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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9회 관수정에서 (5) 송흠의 제자들 - 송순, 양팽손, 안처함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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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관수정에서 (5) 송흠의 제자들 - 송순, 양팽손, 안처함

<지지당 유고>를 보면 송흠의 문인들은 면앙 송순, 기묘명현 양팽손 그리고 안처함, 장성 사람 김맹석, 영광 출신 송석현 등이다. 송흠은 1492년에 홍문관 정자가 된 이후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날 즈음에는 남원교수로서 근무하였다. <한국인물사연구원 저, 갑자사화, 타오름, 2011>책 (p227)에는 “조선전기 호남지역 사류들의 학맥은 대체로 다섯 사문 師門으로 나뉘는데 주로 16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쳐 김굉필, 최부, 송흠, 박상, 이항과 연결되어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면서 송흠은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영광에서 후진 교육에 진력하여 뛰어난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유현연원도 朝鮮儒賢淵源圖>에는 열아홉 기원 가운데 호남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그가 한 연원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관수정 정자에 차운시가 걸려있는 송흠의 문인은 송순과 양팽손, 그리고 안처함이다. 이들은 모두 차운시 맨 마지막에 문인 門人 아무개라고 적고 있다.

관용의 선비 송순

먼저 면앙 송순( 宋純 : 1493-1582)의 차운 시부터 살펴보자. 송순의 시는 송흠의 관수정 원운시 편액 바로 옆에 있다. 방이 있는 마루 바로 위 편액이다.



삼가 운에 맞춰 씀


화각 畵閣이 영롱하여 푸른 물 굽어보는데
언제나 맑음이 좋아 홀로 난간에 기댄다.
평평한 포구는 조촐한 거울, 가을을 담아 있고
급한 여울 개인 날에 눈을 뿜고 우뢰 소리 울린다.

깨끗한 그 마음 일찍이 서로 맞아
한줄기 깊은 물을 고요히 바라보네.
백년간 수양을 그렇게 하였으니
빙옥의 고결함이 폐와 간을 비추도다.

문인 홍문 응교
면앙 송순

勤 次 근차

畵閣玲瓏俯碧寒 화각령롱부벽한
每憐澄淨獨憑欄 매련징정독빙란
涵秋洗鏡開平鋪 함추세경개평포
噴雪晴雷下急灘 분설청뢰하급탄

皎潔此心曾合契 교결차심증합계
淵源一派也冥觀 연원일파야명관
百年交養知如許 백년교양지여허
氷玉崢嶸照肺肝 빙옥쟁영조패간

門人 弘文 應敎 문인 홍문 응교
俛仰 宋純 면앙 송순

송순은 지지당 송흠의 먼 조카뻘 된다. 송흠은 송순보다 한 항렬 높은 9촌 아저씨이다. 송순은 고조가 노송당 老松堂 송희경으로서 송희경은 조선통신사를 한 사람으로 담양 떡갈비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송순은 1493년에 담양군 기곡면(지금의 봉산면) 기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관향은 신평으로 원래 5대조인 현덕까지는 충청도 신평 · 홍주 · 연산 등지에서 살았는데 고조부 송희경이 아우 구 龜와 함께 전라도로 이사하여 그는 담양에, 아우 구는 영광 삼계에 정착하였다.

송순은 9세 때 곡조문 哭鳥文(새가 죽음을 애도함)이란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송순은 유년기에는 숙부 송흠에게 인격과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21세에 진사가 되어서는 당시 담양부사인 박상(1474-1530)의 문하에 입문하였으며 그 뒤 박상의 아우인 박우(1476-1546)의 지도도 받았다. 26세에는 능성현감인 송세림에게 공부를 배웠다.

송순은 1519년 10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시험관이었던 조광조, 김구 등은 그의 문장이 탁영 김일손(1464-1498) 이후 최고라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송순은 크게 낙담하며 사림들의 꿈이 가라앉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시를 쓴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별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1520년에 송순은 사가독서를 마친 후 1524년에 세자 시강원 설서가 되고 1527년에 사간원 정원이 되었다. 그런데 1533년에 송순은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담양으로 낙향한다. 김안로의 전횡을 간언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면앙정을 짓고서 시 읊고 자연을 벗 삼아 4년간을 지낸다.

어쩌면 송순은 타고난 벼슬 운이 있었나 보다. 1537년에 김안로가 사약을 받은 지 5일 만에 그는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된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1542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한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오.

이 시는 송순이 지은 상춘가 傷春歌이다. 상춘가는 봄을 슬퍼하는 노래이다. 1545년 을사사화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림들을 봄 날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 비유하여 세상을 개탄한 노래이다. 여기에서 꽃은 사화로 희생된 사림들이고, 바람은 간신배들을 말하며, 희짓는(심술부리는) 봄은 어수선한 세태를 말한다.

당시의 세태를 알아보자.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자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1534-1567)이 11살의 어린나이에 임금이 된다. 섭정을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인종 임금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라고. 그리하여 인종의 상중 喪中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대윤 윤임 일파는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한다.

그런데 송순은 이 상춘가 때문에 화를 입을 뻔하였다. 어느 기생이 잔치 집에서 상춘가 노래를 불렀다. 이 잔치에는 윤원형 일파의 한 사람인 진복창도 참석하였다. 진복창은 이 노래를 불온 노래라고 하면서 기생에게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추궁하였다. 다행히도 그 기생이 끝내 묵묵부답하여 송순은 화를 면하였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를 풍자한 시를 여러 편 쓴 송순은 1550년에 대사헌 ·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윤원형 일파인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 수원 등으로 귀양을 간다. 그는 1년 반 후에 귀양에서 풀려나 1552년 3월에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다시 짓는다. 이 정자를 지은 후에 그는 자연가를 읊는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후 그는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8년에 한성부 좌윤이 되고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승진한 후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관직생활을 마감한다.

그리고 담양으로 낙향하여 면앙정에서 말년을 시와 가사를 지으면서 지낸다. 그가 지은 가사 <면앙정가>는 가사문학의 백미이며, <사미인곡>을 지은 그의 제자 송강 정철에게 영향을 주었다.

송순이 지은 정자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에 있다. 주차장에서 수십 계단을 올라가면 탁 트인 곳이 나오고 그 한 쪽에 정자가 있다. 정자 뒤는 벼랑이고 정자에서 바라보면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깔린 평야, 그리고 파란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자에 들어서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은 가운데 있는 면앙정 현판이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성수침(1493-1564)이 썼다. 송순은 이 글씨를 받기 위하여 친히 성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갔다 한다.

정자의 마루 왼편에는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퇴계 이황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가 함께 적힌 현판, 석천 임억령과 제봉 고경명의 <면앙정 30영> 편액 (양곡 소세양도 면앙정 30영을 썼는데 이 시는 면앙정에 걸려있지 않다.), 그리고 동악 이안눌의 <차벽상운> 현판 등이 붙어 있다.

다른 쪽 정자 마루에는 정조 임금이 호남향시에 출제한 <하여 면앙정 荷與俛仰亭> 어제 御題와 송순과 소세양의 시, 소쇄처사 양산보의 시, 그리고 기대승의 <면앙정기>등이 붙어 있다.
(송순은 면앙정을 다시 짓고서 기 記는 고봉 기대승에게 부 賦는 백호 임제에게 부탁하였다 한다. 이 글들은 그의 문집 <면앙집>에 나온다.)

먼저 송순이 지은 <면앙정 삼언가>를 살펴보자.

俛有地 仰有天 면유지 앙유천
亭其中 興浩然 정기중 흥호연
招風月 揖山川 초풍월 섭산천
扶藜杖 送百年 부여장 송백년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이 얼마나 담백하면서도 자연과 함께 노는 무위도가인가.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이 첫 구절에 송순의 마음이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면앙정이라 한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원래 면앙 俛仰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것 (앙불괴어천 仰不怪於天, 부부작어인 俯不作於人)이 큰 즐거움이라고 한 <맹자>에서 말한 부앙 俯仰을 조금 바꾼 것이다.


<맹자> “진심장 盡心章”에는 군자삼락 君子三樂이 실려 있다.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송순이 살았던 당시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로서 지조 있는 선비들은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면앙은 송순 자신의 수신 修身이요 삶의 길이었다.

정자의 오른편 마루에는 정조 임금의 어제 御題가 붙어 있다. 정조 임금은 1798년에 향시인 도과 道科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시험문제는 ‘하여면앙정 荷輿俛仰亭’이었다.

송순은 87세 (1579년)때 이곳 면앙정에서 그의 과거 시험 급제 60돌 축하 잔치인 회방연을 열었다. 이 날 면앙정 위에서 베푼 잔치는 마치 급제에 오른 그 때와 같았으며 온 전라도가 떠들썩하였다. 술기운이 절반이나 취할 무렵 당시 수찬 정철이 가로되 우리 모두가 이 어른을 위해 죽여 竹輿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교리 기대승, 헌납 고경명, 정언 임제 등이 죽여를 붙들고 내려오자 각 고을 수령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손님들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여 광영으로 여겼다. 이는 실로 옛날에도 없었던 훌륭한 행사였다.


면앙 송순. 그는 관용 寬容과 대도 大道의 학자였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해관 海寬과 해용 海容이었다. 두 아들의 뒤 글자를 합치면 관용이 된다. 이는 그만큼 그가 관용을 신조로 하는 포용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면앙이란 그의 호가 말 해 주듯이 그는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진정 부끄러움이 없는 삶, 대도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생각하여 보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임금에 그 신하, 그 스승에 그 제자란 말이 있듯이, 면앙 송순이 지조의 길, 관용의 길을 간 것도 효도와 청렴의 길을 간 스승 송흠이 있었기 때문이다.
향기로운 삶을 산 학포 양팽손


관수정 원운과 송순의 시 바로 맞은 편 대들보에는 학포 양팽손의 차운시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편액은 송흠의 친필 글씨가 적힌 편액과 임억령의 편액 사이에 있다.

이 시를 한 번 읽어 보자


謹次二首


翠壁盤回水鏡寒 취벽반회수경한
當流亭子爽雕欄 당류정자상조란
風吹細浪魚成隊 풍취세랑어성대
鷗蹴淸波雪漾灘 구축청파설양탄


白白山雲幽更悅 백백산운유갱열
雙雙歸鳥暮兼觀 쌍쌍귀조모겸관
仁居智樂公能了 인거지락공능요
昏醉榮名摠鼠肝 혼취영명총서간


遠遠源川양玉寒 원원원천양옥한
雙雙流注入亭欄 쌍쌍류주입정란
秋光颯爽淸波月 추광삽상청파월
雲影嬋姸白鷺灘 운영선연백로탄

幽興每仍閑處熟 유흥매잉한처숙
澄欄聊着靜中觀 징란료착정중관
名成勇退如公少 명성용퇴여공소
贏取氷操濯肺肝 영취빙조탁폐간

門人 禮曹正郞 문인 예조정랑
學圃 梁彭孫 학포 양팽손


삼가 운에 맞춰 2수 씀

제1수

푸른 암벽 서리우고 맑은 물은 거울처럼 차가운데
강 위에 지은 정자 난간도 시원하네.
바람에 물결이면 고기들 떼 이루고
갈매기 물 차고 날면 눈 같이 하얀 여울.

희고 흰 산 구름은 그윽하여 더욱 좋고
쌍쌍이 나는 새 저물녘에 함께 보네.
인 仁에 거하고 智를 즐긴 일 공께서는 이미 마쳤으니
영화나 명예에 취한 이들을 모두 쥐간으로 여기네. (여기에서 ‘쥐간으로 여기네’는 보잘 것 없다는 의미이다.)

제2수

저 멀리 물의 근원 옥처럼 차갑고
쌍쌍으로 흘러와서 난간 밑에 드누나.
맑은 물에 비친 달 가을빛에 상쾌하고
구름 모습 선연하다, 백로 서서 거닌 여울.

언제나 한가한 곳 흥취가 무르익고
일렁이다 멎은 물결에 고요를 바라보네.
이름 난 뒤에 용퇴한 공 같은 분 누구 있으리오.
얼음 같은 지조는 폐와 간도 씻은 듯.

문인 예조정랑
학포 양팽손

여기에서 제1수를 음미하여 보면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멀리 산 위에 하얀 구름과 새가 쌍쌍으로 날아가고, 정자 주위에는 물고기 떼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고, 선비는 난간에 앉아 하얗게 물거품이 이는 여울을 바라보고 있다. 제2수도 마찬가지이다. 가을밤의 달그림자. 백로는 서성거리고, 일렁이다 멎은 물결. 그 속에 은퇴한 노 선비가 한가함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학포 양팽손의 관수정 차운시는 관수정 편액이나 <지지당 유고>에는 2수가 실려 있는 데, <학포집>에는 3수가 실려 있다. 그러면 학포집에 실려 있는 제3수를 읽어보자. (이 제3수는 오종일 교수의 논문에도 소개되어 있다.)


길고 짧고 들쑥날쑥한 푸른 그림자 거울처럼 차가운데
백면의 동파 (중국 송나라 시대의 문인 소동파)가 작은 난간 위에 올랐네.
골짜기 물을 보며 몇 번이나 놀던 어린 시절 생각하였나.
이제는 이 정자가 이 늙은이의 여울이 되었구나.

하늘이 덕업을 안고 몸은 은퇴를 하고
땅이 감춘 청정한 곳에서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네.
강과 바다, 행랑채와 사당은 원래부터 간격이 없으니
맑은 파도, 밝은 해가 내 마음을 비추네.


參差綠影鏡奩寒 삼차록영경렴한
百面東坡上小欄 백면동파상소란
某壑幾思童子水 모학기사동자수
此亭今作老臣灘 차정금작노신탄

天扶德業能身退 천부덕업능신퇴
地秘淸區盡異觀 지비청구진이관
江海元無廊廟隔 강해원무낭묘격
晴波朗日照心肝 청파낭일조심간


여기에서 기묘명현 학포 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전라도 능성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일곱 살 때 이 고을을 순시한 전라감사가 양팽손에게 천지일월 天地日月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는 “천지는 나의 도량이요,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 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 라고 지었다 한다. 이에 전라감사가 “이는 바다 학의 모습이요 가을 달 秋月의 정기라 훗날 용문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 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는 양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양팽손은 15세 때 송흠을 만난다. 송흠이 양팽손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그의 학문을 테스트해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16세인 1504년에 송흠의 제자가 된다. 이 시기는 갑자사화가 일어난 해로서 송흠은 연산군의 학정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냈다. <학포집>의 양팽손 연보에 의하면 양팽손은 16세에 지지당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나세찬, 송순과 더불어 강론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후 양팽손은 그의 나이 23세인 1510년(중종 5년)에 조광조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사간원 정원, 홍문관 교리 등을 하면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펼치었다. 그런데 1519년 11월 기묘사화로 그는 나이 32세에 파직 당하고 조광조는 유배당하여 능성현(지금의 화순군)으로 내려온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 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이 시는 1519년 11월 26일에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에 유배 온 정암 조광조(1482-1519)가 쓴 시이다. <능성 유배 중에 쓴 시 綾城謫中詩>는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마음은 말 잃은 마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중종 임금이 자기를 다시 부를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는 하고 있지만 지금은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체념을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된 12월 20일에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아래 절명시를 쓴다.


愛君如愛夫 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 愛憂堂은 조광조의 절명시 1구 첫 글자인 임금 사랑의 애 愛와 2구 첫 글자인 나라 걱정의 우憂를 딴 강당 이름이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한다.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 길에 돌아가기 어려우므로 아주 얇은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초가집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한 다음 학포 양팽손을 찾았다고 한다.

양팽손이 안으로 들어오자 “양공, 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나이까. 태산이 무너지는가. 양주 梁柱는 꺾이는가. 철인은 시드는가.” 라는
사마천의 사기 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한다. 그런데 조광조는 한 사발의 사약에 쉽게 죽지 않아 다시 한 사발 더 마셨다 한다.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밝히려 했던 조광조가 죽자 양팽손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마을 골짜기인 쌍봉사 근처 중조산 조대감골 서원터 (화순군 이양면 중리 서원동 마을)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다음 해에 조광조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을 한다.

세상이 평안할 때 의리를 말하기는 쉬우나 난세에 의리를 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감수하고 조광조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양팽손의 행동은 정말 의롭다. 그리고 보니 양팽손은 조광조에게 하늘이 내려준 지인이다. 학포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묘는 아마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이 들판에 버려졌을 지도 모르니까.

그 후 양팽손은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에 학포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시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과 등진다. 2003년 4월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이 달의 문화인물’로 뽑힌 그가 그렸다고 전하여지는 그림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도>가 유명하다.


이 그림은 절벽이 있는 강산에 배가 한 척 있다. 멈추어진 배에 뱃사공이 있고 절벽에는 나무 몇 그루와 집이 있으며 먼 곳에 구름이 자욱하다.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같다. 이 그림에는 이러한 화제 畵題가 붙어 있다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 그림자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세상 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 온 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 낚시 걷어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 구경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할 수 있고
여울 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돛 단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말라.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렵다.


이 시에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하는 심정이 가득 담겨 있다.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려워서 고깃배도 오고 가지 말라’고 한 표현은 은일 隱逸 의 극치이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인연은 죽어서도 향기로운 지란지교이다.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죽수서원과 경기도 용인시의 심곡서원에는 지초, 난초 향기가 풍기는 두 사람의 신위가 같이 모시어져 있다.


안처함의 차운 시

한편 대들보를 달리한 대청마루 한 곳에는 안처함의 차운 시가 걸려 있다. 안처함(安處諴 : 1488-1543)은 조광조, 김정등 기묘사림을 옹호한 중종 때 정승 안당(1461-1521)의 아들로서 그의 형 안처겸이 1521년 신사무옥으로 처형되자 그 또한 유배를 당하였다.
안처함의 시를 읽어 보자.


謹 次

弄琴鳴玉水聲寒 농금명옥수성한
爽骨淸魂倚此欄 상골청혼의차란
八耋乞骸疏廣墅 팔질걸해소광서
一絲扶鼎子陵灘 일사부정자능탄

題名孰愧韋公睹 제명숙괴위공도
有術方知孟氏觀 유술방지맹씨관
心照碧波波照我 심조벽파파조아
先生端合伯夷肝 선생단합백이간


門人 弘文 副修撰 문인 홍문 부수찬
安處諴 안처함


삼가 운에 맞춰 씀

거문고 퉁김에 물소리도 차갑고
상쾌한 맑은 마음 이 난간에 기대었네.
팔십에 벼슬길에서 물러남은 소광 疏廣의 별장이오.
한 가닥 부정 扶鼎은 자릉의 여울이라.


그 이름 위공 韋公에 무엇이 부끄러워
방법에 비로소 맹씨 孟氏를 알겠노라.
마음은 푸른 물을 비추고 물은 나를 비추니
선생은 정녕코 백이 伯夷와 같다하리.
문인 홍문관 부수찬
안처함


여기에서 소광 疏廣이란 바로 모재 김안국의 시에 나오는 二疏중 한 사람이다. 중국 한나라 때 재상 소광 疏廣과 소수 疏受를 이소라 말하는데 두 사람은 숙질간으로 두 사람 모두 출사하여 벼슬하였다.

한편 자릉은 정사룡의 차운 시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자릉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중국 역사인물 인듯하나. 백이는 수양산에 숨어살며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절의를 지키었다는 백이숙제중 한사람인 백이인 듯싶고.


<참고문헌>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의의 길을 가다, 온새미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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