아와 난간 위에 좋이 비겼네.
높다란 자취를 오르내림 엄릉뢰 嚴陵瀨인가
무거운 명성 名聲을 저앙 低昻함에 낙천개울이라.

여기에도 엄릉뢰가 나온다. 엄릉의 개울이 또 등장한다.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힌 선비, 맑은 물을 바라보면서 관조를 하는 선비의 대명사가 송흠이다. 이렇듯 당대의 시인들은 송흠을 엄릉에 비교하고 있다.


鏡面精神魚共樂 경면정신어공락
金波形影月同觀 금파형영월동관
主人心德淸如水 주인심덕청여수
自有貪夫洗鼠肝 자유탐부세서간

領府事
柳溥


거울에 비치는 물속은 깨끗하여 고기가 즐기고
금물결 파도에 비치는 그림자 달과 함께 구경하도다.
주인의 심덕은 물과 같이 깨끗하오니
저절로 여기에 욕심장이의 마음을 씻으리.

영부사 유부
류부 ( ? -1544)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 유순정의 조카이다. 1501년에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강원도 도사를 하였고, 이어서 홍문관 응교등을 거치었다. 1527년에 도승지에 오른 뒤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고 1533년에 호조판서를 , 1537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1539년에 70세로 궤장을 하사받았고 영중추부사등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대사성 정순명의 차운시이다. 대사성이란 직함은 성균관을 총괄하는 자리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이다.

敬 次

蕭酒幽亭近水寒 소주이정근수한
常看碧色射危欄 상간벽색사위란
橫吹雪沫風搖浪 횡취설말풍요랑
亂碎金鱗日照灘 난쇄금린일조탄

삼가 운에 맞춰 씀

말쑥하고 그윽한 정자는 물가에 가까워 시원하고
언제나 푸른빛은 위태로운 난간에 비추이네.
눈발은 휘날리고 바람은 물결을 뒤흔들고
물고기 어지럽게 뛰놀고 햇빛은 여울을 비춰주네.

宮徵每從空裏聽 궁징매종공리청
鳶魚時向靜中觀 연어시향정중관
悠然自愛淸如許 유연자애청여허
長得披襟更滌肝 장득피금갱척간

大司成 鄭順明

풍악은 언제나 공중을 쫒아서 들려오고
때때로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일 조용한 가운데 바라보네.
유연히 자애 自愛함은 맑음을 허락하니
다시금 옷깃을 헤치고 마음을 씻으리라.

대사성 정순명

그런데 <국역 지지당유고>에는 서봉익이 이 시를 삭제하려고 하였으나 명재 윤증 선생이 이르기를, “을사사화(1545년) 이전에는 그의 악독한 성품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때이니 어찌 이 시를 혐의하겠는 가 ” 하기에 그만 그대로 두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정순명(1484-1548)에 대하여 알아보니 그는 윤원형, 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키어 많은 선비들을 사약 또는 유배 보낸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는 1587년에 관직과 훈작이 모두 삭탈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면 정순명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정순명은 150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림과 교유하였다. 그는 조광조 · 박상 · 김정등과 사귀었고, 1519년 좌부승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관직이 삭탈되었다. 김안로 일당이 제거되어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이 모두 풀러나자 아울러 등용되었다. 1539년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고, 1542년에 형조판서, 1544년에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다시 명종이 즉위하자 그는 득세를 하였고 을사사화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후에 수모를 당한다. 참,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를 절제하지 않으면 역사에 수모를 당할 수도 있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송흠은 멈출 줄 아는 선비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