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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7회 관수정에서 (3) - 중종시절 명신 名臣, 김안국 · 홍언필 · 성세창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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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관수정에서 (3) - 중종시절 명신 名臣, 김안국 · 홍언필 · 성세창 이미지 1제7회 관수정에서 (3) - 중종시절 명신 名臣, 김안국 · 홍언필 · 성세창 이미지 2
제7회 관수정에서 (3) - 중종시절 명신 名臣, 김안국 · 홍언필 · 성세창

관수정 정자 마루위의 앞쪽 왼편에는 편액이 3개 걸려 있다. 지지당 송흠 선생의 둘째 아들인 아들 송익경, 홍문교리 하서 김인후, 그리고 좌이상 모재 김안국의 차운 시가 있는 편액이다.

먼저 송익경의 시부터 살펴보자

伏 次 복차

山含爽氣水含寒 산함상기수함한
都入溪亭繞曲欄 도입계정요곡란
散百東坡搖寶鏡 산백동파요보경
成三太白動淸灘 성삼태백동청탄

錦鱗游泳眞堪賞 금린유영진감상
雲影徘徊亦可觀 운영배회역가관
仰讀家君詩與記 앙동가군시여기
凜然庭訓合銘肝 늠연정훈합명간

子 都事 益憬 자 도사 익경


엎드려 운에 맞춰 씀

산은 상쾌하고 물은 시원한데
모두들 정자 찾아 난간 둘러쌓네.
동파 활짝 열려 물결 흔들리고
솟은 세 태백산 푸른 여울 움직이네.


비단 고기떼들 노니는 것 정말로 볼만하고
구름들이 배회하는 것 또한 가관이로구나.
삼가 아버님의 시문을 읽어보니
이 말씀을 엄한 가훈으로 깊이깊이 새기리.

아들 도사 익경


김안국의 경차 시


아들 송익경의 시 편액 다음 다음에는 좌이상 모재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의 경차 敬次 시가 있다. 이 시를 읽어보자.


敬 次 경차

勁健蒼松閱幾寒 경건창송열기한
芬榮旅枕夢初欄 분영여침몽초란
開亭坐處偏臨水 개정좌처편임수
扶策行時愛近灘 부책행시애근탄

耳會韶音聊萬聽 이회소음료만청
心融道體自耽觀 심융도체자탐관
人間百世誰堪代 인간백세수감대
日向淸泠照肺肝 일향청냉조폐간

左二相 좌이상
慕齋 金安國 모재 김안국


삼가 운에 맞춰 씀

억센 푸른 소나무 蒼松 몇 번이나 추위를 겪었는가
영광스런 나그네길 꿈속의 난간일세.
정자 위에 않았으니 물가 바로 곁이네.
막대 짚고 거닐면서 여울을 가까이 좋아하네.

귀 울리는 풍악소리 가만히 들어보며
마음은 도 道의 체 體와 융합하여 경치를 음미하네.
인간살이 백년세월 누구라서 대신하리.
언제든지 맑은 물에 마음을 비춰보네.

좌이상
모재 김안국

좌이상이란 벼슬은 좌찬성의 다른 이름이다. 이상 貳相은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의 두 번째 품계 벼슬이라는 뜻으로 좌찬성, 우찬성을 말한다. 세 번째 품계는 삼재 三宰로서 좌참찬, 우참찬의 별칭이다.


그러면 모재 慕齋 김안국 金安國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안국은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로서 호는 모재, 또는 은일 恩逸이다. 1478년에 태어나서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다.

그는 7세 때 글을 읽을 줄을 알았다. <소학 小學>의, “효자로다, 민자건 閔子騫이여.”라는 장에 이르러, “내 마땅히 이것을 본받겠다.”고 하였다. 12살에 대의 大義를 통하고 글을 보면 세 번을 넘지 않고 능히 외우고, 15세에 학문의 향방을 알았다.

1519년 기묘년에 그는 우참찬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는데, 특지로써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 받았다. 그런데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되니 경기도 이천 利川의 주동 注洞 집에 물러가 살았다. 작은 집을 지어서 은일재 恩逸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날마다 여러 학생들과 강학 講學하니, 배우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가 경기도 여주 驪州의 천녕 川寧에 옮겨 살면서 물가에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내려다보면 아득하고 넓은 것이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뜬 것 같으므로 정자 이름을 범사 泛槎라 하였다. 날마다 지팡이를 끌고 거닐며 시문을 읊조리면서 산 것이 19년이었다.

1537년에 권신 김안로 金安老가 사약을 받고 죽자, 김안국은 비로소 조정에 돌아왔다. 1539년 중국 사신 설정총 薛廷寵이 와서 조서 詔書를 반포할 때에 공이 접빈사가 되었는데, 중국 사신이 공이 정중히 대접함에 탄복하였다. 그는 드디어 찬성에 임명되고 대제학이 되어 문형 文衡을 맡았다. 무릇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공이 직접 지었으며, 비록 병이 위독하여도 딴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학자들의 사범 師範이 되었다. 그의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요,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지지당유고>에는 김안국과 송흠의 인연을 알 수 있는 시 두 수가 있다. 1541년 1월에 송흠은 임금으로부터 좌참찬 벼슬을 제수 받아 임금을 뵙고 사직하고자 서울로 간다. 그가 중종임금에게 겨우 사직 허락을 받고 4월 11일에 서울을 떠나 올 때 송흠의 전별연이 동대문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서 김안국은 전별시를 짓는다.



송참찬이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떠남을 송별함


하루에 세 번 신하를 만나는 임금의 은총은 참으로 유다르고
온 조정 대신이 모여 공을 전별함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네
청백한 풍모를 바라보면 더 이상 도화 圖畵가 필요하지 않아.
백세를 쟁쟁하게 그 이름 청사 靑史에 전하리라.


이러한 김안국의 전별시에 송흠 또한 화답시를 짓는다.


동대문 밖에서 열린 전별연에서 김안국이 지은 시에 화운함.


사귄지 어연 50년, 같이 한 스승 밑에서 공부 배웠고.
벼슬에 나선지 한 평생, 임금의 총애를 받는 광영 光榮 또한 함께 했네.
어진 대신들 조정에 가득한데, 나 혼자 조정을 떠나자니
동문 東門 이소 二疏란 말이 참으로 부끄럽네.


여기에서 이소 二疏란 중국 한나라 때 재상 소광 疏廣과 소수 疏受를 말한다. 두 사람은 숙질간으로 두 사람 모두 출사하여 벼슬하였는데 사람들이 두 사람을 이소 二疏라 불렀다.

중종시절에 사람들은 송흠과 김안국을 동문 東門에 사는 이소라 불렀던 모양이다. 이소 二疏! 송흠과 김안국의 관계를 말해주는 단어이다.


홍언필과 성세창의 차운 시


한편 정자 대들보를 지나서 왼편에는 우의정 홍언필 , 그리고 예조판서 성세창의 차운 시가 적혀있는 편액이 있다.

먼저 홍언필의 시부터 감상하자.

敬次 二首 경차 두 수


제1수

何處逃炎更避寒 하처도염갱피한
有生天地作藩欄 유생천지작번란
百年身世同浮粳 백년신세동부갱
千載光陰擬下灘 천재광음의하탄

幽賞久從方外得 유상구종방외득
雅懷但向靜中觀 아회단향정중관
先生淸德明於水 선생청덕명어수
何用臨池更洗肝 하용임지갱세간


제2수

長思南暖北多寒 장사남난북다한
夢入鄕園看藥欄 몽입향원간약란
茅屋短楹同廣廈 모옥단영동광하
石塘哀響當烟灘 석당애향당연탄

覺來客恨人誰解 각래객한인수해
病後衰容我自觀 병후쇠용아자관
再拜老臣辭北闕 재배노신사북궐
渥恩何啻沃心肝 악은하시옥심간

右議政 洪彦弼 우의정 홍언필



삼가 운에 맞춰 2수 씀

제1수

어느 곳 찾아서 한서 寒暑를 피하리오.
살던 터 천지 天地에 정자를 지었다네.
백년 신세는 물에 뜬 한 싸라기 같고
천년의 세월은 아래로 흐르는 개여울과 비슷하네.

조용히 감상하니 세상 밖의 일 깨달았고
평소에 품은 마음은 고요한 가운데 관찰하는 일 뿐.
선생의 맑은 덕은 물보다 깨끗한데
더 무엇을 물가에서 다시 씻을 것 있으리오.

제2수

따뜻한 남녘과 추운 북녘을 생각하다가
꿈속에 고향땅 찾아들어 정자보길 즐기네.
띳집의 짧은 기둥 큰집처럼 넓다랗고
못가의 구슬픈 소리 여울 가에 퍼지누나.

깨어보니 누구 있어 나그네 한 恨 풀어주리
병 앓은 뒤 스스로 야윈 얼굴을 바라보네.
늙은 신하 임금님에게 재배 再拜하고 하직하니
두터운 임금님 은혜가 내 마음을 적심이랴.

우의정 홍언필

제2수의 두 번째 시는 송흠이 1541년 2,3월에 서울에 있으면서 몸이 많이 아프고 임금에게 사직한 내용을 시로 적은 것 같다. 당시에 송흠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상태에서 임금에게 사직하겠다는 뜻을 전하였고, 중종 임금의 허락도 글로 받았다.

홍언필(洪彦弼 : 1476-1549)은 중종과 인종 시절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두루두루 하였고, 인종 조 묘정에 김안국과 함께 배향된 인물이다. 호가 묵재 默齋인 그는 1504년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갑자사화로 진도로 귀양 갔다가 중종 반정이후 사면되었다. 1509년에 부교리로 1513년에 장령으로 특진하고 1519년에 우부승지로 재임 중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정암 조광조와 내외종간이라서 화를 면할 길이 없었으나 당시의 영의정 정광필이 그가 죄 없음을 이야기 하여 무사하였다.

그는 몸가짐이 검소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자기 회갑 때에 자제들이 노래와 풍류로 술을 권하려 하니, 공이 말리면서, “내가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항상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기생들의 노래와 즐거움을 감히 받을 수 있겠느냐.”하고 사치스러움을 물리쳤다. 명종 초년에 원상 院相으로 위훈에 참여했고, 궤장 几杖을 하사 받았다. 시호는 문희 文僖이고 그의 아들 홍섬도 영의정을 하였다.


다음은 예조판서 성세창 (成世昌: 1481-1548)의 시이다.


敬 次 경차

岸回岡抱貯淸寒 안회강포저청한
白髮蒼顔靜倚欄 백발창안정의란
自喜心源同止水 자희심원동지수
誰知世路有危灘 수지세로유위탄

天敎壽域山川異 천교수역산천이
人向名塗夢寐觀 인향명도몽매관
安得扶笻溪上興 안득부공계상흥
與公相對說心肝 여공상대설심간

禮曺判書 遯齋 成世昌 예조판서 둔재 성세창


삼가 운에 맞춰 씀

구비 도는 산속에 맑은 물 고였는데
백발의 늙은이 난간에 비기어 섰네.
마음의 근원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물 같음을 스스로 기뻐하네.
누구라서 세상 길 위태로운 개여울임을 알았으리.

하늘은 이 산천 山川 묘하게 꾸미었고
사람들 명예를 꿈속에 바라보네.
어쩌면 지팡이 끌면서 흥 興을 찾아
그대와 같이 하며 마음 속 말해볼가.

예조판서 둔재 성세창


이 시를 읽으니 명경지수 明鏡止水란 단어가 생각난다. 맑기는 거울 같고 고요하기는 물과 같은 마음의 근원. 그 근원을 물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 성세창 成世昌에 대하여 알아보자. 성세창은 호가 둔재 遯齋요, 예조 판서를 지내고 악학궤범을 편찬한 성종 조 명신 성현 成俔의 아들이며,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생이다.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고, 정광필의 천거에 의해 예조참판 · 이조참판 등을 하였다. 1530년 대사헌 ·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김안로 金安老의 횡포를 논박하다가 도리어 평해 平海로 귀양을 갔다. 1537년에 김안로와 그 일당이 숙청되면서 성세창은 귀양에서 풀리고 형조판서, 예조 판서, 이조판서를 하였다. 1545년에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장연 長淵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성세창은 천품이 영특하고 위대했으며 살림살이에 구차하지 않았다. 학식이 뛰어났으며 문장이 법도가 있고 품위가 있어 오랫동안 예문관에 있었으며 대제학을 하자 여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필법 또한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서화와 음률에 정통하여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삼절 三絶’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 성현 成俔 또한 이름난 대제학이고 청백리이다. 그의 호는 허백당 虛白堂이고 《용재총화 慵齋叢話》《금낭행적 錦囊行跡》 《악학궤범樂學軌範》등을 저술하였다. 성현은 스스로를 부휴자 浮休子라 부르면서, ‘부휴자전 浮休子傳’을 지어,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쉬는 것 같으니, 떠 있는 것이 무엇이 영화로우며 쉬는 것이 또 무엇이 슬프리오.” 하였다. 죽을 때 유서에,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고 문 앞에서 상여를 소가 끌게 하며 만장 輓章은 열 장으로 하여 나의 검소한 뜻을 나타내라.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되 칭도할 만한 덕이 없으니 다만 표석 表石이나 세우고 비를 세우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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