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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8회 관수정에서 (4) - 신광한과 정사룡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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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관수정에서 (4) - 신광한과 정사룡


관수정 주인 송흠이 지은 관수정시는 시가 두 수인 칠언율시이다. 이 시의 운 韻은 寒(덧말:한), 欄(덧말:란), 灘(덧말:탄),觀(덧말:관),肝(덧말: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운을 넣어서 차운 시를 지었다.

송흠의 관수정기 바로 맞은 편에는 예조참판 신광한(申光漢 : 1484-1555)의 편액이 걸려 있다. 신광한은 세조시절 영의정을 한 신숙주의 손자로서 대제학을 지낸 명 문장가이다.

먼저 차운 시를 읽어보자

敬 次

爲愛江干草閣寒 위애강간초각한
又供幽事更添欄 우공유사갱첨란
官從白首辭新命 관종백수사신명
身向靑山釣舊灘 신향청산조구탄

動處政須尼聖取 동처정수니성취
盈時還擬子輿觀 영시환의자여관
分明水鑑淸無累 분명수감청무루
自照何慙見肺肝 자조하참견폐간

禮曺參判 예조참판
駱村申光漢 낙촌 신광한


삼가 운에 맞춰 씀

물가에 있는 초가 정자에서 시원함을 좋아하고
조용히 유유하게 지내려고 난간을 덧붙였네.
백발에 벼슬길 나서라는 새 관직을 사양하고
청산에 몸담고 옛 개여울에 낚시하네.


나랏일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공자님의 도를 취하였고
영달을 안 바라고 도리어 曾子를 본받아 낙향하였네.
분명히 물처럼 깨끗하고 티끌 하나 없으니
스스로 비추어 본들 양심에 부끄러울 일 없네.

예조참판
낙촌 신광한

두 번째 시의 니성 尼聖은 공자를 말한다. 니성은 공자의 자인 중니 仲尼의 니와 성인 聖人의 성을 합하여 만든 글자 같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는 유가철학의 비조이고 유교의 시조 始祖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자여 子輿는 증자 曾子의 자이다.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는 중국 전국 시대의 유가 儒家 사상가로서,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그는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인 공자의 제자이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효경(孝經)>과 <대학>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봉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씨족제로부터 비롯된 ‘효(孝)’라는 덕목을 강조하였다. 또,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라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충서(忠恕)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후에 증자의 학통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 그리고 맹자로 이어져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신광한이 송흠을 증자에 비유한 것은 지지당이 효행을 실천한 선비였기 때문이다. 송흠은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광한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광한(申光漢)은, 자는 한지(漢之)이며, 호는 기재(企齋)요, 또는 낙봉(駱峰), 또 석선재(石仙齋)라고도 한다. 세조때 영의정을 한 신숙주 申叔舟의 손자이다. 150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이후 승문원 박사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전한등을 거쳐 1518년에 대사성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1520년에 파직되었다. 다시 추방되어 경기도 여주에서 18년 동안을 칩거하였다. 1537년에 김안로가 죽고 1538년에 윤인경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들을 기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540년에 대사헌, 15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거쳐 명종 때 우참찬이 되었고,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하여 진 후 벼슬이 찬성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들었으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1555년에 죽으니, “넓게 듣고 많이 보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거처하는 데에 공경하게 하고 행신하기를 간소하게 하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하여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신광한은 시인이고 소설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허균이 쓴 <학산초담>에 수록되어 있다.

신기재(申企齋)의 동산시(洞山詩)는 다음과 같다.

봉래도는 아득아득 지는 해 시름겹고 / 蓬島茫茫落日愁
흰 갈매기 해당화 숲에 다 날아갔네. / 白鷗飛盡海棠洲
오늘에야 비로소 명사 길을 밟게 되니 / 如今蹈踏鳴沙路
이십년 전 옛 꿈속에서 놀던 곳이라오. / 二十年前舊夢游

나는 그곳에 가 본 뒤에야 이 시의 절묘함을 알게 되었다.
<허균의 학산초담에서>
말년에 쓴 그의 소설은 필력이 뛰어나 몇 편의 몽유록과 전을 남겼는데 〈안빙몽유록 安憑夢遊錄〉·〈서재야회록 書齋夜會錄〉<최생우진기 崔生遇眞記〉<하생기우록 何生奇遇錄등이 그의 책 〈기재기이 企齋記異〉에 실려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 있는 신광한의 졸기를 덧붙인다. 졸기는 별세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데 사관의 평가도 들어 있다.


명종 19권, 10년(1555 을묘 / 명 가정(嘉靖) 34년) 윤11월 2일(계해) 2번째기사


영성 부원군 신광한의 졸기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신광한(申光漢)이 졸(卒)하였다. 광한의 자(字)는 한지(漢之)이며, 고령인(高靈人)으로 신숙주(申叔舟)의 손(孫)이다. 대대로 문장(文章)으로써 드러났는데, 일찍 부모를 여의고 배우지 못하다가 열 다섯 살에야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겨우 두어 해가 되어 드디어 이름난 선비로 성취하여 당시의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벼슬살이 함에 미쳐서는 오래도록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흉금을 털어 놓고 성의껏 인도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조광조와는 사이가 좋았으며 조광조도 그를 아끼고 공경하였다. 조광조가 죽을 때 신광한도 연좌되어 폐기되었으며, 물러나 여주(驪州)원형리(元亨里)에 우거하였다. 15년 동안 한가하게 생활하였는데 온 집안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두문 불출하였으며 일찍이 구하려고 힘쓰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시골에서 훌륭하게 생활하였다고 칭하였었다. 조정으로 돌아옴에 미쳐서는 사림(士林)들이 경하하였으며, 노성 숙유(老成宿儒)로 오래도록 문형(文衡)1807) 을 맡았지만 당시의 논의가 만족히 여겼다. 나이 72세에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순후(醇厚)하였으며 풍도(風度)는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으며 학문은 해박(該博)하고 문장은 정려(精麗)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에는 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일을 처리할 때에는 간혹 치우치거나 막히는 실수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사신은 논한다. 신광한은 풍치가 있고 아담한 사람이다. 모습은 수척하였지만 신색(神色)은 범류(凡類)를 벗어났으며, 집안에서는 생업을 경영하지 않았고 조정에 처하여서는 몸가지기를 청렴하고 신중히 하였다. 아첨하는 태도가 없었고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었으며, 문장은 바르고 고상하였다. 당시에 직언(直言)한 것이 있었는데 채택되지 않고 오활하다고 지목하여 산직(散職)에 두었으니, 이는 그의 숭상하는 바가 세태(世態)와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사룡의 차운 시


기둥 뒤편의 한 쪽에는 정사룡(鄭士龍 : 1491-1570)의 차운시가 적힌 편액이 있다. 정사룡은 ,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 (申光漢)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칠언율시에 능하였다.

정사룡이 지은 시를 읽어보자.

敬 次

又辭榮祿爲盟寒 우사영록위맹한
魚鳥欣迎繞藥欄 어조흔영요약란
疏傳出都傾祖席 소부출도경조석
子陵歸釣有烟灘 자릉귀조유연탄

以廉養志皆眞樂 이염양지개진락
歎逝臨流愜靜觀 탄서임류협정관
撰屨何時濠上去 찬구하시호상거
惠施冥趣照心肝 혜시명취조심간


同知 동지
湖陰 鄭士龍 호음 정사룡


삼가 운에 맞춰 씀

영화스러운 복록을 또 사양하는 그 맹세 차가우니
물고기와 새도 기뻐서 정자에 모여드네.
소부 疏傳가 도성을 떠남에 전별연 베풀었고
자릉 子陵은 돌아가 여울 가에서 낚시했네.


청렴을 교양으로 삼은 의지 진정으로 즐기고
가는 해 물 찾아 고요히 구경하네.
신 끌고 어느 때 호상 濠上에 찾아가서
그윽한 취미로 마음을 비추오리.

동지
호음 정사룡

첫 수는 송흠이 1541년에 서울에서 중종임금이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표현한 것 같다.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1541년 4월에 동대문에서 송흠의 전별연을 열고 도성 떠남을 환송하였는데 김안국의 전별시와 송흠의 답시는 이미 소개한바 있다.

여기에서 소부와 자릉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사룡은 송흠을 소부와 자릉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 정사룡에 대하여 알아보자. 정사룡(鄭士龍:1491-1570)은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로서 1509년에 별시문과에 합격하였고 1514년에 사가독서 하였다. 사간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고 1534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42년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정사룡은 이행, 소세양, 신광한과 함께 중종 대와 명종대의 문장을 이끈 문장가이었다. 그는 소식의 시와 함께 황정견의 시를 배웠기에 그의 시는 조직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시문, 음률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나 탐욕스럽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사룡은 자주 부정이 적발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이때는 경기도 양평에 물러나 있곤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중종임금은 그의 재주를 높이 사 어쩔 수 없이 다시 불러 외교의 임무를 맡기곤 하였다.


한편 <송계만록>에는 중종조의 영재로서 이행, 김안국, 신광한, 박상, 소세양, 정사룡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의 시가 관수정에 걸려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는 문화유산으로 이야기 거리가 충분하다.


우리나라에서 성종 이전에는 영재(英才)가 배출되어 얼른 한두 사람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서는 남곤(南袞))ㆍ김정(金淨))ㆍ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김안로(金安老)ㆍ신광한(申光漢)ㆍ박상(朴祥)ㆍ정사룡(鄭士龍)ㆍ소세양(蘇世讓)ㆍ조신(曺伸))같은 사람들이 모두 거벽(巨擘)이었다. 그뒤 문장을 하는 선비가 점차 예만 못하니, 인재의 성쇠도 세대를 따라 강쇄(降殺)되는 것인가? 아니면 배양하고 장려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글씨를 잘 쓰는 이, 그림 잘 그리는 이, 의약(醫藥)이나 음률(音律)이나 점치고 장사하는 것 등 비록 잡기(雜技)의 유들도 옛 사람만 못하니, 심히 괴이하다.
< 송계만록에서 >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