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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4회 송흠, 능성 봉서루에서 시를 읊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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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송흠, 능성 봉서루에서 시를 읊다.

송흠의 <지지당 유고>에는 ‘능성 봉서루 차운시’가 수록되어 있다.
먼저 이 시를 읽어 보자

능성의 봉서루에 차운함
次題綾城鳳栖樓

명승지를 찾아서 반나절 한가히 보내노니
나른히 노니는 곳마다 얼굴 빛 부드럽네.
국화 꽃 탁주에 가을의 흥취가 무르녹고
가랑비 비껴가는 바람(사풍 斜風)에 해질 녘 추위가 엄습하네.

勝地聊偸半日閑 승지료투반일한
倦遊隨處可怡顔 권유수처가이안
黃花白酒濃秋興 황화백주농추흥
細雨斜風作暮寒 세우사풍작모한


주렴을 걷으니 동남의 산이 비단 같고
달 솟아오르는 누각엔 길손이 난간에 비껴있네.
사군 使君은 진중히 반가운 눈초리 보내는데
마음 속 품은 뜻 어찌해 관대하질 못하는가.

簾捲東南山似錦 염권동남산사금
月出樓閣客憑欄 월출누각객빙란
使君珍重開靑眼 사군진중개청안
懷抱何爲不自寬 회포하위불자관

이 시는 송흠이 능성 봉서루를 올라간 후에 지은 시 같은데 (1) 그 원운 시는 누가 지은 것인지, (2) 송흠의 차운 시는 언제 지은 것인지 (3) 그리고 지금도 능성 봉서루가 있는지가 궁금하다.

3월에 무등산 보호협의회 회원들과 같이 화순 영벽정을 답사하였다. 그곳에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시를 보았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조선 사림의 조종이 된 인물이다. 그는 문장· 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최부, 남효온, 조위 등 신진 사림들을 양성하였다. 그런데 그가 지은 조의제문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사초에 실려 문제가 되자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한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이 한시는 김종직이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능주 봉서루에서 지은 시이다. 김종직은 1487년 5월부터 1488년 5월까지 1년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바 있다.

능성현의 봉서루에 올랐는데, 공무에 바쁜 중이라서 달이 동쪽 봉우리에 올라서야 비로소 오늘이 중추임을 깨닫고, 이 도사승복· 최동년 철석과 함께 간단하게 술을 마시다 (점필재집 권21권에 있음)

[登綾城鳳棲樓倥傯中月上東峯始悟今日爲中秋與李都事承福崔同年哲錫小飮]


연주산 위의 달은 쟁반같이 둥그런데 連珠山上月如盤
초목엔 바람 없고 이슬 기운만 차갑구나. 草樹無風露氣寒
천 뭉치 솜 같은 구름은 다 걷히려 하고 千陣瑞雲渾欲盡
한 무더기 공문서는 의당 볼 필요 없네. 一堆鈴牒不須看


시절은 다시 아름다운 중추임을 알겠는데 年華更覺中秋勝
길손의 회포 누가 이 밤에 위로될 줄 알았으랴 客況誰知此夜寬
나그네 갈 길은 또 서해를 따라 갈 것인데 旌旆又遵西海轉
손가락 끝으로 둥근 게蟹 배꼽이나 쪼개리라. 指尖將擘蟹臍團


동행한 조선대학교 이종범 교수는 이 시가 전임 전라도 관찰사 성임(成任 : 1421-1484)을 은근히 비판하는 시라고 한다. 성임은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능성 봉서루에 올라서 시를 한 수 지었다.

필자는 인터넷으로 봉서루를 검색하였다. 그랬더니 화순군 능주면 사무소 근처에 봉서루가 있다. 5월 하순에 능주면 사무소를 방문하였다. 봉서루는 면사무소 동편에 있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봉서루가 객관 동쪽에 있다고 적혀 있듯이. 봉서루 근처에는 고목이 몇 그루 있어 과거의 역사를 더듬기에 충분하다.

봉서루 마루를 오르니 거기에는 성임의 원운 시와 함께 정창손, 양팽손의 차운시 등이 걸려 있다.

성임의 원운 시를 읽어 보자 (속동문선 권7에 있음)

능성봉서루 (綾城鳳棲樓)

날마다 달려 잠시도 한가하지 못한데 日日驅馳不暫閑
누각에 오르니 다시 한 번 근심스런 얼굴 풀리네. 登臨聊復解愁顔
마을이 바다에 가까우니 봄이 항상 빨리 오고 閭閻近海春常早
송죽이 처마에 닿으니 여름에도 춥네. 松竹當簷夏亦寒


발을 걷으니 산빛이 그림기둥에 스며들고 簾捲山光侵畫棟
해가 비끼니 꽃 그림자는 새긴 난간에 올라오네. 日斜花影上雕欄
나그네 되어 한없이 고향 생각하는 마음 客中無限思鄕意
글귀를 가지고 가까스로 스스로를 위로하네. 憑仗詩篇强自寬


운은 1수의 안 顔과 한 寒 그리고 2수의 란欄 과 관 寬이다.

성임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그는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세조를 도와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세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는데 1464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서 민정과 군정을 다스리며 사냥을 즐기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66년 11월에는 형조판서에 올라 사법행정에 힘썼고,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82년 좌참찬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 지중추부사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식견이 풍부하며 글씨와 시문이 뛰어났다.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해서·행서를 특히 잘 썼으며, 글씨로는 〈원각사비 圓覺寺碑〉등이 있고, 경복궁 전문(殿門)의 편액과 왕실의 사경(寫經) 등 국가적 서사(書寫)를 많이 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율시에 일가를 이루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성임을 검색하여 보니 성임은 1464년 2월 전라도 관찰사로 일하다가 1464년 12월 5일 형조참판으로 제수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0개월 재임기간이었다. 그리고 사헌부로부터 탄핵 받은 기록도 있다.


세조 10년(1464년) 9월 20일

사헌부가 수령들을 거느리고 함부로 사냥한 홍달손과 성임의 치죄를 청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홍달손이 처음에 목욕하면서 병을 치료한다고 핑계하고 알현(謁見)하여 고(告)한 다음에 돌아가서는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느리고 범람(泛濫)하게 횡행(橫行)하였으며, 관찰사 성임도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공돈(供頓)하게 하고, 또 군사를 징발하여 짐승을 사냥하게 하였으니, 아울러 부당합니다. 청컨대 성임을 잡아서 추국(推鞫)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서루는 봉황이 깃드는 누각이란 의미인데 이 누각은 능주현 내아 터 안에 있다. 그리고 보니 송흠도 153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한바 있으니 능성을 순시하였을 것이고 봉서루에 올라 성임과 김종직의 시를 보고 차운 시를 한수 지었으리라.

아쉽게도 현재의 봉서루에는 김종직과 송흠의 시가 걸려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봉서루에 이 두 사람의 시를 걸어 둔다면 더욱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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