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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0회 관수정에서 (6) 호남의 선비들 - 임억령, 나세찬, 오겸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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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관수정에서 (6) 호남의 선비들 - 임억령, 나세찬, 오겸

호남 한시의 종주 宗主, 임억령

송흠의 관수정 원운 바로 맞은편 대들보에는 석천 임억령의 차운시 편액이 있다. 이 시를 한번 읽어 보자



敬次 二首


제1수

百年荒僻野亭寒 백년황벽야정한
春水如今上石欄 춘수여금상석란
朝作名臣居相府 조작명신거상부
暮爲漁父釣沙灘 모위어부조사탄


平生食檗眞堪法 평생식벽진감법
餘事能詩亦可觀 여사능기역가관
我本年來慵病甚 아본년래용병심
欲䏂夫子滌塵肝 욕수부자척진간


제2수

霜髥雪鬢照人寒 상염설빈조인한
徙倚晴川夕照欄 사의청천석조란
吟罷閑雲生遠峀 음파한운생원수
睡甘疎雨響高灘 수감소우향고탄

迷塗那似回車返 미도나사회차반
當局何如袖手觀 당국하여수수관
野蔌山薇今政軟 야속산미금정연
村盤肯歎食無肝 촌반긍탄식무간


弘文典翰 홍문 전한
石川 林億齡 석천 임억령



삼가 운에 맞춰 2수 씀

제1수

백년간 두메의 정자는 시원한데
봄물은 여전히 돌 난간에 흐르도다.
조정에는 명신으로 의정부에서 일하였고
늘그막에는 어부로 여울에서 낚시했네.

평생을 깨끗이 하여 법도를 지키었고
여가에 시 읊은 일 역시 볼만하였네.
나 또한 근래에 게으름이 심하오매
송흠 선생을 좇아서 티끌 마음 씻어내리.


제2수

눈처럼 흰 수염 흰머리 비추어보니 너무 쓸쓸하고
맑은 냇가 거니니 저녁 노을어린 난간이라.
시 읊기를 마치자 먼 산 위에 구름 일고
단잠에 외로운 빗소리 여울에 울리도다.

미로에 수레를 돌이키어 되돌리듯
당면한 국면에 어찌하여 수수방관하리.
들나물 산 고비 그야말로 부드러워
촌 밥상을 즐기나 먹을 마음은 아직 없네.


홍문관 전한
석천 임억령



그러면 임억령 (林億齡 : 1496-1568)에 대하여 알아보자. 임억령은 시문에 뛰어난 호남의 사종 詞宗으로 불리는데 해남 동문 밖 해리에서 태어났다. 석천 石川이란 호도 그가 태어난 마을의 개울 이름이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이름 중에 마지막 글자 령은 문중의 항렬이고, 가운데 글자는 대망을 의미하는 숫자인 천, 만, 억, 백, 구를 얹어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라 하였다. 셋째인 억령은 부친을 여윈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눌재 박상(1474-1530)의 제자가 된다. 이 때 동생 임백령도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박상은 억령에게는 장자를 읽으라고 하면서 ‘너는 문장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백령에게는 논어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족히 나랏일을 담당할 것’이라 하였다. 어릴 적에 석천은 벼슬에 별 뜻이 없었다. 30살이 된 1525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세자 시강원 설서등을 를 지냈다.

그의 동생 임백령( ? -1546)은 15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이조 참판, 호조판서 등을 거쳐 을사사화 당시에는 이조판서 이었다. 그는 2001년-2002년에 방영된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 기생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사랑싸움을 벌인 사람이기도 하다. 야사에 의하면 임백령은 윤임이 그의 정인 情人 옥매향을 소실로 삼은 것에 분노를 느껴 을사사화 때 윤임에게 복수를 했다 한다.


임억령은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 일파의 오른팔인 동생 임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好在漢江水
安流莫起波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 나온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준다. 괜스레 외척들이 붕당이나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이후 임억령은 동생 백령의 추천에 의해 원종 原從 공신의 녹권 錄卷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산골 외진 곳에 가서 제문을 짓고 녹권을 불사르며 시를 읊었다.


대나무가 늙었으니 베어 쓰이는 것 피하였고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
누가 송죽과 같이 지조를 같이 할꼬
깊은 골짜기에 머리 흰 늙은이로다


竹老元逃削 松高不受封
何人與同調 窮谷白頭翁


이 시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지조를 위해 형제간의 우애도 끊고자 하는 석천 임억령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1545년 11월 7일의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산군수 임억령이 신병으로 사직원을 내니 윤허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 이 실록에 사관 史官은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쾌히 멀리 떠나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니 그의 동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고 평하고 있다.


그러면 출세한 임백령은 어떠했을까. 우의정으로 승진한 임백령은 1546년 6월에 사은사로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병으로 죽는다.

한편 전라도로 낙향한 임억령은 해남, 창평, 강진에 별장을 두고 자연 강산을 즐기며 산수 유람을 한다. 또한 스승인 눌재 박상의 유고문집도 발간한다. 이 무렵 동생 구령은 광주목사였다.

몇 년 후에 그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1554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된다. 이 때 금강산과 관동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수의 시를 짓는다. <송계만록>에는 그가 꿈에 지은 관동팔경 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임억령은 꿈에 시 한 연구 聯句를 얻었다.

바람은 마른 잎 나부끼어 강 언덕에 지고 風飄枯葉江干墮
구름은 먼 산 안고 바다 위에 솟아난다. 雲抱遙岑海上生


그 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삼척 죽서루 竹西樓에 올라보니,
보이는 것이 과연 꿈에 본 것과 같았다.

그가 담양부사를 한 것은 그의 나이 62세인 1557년이다. 3년 후인 1560년에, 그는 담양부사 직을 사직하고 담양 성산 星山 아래 식영정 息影亭 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 이 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다. 특히 석천과 하서, 고봉과 송천을 성산 사선 四仙이라 하였고,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식영정 사선이라 하였다.

식영정 사선들은 자주 만나 풍류를 즐기면서 식영정 20영을 지었다. <식영정 20영>은 식영정과 성산 근처의 이름난 20가지 풍광을 시로 쓴 것이다. 그것은 서석한운 瑞石閑雲, 창계백파 蒼溪白波, 벽오양월 碧梧凉月, 조대쌍송 釣臺雙松, 환벽영추, 노자암 鰲伸巖, 자미탄 紫薇灘, 도화경 桃花徑, 부용당 芙蓉塘, 선유동 仙遊洞등으로서 임억령이 먼저 시를 짓고 김성원, 정철, 고경명이 차운하였다.

그러면 석천과 송강이 쓴 벽오양월이라는 시를 감상하여 보자. 벽오양월은 벽오동 나무에 비치는 서늘한 달이라는 뜻인데 먼저 석천의 시이다.


가을 산이 시원한 달을 토해 내어
한 밤중에 뜰에 서 있는 벽오동나무에 걸렸네.
봉황은 어느 때에나 오려는가.
나는 지금 천명이 다해가는데.

秋山吐凉月 中夜掛庭梧
鳳鳥何時至 吾今命矣夫

다음은 송강 정철의 차운시이다.


선생의 마음은 봉황을 품었는데
달은 벽오동나무 가지 끝에 걸렸구나.
백발이 가을 거울 속에 가득하니
쇠잔한 얼굴은 이제 대장부가 아니구나.

人懷五色羽 月掛一枝梧
白髮滿秋鏡 衰容非壯夫


한편 식영정 마루에는 <식영정기>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도 석천이 지었는데 그의 그림자 쫒기 글은 장자의 기품이 가득하다.


김군 강숙(剛叔: 김성원의 자)은 나의 친구이다. 창계의 위 쪽 우거진 솔숲 아래의 한 기슭을 얻어,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다. (중략) 이 정자를 나에게 휴식할 곳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숙이 정자 이름을 지어 주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장주(莊周 ; 장자의 이름)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장주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달아나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달아나면 천천히 쫓아와서 끝끝내 뒤만 쫓아다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너무나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략)


‘그림자도 쉬고 있는 정자’(식영정)란 이름은 단지 서정적인 뜻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거기에는 은둔과 조화와 순리의 동양사상, 다시 말하면 노자와 장자의 자연론이 담겨 있다.

석천 임억령은 3,000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문의 종주였다. 시 솜씨는 이백을 닮았고 만년에는 두보의 시법을 터득하였으며 문장은 장자의 남화경을 근본으로 하였다. 그는 세속에 얽매임이 없는 도인 道人 이었다.

눈은 도를 사색하느라 감았고
머리는 세속을 싫어해 숙였도다.
스스로 장주 莊周의 학문을 체득하니
영광과 괴로움이 하나로 여겨지네.

석천의 시는 장성의 관수정 이외에도 담양의 식영정, 면앙정, 광주 풍영정등 광주, 담양, 장성 지역 여러 곳에 걸려있다.

그의 신위는 해남 해촌서원과 화순 도원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해촌서원도 그 혼자 배향된 석천사 이었는데 최부, 유희춘, 윤구, 윤선도, 박백응 등 해남 현인들이 추배되어 해촌서원으로 이름 붙여졌다. 그가 화순 도원서원에 배향된 것은 1533년부터 3년간 동복현감으로 근무하면서 신재 최산두와 자주 어울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행동하는 양심 나세찬

한편 관수정의 두 번째 대들보 앞쪽에는 나세찬의 관수정 차운시가 결려있다. 이 시를 읽어 보자

敬 次


參差綠影鏡奩寒 삼차록영경렴한
百面東坡上小欄 백면동파상소란
某壑幾思童子水 모학기사동자수
此亭今作老臣灘 차정금작노신탄


天扶德業能神退 천부덕업능신퇴
地秘淸區盡異觀 지비청구진이관
江海元無廊廟隔 강해원무랑묘격
晴波朗月照忠肝 청파랑월조충간


侍講院輔德 시강원 보덕
松齋 羅世纘 송재 나세찬



길고 짧고 들쑥날쑥한 푸른 그림자 거울처럼 차가운데
백면의 동파(중국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가 작은 난간 위에 올랐네.
골짜기 물을 보며 몇 번이나 놀던 어린 시절 생각하였나.
이제는 이 정자가 이 늙은이의 여울이 되었구나.


하늘이 덕업을 안고 몸은 은퇴를 하고
땅이 감춘 청정한 곳에서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네.
강해 江海(강과 바다)와 낭묘 廊廟(조정을 말함)는 원래 간격이 없으니
맑은 파도, 밝은 해가 내 마음을 비추네.

시강원 보덕
송재 나세찬


그런데 이 시를 자세히 읽어 보니 바로 <학포집>에 나오는 학포 양팽손의 관수정시 제3수와 똑 같다. 이 시는 <지지당 유고>에는 나세찬의 시로 되어 있고, <학포집>에는 양팽손의 시로 되어 있다. 정말 이시가 누가 지은 시인지가 헷갈린다. 하기야 한시 중에는 작자가 바뀐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듣고 있으나 참 희한한 일이다. 아무튼 이 시가 누구의 시인지를 밝히는 일은 국문학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 시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구나 작가가 누구인지를 밝혀야 하는 시 한 수가 관수정 정자에 걸려 있으니 이 또한 이야기 거리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세찬에 대하여 알아보자. 나세찬은 행동하는 양심이다. 중종임금의 총애를 받은 신하이다. 중종임금은 유언으로 나세찬을 혼 내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명종임금 시절 섭정을 한 문정왕후도 나세찬을 유배 보내지는 못하였다.

내 온갖 꽃의 시들어짐을 남모르게 슬퍼하며
조화의 덧없음을 괴로워한다네.
저 분분한 상수리나무는 오래도록 살아가고
오수나무들이 또한 송죽을 어지럽히려 하네.
세한의 절개를 옛말에서 들었으니
군자의 아름다운 기절에 의지하려 함은
어디서 찾을손가, 산모퉁이의 휘휘한 곳에서
앙상히 말라서 홀로 서 있음을 놀라와 함이로다.
어이타 만물 중에 무거운 영기조차
헛되어 수많은 나무들 속에서 시달리는가.

(중략)


아, 천지간에 분수를 지킴이 제일이니
영화롭고 쇠잔함도 모두 분수 밖의 일이로다.
궁한들 무엇이 슬프며
영달한 듯 어찌 기뻐만 하랴.
잣나무는 병으로 여기지 않으나
내 홀로 너를 슬퍼하노라.
잣나무여, 잣나무여
만물 가운데 어찌 홀로 이와 같은가.
살고 죽는 일 비록 자신에게 있다고 하나
내 누구를 믿으리오, 오 천지의 신명이시어.

1522년 어느 날 , 25세의 나세찬은 부친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장문의 부 賦를 짓는다. 부친은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하다가 영월로 귀양을 간 후 한 많은 세상과 이별을 한다. 3년간 시묘살이를 한 그는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는 부 賦, 이름 하여 애병백부 哀病柏賦를 짓는다.

잣나무는 <논어>에 나오는 나무이다. 논어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말이 있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다. 그 절개와 지조는 곧 선비의 덕목중 하나이다. 그런데 잣나무가 병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랴. 중종 임금시절인 1519년 기묘사화, 1521년 신사무옥으로 이어지는 사화로 선비들은 실의에 빠지었다. 기를 펴야 할 사림들이 위축되었고 훈구파들의 무모함과 행패가 만연하였다.

송재 나세찬(1498-1551)은 이런 세태를 탄식하고 좌절한 사림들을 병든 잣나무에 비유하여 사회시 社會詩를 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지금은 잣나무가 지천으로 깔린 잡나무들의 시달림을 받아서 병들었지만 그 병이 곧 나아서 다시 푸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세상을 바르게 하고자 출사한다. 1528년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사관이 된다. 임금을 곁에 모시면서 의로운 나라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고심한다.

1534년 10월 중종 임금은 정시 庭試에서 예양 禮讓을 높이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방안을 책문 策問으로 냈다. 나세찬은 책문에 답한다. 그는 예禮의 용用은 조화에 있다고 보아 화 和 글자를 책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조정의 대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나라가 어떻게 잘 다스려질지 걱정 한다. 임금이 만약 바르지 못한 자의 말에 속는다면 조정이 불화하고 공정한 도 道는 싸락눈처럼 흩어지고 사사로운 도는 구름처럼 일어날 것이라며 붕당을 우려한다. 그리고 붕당이 뒷날 분란을 일으킬 불씨가 된다고 하였다.

그의 책문에 대하여 당시 시험관인 김안로 (1481-1537)가 문제를 삼았다.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김안로는 아들 김희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하자 권력을 농단하였다. 그는 훗날 인종이 되는 동궁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켰으며 정광필, 이언적을 귀양 보내고 , 중종 후궁인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을 죽음으로 몰기도 하였다.

중종임금은 처음에는 신하가 책문에 쓴 글을 가지고 문제를 삼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김안로 일파가 거듭 죄줄 것을 아뢰자 집요함에 밀려 공초를 명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편에는 1534년 10월 하순부터 12월7일까지 나세찬에 관한 기록이 57번이나 나온다. 김안로 일파는 송순이 책문의 배후자라고 단정하고 나세찬을 국문하려 한 것이다. 나세찬은 1534년 11월부터 12월까지 40여 일 동안에 여섯 번이나 형신을 당하여 다리가 깨지고 뼈가 부서진다. 그나마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심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어버이의 유체를 버릴 수 없다하여 그 뼈를 주워 주머니에 담으면서 옷을 찢어 임금에게 혈소 血疏를 올렸다. 측은히 여긴 중종이 특별히 용서하여 죽음만은 면하여 주었다. 그리고 경상도 고성固城으로 유배를 보낸다.


감옥에서 나오는 날, 그는 들것에 실려 나오면서 시 한 구를 읊었다. ‘사십일 옥중생활이요. 삼천리 귀양길이로다.’ 부축하던 고향 사람이 그 시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원망이 없는 군자라고 하였다.

유배지에는 먹을 것이 모자라서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으나 그는 염려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성현의 책을 읽었다. 중종 임금은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가 살아가는 것을 알아보게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 임금에게 아뢰길, ‘수중에 중용, 근사록 같은 책들을 놓지 않고 좌우에 충신 忠信 두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유배 중에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정진한 것이다.

한편 당시에 기세등등한 김안로는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까지 몰아내려 하다가 중종의 미움을 샀다. 1537년 10월에 그는 사약을 받았고 나세찬은 즉시 복직되었다.

1537년 10월 27일의 조선왕조실록을 보자. 이 날은 김안로가 사약을 받고 죽은 직후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 나세찬의 대책은 오늘날 보면 실로 정론(正論)이다. 그런데 그때 김안로가 시관(試官)으로서 어전(御前)에서 과차(科次)를 정하였다. 김안로가 그 글을 보고는 ‘논의가 바르지 않다.’ 하여 그것으로 논죄하였다.”


1538년에 나세찬은 봉교로 다음해에는 탁영시에 장원 급제하여 부수찬으로 임명되었고 1541년에는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금호 임형수, 미암 유희춘과 같이 독서당에서 글을 읽었다.

1545년에 그는 대사간이 되었는데 그때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11살에 임금이 된 명종(1534-1567)을 대신하여 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이 시작되고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제거한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을사사화로 피화를 입은 백인걸, 유희춘 , 정황을 구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곧바로 해직이 되었다. 윤원형 일파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는 1546년에 대사헌이 되어서도 이들을 구하려다가 결국 벼슬에서 물러난다.

그나마 큰 화를 입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화를 당하지 않은 것은 “이 사람은 국가의 큰일을 담당할 사람이다.” 라는 중종의 말씀을 받든 문정왕후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 뒤 그는 좌천되어 한성좌윤이 된 후에 문소전에 인종을 모시어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당시에 간흉들이 인종의 재위가 1년도 채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인종의 신위를 문소전에 모실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전주부윤으로 밀려나서 155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소세양, 임억령, 김인후 등이 만사를 지었다.

하서 김인후(1510-1560)의 만시를 보자.

나는 나부자 羅夫子 어른을 사모 했으니
아름다운 덕과 행실 갖춘 인물이었네.
나주에선 뛰어난 재주꾼으로 칭송되었고
호당에선 훌륭한 유풍 남겼도다.
정의는 공훈을 논하는 곳에 나타나 있고
마음은 책문을 드릴 때에 담아 두었구나.
내 평생 부끄러워 무안해 하였더니
이 부음을 듣고 더욱 눈물 적신다.

나주시 문평면 서원마을에 있는 송재사에는 그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송재 나세찬. 그는 절의를 숭상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이다. 바른 말을 하고 세상을 의롭게 하고자 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오겸의 차운 시


한편 대들보 한 쪽에는 담양부사를 역임한 오겸의 차운시가 걸려 있다. 이 시를 읽어 보자


敬 次


亭臨幽磵水光寒 정임유간수광한
爲愛淸澄獨倚欄 위애청징독의란
尙有憂邦文正志 상유우방문정지
初非忘世子陵灘 초비망세자릉탄


期耄壽自閑中得 기모수자한둥득
知足心從靜裏觀 지족심종정리관
千載聞風猶激懦 천재문풍유격나
餘波分與洗塵肝 여파분여세진간

弘文 副應敎 홍문 부응교
吳謙 오겸


삼가 운에 맞춰 씀

시냇가 정자에 물빛이 차갑고
맑은 물 좋아서 홀로 난간에 기대었네.
지금껏 나라를 걱정한 문정공 文正公의 지기 志氣라오
애초에 세상을 등진 자릉의 개울 아니었네.

백세까지 장수하는 것은 한가한 가운데서 얻어지고
만족한 줄 아는 마음 고요히 뚫어보네.
천년 만에 들은 이야기는 나약함을 분발하게 하였고
물결을 나누면서 폐와 간을 씻는다오.

홍문관 부응교
오겸

이 시에서 첫 수 제3구의 “나라를 걱정한 문정공의 지기 志氣라네.”의 문정공은 누구일까? 아마도 문정공 조광조(1482-1519)인 듯싶다. 지치주의를 꿈꾸다가 기묘사화로 화순에 유배를 와서 사약을 마시고 절명한 정암 조광조. 그는 죽음 앞에서 아래 절명시를 쓴다.


愛君如愛夫 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이 절명시는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 愛憂堂에 걸려 있다. 애우당은 절명시 1구 첫 글자인 임금 사랑의 애 愛와 2구 첫 글자인 나라 걱정의 우憂를 딴 강당 이름이다.

그런데 1수 제4구의 자릉탄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 아마 세상을 등지고 낚시를 한 사람이 즐겨하는 개울 같다.


그러면 오겸에 대하여 알아보자. 오겸(吳謙 : 1496-1582)은 153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의령현감으로 나갔다가 예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장령, 집의, 부응교 등을 거쳐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50년에 금양군에 봉해졌고 담양부사 광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 병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59년에 예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이조, 병조판서 등을 하였으며 1564년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후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담양부사 시절에는 송순의 관수정을 중수하도록 지원을 하여 주었으며, 광주목사 시절에는 고봉 기대승과 청련 이후백의 문장 겨루기 내기를 주선하기도 하였다.

유몽인이 쓴 야담 책 <어우야담>과 작자 미상의 책 <기문총화>에는 기대승과 이후백의 문장 겨루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오겸(1496-1582)이 광주목사 시절에 고봉 기대승(1527-1572)과 청련 이후백(1520-1578)을 초대하였다. 오겸은 미리 아전들에게 단단히 분부를 하여 기생들이 화려하게 몸단장을 하고 성대한 잔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마침 엇비슷한 시각에 도착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 오겸이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오늘 두 분을 청한 것은 한 바탕 이야기하면서 회포를 풀고 주량을 겨루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서울에 있을 때 평소부터 두 분이 종장의 유림이라는 것을 널리 알고 있었나이다. 그래서 오늘 두 분의 글재주를 겨루는 시합을 하여, 백년에 한번이나 볼 수 있는 문장 솜씨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오니 두 분께서는 사양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대승은 그 자리에서 나이 어린 기생에게 먹을 갈라 하고는 종이를 펼쳐 7언 율시 8편을 그대로 써 내려갔다. 글자에 점 하나도 고칠 것이 없이 붓을 휘둘렀는데 마치 나비가 나는 듯하였다.

이후백 또한 화전 華牋(종이)을 눈썹만큼이나 쌓아놓고 마음대로 붓을 휘둘러, 교방에 소속된 80여명의 기생들에게 자신이 지은 장편, 단편, 율시, 고시 古詩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골라 가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즐긴 다음에야 잔치가 끝났다.

그 다음날 오겸은 전 날 화려하고 성대하게 차렸던 주안상들을 모두 치우고 별도로 떨어진 서재로 가서 간소하게 술상을 차렸다.
술기운이 약간 오르자 오겸이 다시 청하였다.

“어제는 두 분의 시 겨루기를 잘 보았소이다. 오늘은 천고의 일을 상세히 논하고 평생토록 기억한 것을 각기 말씀하여 주시지요.”

이후백은 <자치통감강목>중에 표 表를 다스리는데 가장 능한지라 겉으로 두드러진 것 이외에 그 밖의 150책 가운데 미세한 장구에 이르기까지 척척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기대승 또한 <자치통감강목> 가운데 이후백이 논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본기와 본전에서 출처를 들어 제시하였다. 여러 학자들의 크고 작은 설명을 훤히 꿰뚫어 해당되는 대목을 만나면 외워내곤 하였는데, 더러는 전편을 더러는 수십 행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글의 뜻을 요약하여 말하는 데 꿰뚫고 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오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하면 말하였다.

“어제의 겨루기에서는 이공 李公이 능히 기공 奇公을 이겼고, 오늘의 겨루기에서는 기공이 능히 이공을 이겼소이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친 모임은 참으로 우리 사림에 전무후무한 멋진 일이었소이다. 동정호에서 듣는 균천광악(천상의 음악)이나 월궁에서 듣는 예상우의곡(당 현종이 들었다는 달나라 월궁의 음악)도 이곳 광주의 잔치 보다는 성대하지 못할 것이외다.”

이후백 李後白은 시 詩의 대가이다. 이름도 당나라 시선 이백(701-762)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후백이요, 호도 이백의 호 청련 淸蓮을 그대로 썼다. 한편 기대승은 문장의 대가이다. 일찍이 주자의 성리학을 독파하여 <주자문록>을 썼고 종계변무주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부탁으로 이황의 부친 묘비명도 지었으니 문장력은 가히 최고이다.

오겸은 한때 담양부사도 하였고 송순이 면앙정을 다시 지을 때 지원을 하여준 바 있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들 호남의 선비 세 사람이 벌인 글 잔치가 야사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멋진 이야기 거리이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