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조회수 : 2782
제목 제11회 관수정에서(7) - 박우와 박상 그리고 김인후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11회 관수정에서(7) - 박우와 박상 그리고 김인후 이미지 1제11회 관수정에서(7) - 박우와 박상 그리고 김인후 이미지 2
제11회 관수정에서(7) - 박우와 박상 그리고 김인후


관수정 현판이 붙어 있는 곳 한 곳에는 박우의 차운 시가 붙어 있다. 이 시를 읽어 보자.

敬 次

山含雲影入廉寒 산함운영입염한
無限淸陰月與欄 무한청음월여란
風約浪花猶近檻 풍약랑화유근함
日斜沙鳥共眠灘 일사사조공면탄

渚烟活水眞堪畵 저연활수진감화
茶譜方書又喜觀 다보방서우희관
謝病解官幽賞地 사병해관유상지
題詩暫借雪塵肝 제시잠차설진간

吏曹參議 이조 참의
六峯 朴祐 육봉 박우

삼가 운에 맞춰 씀

온 산은 구름 덥히고 발에 들어 차가운데
한없이 맑은 그늘과 밝은 달은 정자에 기대었네.
바람은 물결과 함께 난간가에 불어오고
햇살은 갈매기와 여울 가에 잠들었네.

물 연기와 솟구친 물, 참으로 그림같고
차 끓일 비방책을 또 즐거이 보는구나.
몸이 아프다고 핑계대고 벼슬살이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사니
시 지어 잠시나마 하얀 눈에 티끌마음 씻어보리.

이조참의
육봉 박우

박우(1476-1546)는 광주 출신으로 부친이 박지흥이고 형은 눌재 박상(1474-1530)이며 아들은 선조시절에 정승을 14년이나 한 사암 박순(1523-1589)이다. 박우는 15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개성유수 등을 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8-1618)이 지은 <성옹지소록>에는 호남 출신 인재의 선두에 박상, 박우 형제 이름 이름이 나온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눌재 박상과 육봉 박우 형제, 사인 舍人 최산두ㆍ미암 유희춘과 유성춘 형제, 교리 양팽손ㆍ제학 나세찬ㆍ목사 임형수ㆍ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ㆍ삼재 三宰 송순ㆍ찬성贊成 오겸 같은 사람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사암 박순, 일재 이항,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ㆍ제봉 고경명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에서 박우의 형 눌재 박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박상은 송흠과 상당히 친하였던 모양이다. <지지당 유고>와 <눌재집>을 보면 박상은 임신년 (1512년) 봄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가서 어버이를 뵈었다. 다시 상경하는 길에 당시 여산군수인 송흠 선생이 술자리를 베풀어 한 잔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때 박상이 쓴 제세심정 題洗心亭 시가 <지지당 유고>에 전하여진다.

이 시를 읽어 보자.

題洗心亭 제세심정

漫山雨意未全消 만산우의미전소
滿壑晴雲漲似潮 만학청운창사조
一樹梨花簷外朶 일수이화첨외타
數行楊柳檻前梢 수행양류함전초

어지러운 산에 비 올 느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산골짜기에 가득한 구름은 조수처럼 넘치네.
한 그루 배꽃은 처마 밖에 탐스럽게 늘어져 피었고
두세 줄 늘어진 수양버들은 난간 앞에 처졌네.

시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배꽃이 시에 언급 되는 것을 보니 봄임을 알 수 있다.

客浮大白窮投轄 객부대백궁투할
君酌貪泉笑盡瓢 군작탐천소진표
南國百年同出處 남국백년동출처
濁河齊力瀉阿膠 탁하제력사아교


손님은 날이 새도록 술에 취하였고
그대는 술 같이 마시다가 표주박이 바닥나매 웃었지
평생 동안 호남 땅에서 출처를 함께 하였고
흐린 물에는 온 힘을 같이 해 아교가 흐르게 했네.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의 세심정은 여산 동헌 근처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여산동헌은 전북 익산시 여산면 사무소 바로 앞에 남아있으나 세심정은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시는 박상이 1512년에 여산군수 송흠을 만나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송흠이 여산군수를 한 것은 1515년이다.

1515년 2월 16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당시에 송흠이 여산군수, 박상이 담양부사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2월 16일(갑진) 2번 째 기사

예조 판서 김전 등을 청백리로 뽑아 향표리를 내리다

전교하였다.

“청백 탁이(淸白卓異)한, 예조 판서 김전 · 도승지 손중돈(孫仲暾)· 좌부승지 조원기(趙元紀) · 승문원 판교 강숙돌(姜叔突)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충청도 절도사 김연수(金延壽)에게는 당표리(唐表裏 : 중국산 안팎 옷감.)를 하사하며,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여산군수(礪山郡守) 송흠(宋欽)에게는 각각 향표리(鄕表裏 : 국산 안팎 옷감)를 하사하라.”

(후략)


흥미로운 것은 <지지당 유고>에는 송흠이 여산군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박상이 지은 7언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선생과 소자는 서로 도의를 따랐는데
두 임지에서 영고 榮枯 (영화로움과 수척함)가 너무나 달라졌네.
남국(전라도)에서 일생을 같이 보낸 신세
가을바람에 태수는 홀로 네거리 활보하네.

대궐의 은명 恩命은 원래가 명군이요.
백발의 단심 丹心은 진실로 노유 老儒일세.
내 자신 부재 不才라, 일어날 기약이 없어
낚시 배는 제멋대로 서호 西湖에 떠 있구려.


이 시를 읽어 보면 송흠과 박상은 호남 유학의 대표임을 알 수 있고 박상은 지금 귀양살이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서호에 떠 있는 낚시 배 신세처럼.

그러면 박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박상은 호남 유학의 종조 宗祖로 알려져 있고 비분강개의 절의파 선비이다. 그는 1474년 5월 18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지흥은 원래 충청도에서 살았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인 광주 방하동에 와서 살았다. 박상은 28세인 1501년에 정신문과에 급제하여 30세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박상은 1505년에 전라도 도사로 근무하게 된다. 이 때 나주에 연산군의 애첩인 딸의 권세를 믿고 남의 전답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우부리란 자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다스리려하지 않았다. 권력 앞에서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박상은 분노하였다. 그는 나주 금성관에서 우부리를 매질하였다. 그런데 너무 심하여 목숨까지 빼앗고 말았다. 중종반정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박상은 화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다행히도 박상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내려오던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려 목숨을 구한다, 야사에는 박상이 정읍을 지나 10리 쯤 가는 데 고양이 한 마리가 묘한 흉내를 하면서 큰 길을 피해 샛길로 들어가자 이상하여 따라가서 화를 면한 것이란다.

한편 담양군수 박상은 1515년 8월에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폐위된 중종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순창군 강천사 삼인대에서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신수근은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박원종 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 까 보아 신씨를 7일 만에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1515년 3월초에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후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박상등은 신비 복위소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조강지처를 폐위시킨 박원종등의 행위는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므로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515년 8월8일자에 실려 있다.)

조정은 이 상소로 인하여 논쟁에 휩싸였다. 박상과 김정등은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이었으나 여러 대신들의 간언으로 8월24일에 박상은 전라도 남평으로, 김정은 충청도 보은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상소는 사림들의 의리정신을 일깨워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한편 눌재 박상은 정조임금이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시를 잘 썼고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 권14 문장부에도 박상은 뛰어난 시인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제자로 송순, 임억령, 김인후 등 당대의 거출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근세의 시인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 눌재 박상 , 석천 임억령, 금호 임형수,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사암 박순,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등은 남달리 우뚝 뛰어난 사람들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박상이 1530년에 별세하여 1539년에 세워진 관수정에 그의 시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가 만일 살았다면 당연히 관수정에 차운시가 있었으리라.


절제와 겸양의 재상 박순

한편 박우의 아들이 박순이다. 박순(1523-1589)은 절제와 겸양의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나주에서 태어났다. 박순은 화담 서경덕에게 공부를 배웠고 중년에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 31세인 1553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고 3년 후, 밀수품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은 수은어사가 되어 의주에서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밀수품을 압수하였다. 왕족의 부정행위를 파헤친 것이다. 요즘 같으면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기획수사를 한 것이다.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대제학이 된다. 이때 그가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사암능양 思庵能讓이란 글을 쓴다. 사암 思庵(박순의 호)이 겸양에 능하다는 글이다.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그때 대제학 박순이, “신(臣)이 대제학인데 퇴계 선생은 제학이 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서로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 충분히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지금에는 이욕만 챙겨 이런 것을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



이 겸양의 사례는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에도 나온다. 1569년에 경상도 안동 도산으로 물러난 퇴계 이황(1501-1570)은 사암 박순을 칭찬하기를, “화숙 (화숙은 박순의 자)과 마주하고 있으면 한 덩어리 맑은 얼음과 같아 정신이 아주 상쾌하다‘고 하였다. 고봉 기대승 또한 박순을 평하기를 “의리 義理를 분석함이 밝고 또 아주 절실하니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하였다.

박순은 승승장구한다. 1569년에 이조판서가 되고 1572년에 우의정, 그 다음해에 좌의정 그리고 1579년에는 영의정이 된다. 그리고 1586년에 물러날 때 까지 14년간을 내리 정승의 자리에서 일한다. 선조 임금의 신임은 두터웠다. 선조는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와 지조가 있고 물과 달 같은 정신이 있다.”고 두둔하였다.

그러나 1585년 이후 동서분당이 극심하여 지자, 서인인 박순은 탄핵을 받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경기도 영평현, 지금의 포천군의 강가에서 거처하였다.


박순은 문장에도 뛰어 났다. 느낌대로 진솔하게 시를 잘 지었다. 명나라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조선에 올 때 박순은 예조판서로 접빈사가 되었는데, 구희직이 박순의 시를 보고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唐)의 격조이다.” 라고 칭송하였다.

당풍 唐風의 시를 쓴 박순은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등 삼당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시 잘 짓는 부안 기행 매창 梅窓의 연인 유희경도 박순에게 시를 배웠다. 이달은 서얼이요, 유희경은 천민출신인데도 박순은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박순의 시 중에는 면앙정 30영 등 호남의 자연을 읊은 시도 많지만, 유독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 이라는 시이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醉睡仙家覺後疑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白雲平壑月沈時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翛然獨出脩林外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자던 새가 알아듣네. 石逕笻音宿鳥知


참으로 명시이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에 자던 새가 듣더라.’는 시 구절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 朴宿鳥’
‘숙조지 宿鳥知 선생’이었을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일화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박용철 시인 생가 뒤에 송호영당이 있다. 여기에는 사암 박순과 눌재 박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월정서원에는 박순의 신위가 있다. 심의겸, 정철, 김계휘등 서인의 영수들이 같이 배향되어 있다. 사암 박순. 그는 진솔하고 절개 있고 겸양을 갖춘 선비였다.



문장과 도학과 절의의 선비 하서 김인후.

관수정 정자 안 왼편 두 번째에는 하서 김인후 (1510-1560) 편액이 붙어 있다. 이를 읽어 보자.


敬 次


水氣淸冷夏尙寒 수기청냉하상한
主人無事獨憑欄 주인무사독빙란
先登自解臨高岸 선등자해임고안
勇退何難趁急灘 용퇴하난진급탄


孔聖德全山竝樂 공성덕전산병락
蘇仙意達月同觀 소선의달월동관
軒楹洞豁空中客 헌영동활공중객
俗子終湏吐鼠肝 속자종수토서간


弘文 校理 홍문 교리
河西 金麟厚 하서 김인후


삼가 운에 맞춰 씀


물 기운 맑고 맑아 여름에도 차가운데
주인은 홀로 일없이 난간에 기대었네.
먼저 오르면 스스로 높은 줄 알게 되니
물 찾아 물러남이 무엇이 어려우랴.

공자의 완전한 덕인이라 산 아울러 즐기었고
소동파는 달인이라 달과 함께 보았다오.
확 트인 정자가 공중에 솟았으니
속인들이 모름지기 쥐의 간을 토하겠군.

홍문관 교리
하서 김인후

이 시는 도학과 절의와 문장의을 모두 갖춘 선비, 문묘 18현중에 한사람인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쓴 시이다. 하서 김인후. 그는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정월 보름날에 아래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 났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밝은 달은 본래 사심이 없도다.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그는 10세 때 전라감사인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박상과 최산두, 그리고 송순에게도 글을 배웠다. 22살(1531년)에 성균관에 입학한 그는 퇴계 이황과 교분이 두터웠고, 1540년(중종 35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다음해에 호당에 뽑혀 이황, 나세찬, 임형수 등과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의 영광을 누렸다.

하서 김인후는 1543년에 시강원 설서(정7품)가 되어 인종(1515-1545)을 가르치던 스승이었다. 세자 시절 인종은 하서를 극진히 사랑하여 묵죽도를 그려주고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시었다. 인종이 그린 묵죽도는 지금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묵죽도에는 다음과 같은 하서의 시가 적혀 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이리 정미 精微 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정갈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성스런 혼이 조화를 기다리심을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根枝節葉盡精微 근지절엽진정미
石友精神在範圍 석우정신재범위
視覺聖神俟造化 시각성신사조화
一團天地不能違 일단천지불능위


1544년 11월에 중종임금이 승하하고 인종임금이 즉위하였다. 김인후는 인종을 곁에서 모시면서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문정왕후가 임금의 약 처방까지 한다는 데 불안 해 하였다. 또한 임금과 한 궁궐에 있는 것도 미심쩍었다. 그래서 자신이 의원의 처방에 동참하겠다고 하고 임금의 거처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효종임금은 ‘역 逆이지만 충 忠이다’ 라고 하였다. 비록 계모이지만 어마마마인 문정왕후를 의심한 것은 역적질에 해당되지만 임금을 위하여 한 행동은 충절이라는 의미이다.

1545년 7월1일 인종 임금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 한다. 생모 장경왕후를 일주일 만에 여윈 비운의 왕은 서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고 적혀있다. 일종의 독살설이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 김인후는 옥과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36세의 나이에 아예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이후 명종이 벼슬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명종이후의 관작은 기재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한다.


율곡 이이는 하서 김인후를 청수부용 淸水芙蓉의 선비라고 하였다. 장성군 필암서원과 황룡면 맥동마을에는 그에 대한 흔적이 많다. 백화정, 난산, 어사리(인종이 하사한 배의 씨가 자란 배나무), 그리고 묘소에는 도학과 절의와 문장 이야기가 진하게 남아 있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