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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6회 관수정에서(2) - 황진이와 사랑을 한 소세양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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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관수정에서(2) - 황진이와 사랑을 한 소세양

송흠의 <관수정기> 편액 바로 옆에는 소세양(蘇世讓:1486-1562)이 지은 경차 병서 敬次 竝序 시가 걸려 있다. 경차 병서란 ‘삼가 차운하고 아울러 서문을 덧붙인다.’라는 의미인데 소세양이 쓴 시라는 데 눈이 크게 떠진다.

소세양이라 하면 송도의 명기 名妓 황진이 黃眞伊와 진한 사랑을 한 사람 아닌가. 그는 어떤 여인과도 같이 지내는데 30일간을 넘기지 않았는데 황진이 하고는 이 기약을 훨씬 넘겨 사랑에 푹 빠졌다 한다. 2006년에 방영된 KBS 2 TV 인기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예조판서 김정한은 바로 소세양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황진이는 김정한과 이별하는 날 이런 시를 읊는다.


그리움만 남아

달빛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가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누렇게 피어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취한 임은 무한정 술만 마시네.

흐르는 물소리 차가운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고
매화 향기는 피리 소리에 스며드네.
내일 아침 우리 이별한 뒤에는
푸른 물결처럼 그리움이 길이 남겠지.



奉別蘇判書世讓 봉별 소판서세양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流水和冷琴 류수화랭금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이렇듯 간절하게 읊은 황진이의 시를 들은 소세양은 황진이의 곁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 내가 어찌 인정이 없겠느냐 吾其非人哉 (다른 책에는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하면서 황진이와 더 깊은 사랑에 빠진다. (吾其非人哉爲之更留 오기비인재위지경류)


황진이의 이 시는 동국시화 東國詩話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소세양의 문집 <양곡집>에는 황진이에 대하여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황진이가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가 소세양이 틀림없고, 지금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 가극으로 연출되고 있다.)


한편 소세양과 황진이가 처음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도 재미있다. 소세양은 송도 기생 황진이가 재색을 겸비하여 이름을 날린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을 한다. 내가 황진이를 만나 꼭 한 달만 같이 미련 없이 멋지게 돌아 올 터이니 두고 보라고. 한 달을 넘기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큰 소리를 친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황진이에게 편지를 전한다. 이 편지에는 석류나무 “류 榴”, 한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황진이가 이 편지를 보자 그녀 역시 한 글자로 답장을 보낸다. 답장은 “어 漁”이었다.
그러면 류와 어는 어떤 의미일까? 榴(류)는 碩儒那無遊(석류나무류)로 해석된다. “여기 큰 선비가 여기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로 풀이할 수 있다. 漁(어)는 高妓自不語(고기자불어-고기잡을어)로 “고상한 기녀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같이 고 싶으면 당신이 오세요.”이다. 이렇게 화답을 하였으니 조선 천하의 시인 소세양도 황진이에게 마음이 동할 수밖에.

아무튼 소세양과 황진이는 한달을 훨씬 넘겨 진한 사랑을 한다. 소세양은 친구와의 내기에서 졌지만 사랑은 달콤하였다.
어느덧 이별이 온다. 중종 임금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소세양을 마냥 송도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한양에서 다시 중책을 맡긴 것이다.


이후 황진이는 한양 간 임, 소세양이 너무나 그리워서 꿈길에서라도 그를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꿈>이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보고 싶고 그리워도 만날 길은 꿈속밖에 없으니
제가 반가이 임을 찾을 때, 임도 저를 반가이 찾으소서.
바라옵건대, 멀고 먼 꿈길을 서로 달리 오가지만
일시에 꿈꾸어 같은 꿈길에서 서로 만나사이다.




想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似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이 한시를 읽으면 명기 名技 황진이의 시 작법이 가히 명작임을 느낄 수 있다. 2구의 농방환시환방농(儂訪歡時歡訪儂). 첫 글자가 농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글자가 농으로 끝나고, 앞에서 읽어도 농방환시환방농이고 뒤에서부터 읽어도 농방환시환방농인 글 솜씨. 시제 詩題가 몽夢이요 1,3구의 운 또한 몽夢인 작법, 정말 대단한 여류시인이다.


한편 황진이는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다음 시조도 보냈는데 이 시조 또한 장안의 화제 거리였다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가실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밤길 예놋다.


그러면 여기에서 조선 중종 시절 최고의 문장가 소세양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1486년에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에서 태어났다.
소세양은 일곱 살에 신월 시를 쓸 만큼 글재주가 있었다.


신월 新月

누가 달 속의 계수나무를 깎아
여인의 빗 같은 저 달을 만들었나.
칠석날 은하수에서 헤어진 뒤
시름에 겨워 저 하늘에 던져져 있네.

誰斷蟾宮桂 수단섬궁계
裁成玉女梳 재성옥녀소
銀河一別後 은하일별후
愁亂擲空虛 수난척공허


그는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어 관직에 입문한다. 1511년 26세에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이 때 같이 공부한 사람이 이행, 김안국, 성세창, 홍언필, 정사룡 등 당대를 주름잡은 명문장가 들이었다. 1512년에 수찬 겸 경연검토관 시절에는 당돌하게 중종 임금에게 그동안 금기시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윤허를 얻어 현릉(顯陵)에 이장하고, 대묘(大廟)에 위패를 두도록 했다. 이후 이조정랑 · 직제학 등을 거쳐 왕자의 사부(師傅)와 승지 등을 지내고. 1533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판서·호조판서, 예조판서, 홍문관 · 예문관 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고 1539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그는 1540년 9월에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사직 상소를 올리어 윤허를 받았다. 이후 익산에 물러나서 1562년에 별세할 때 까지 23년간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그가 살 던 집 이름도 퇴휴당 退休堂이었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중용될 기회가 있었으나 대신들의 견제로 좌절되었다. 그는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 글씨를 잘 써서 필명도 높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를 읽어 보자

명종 28권, 17년(1562 임술 / 명 가정(嘉靖) 41년) 11월 30일(경술) 1번 째 기사

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의 졸기

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이 졸(卒)하였다. 훌륭한 재주가 있어 글씨도 잘 쓰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일찍이 대제학이 되었으나, 심술이 바르지 않아 공론(公論)의 배척을 받아 물러나 익산(益山)에 가서 산 지 거의 20여 년 만에 죽었다.


그러면 소세양이 지은 경차 병서 敬次 竝序 편액을 읽어 보자. 이 편액은 “판서송공위편양외보자수십년자씨수백일세...로 시작하여 소세양 서우 퇴우당 시왈 ... 그리고 두수의 시로 끝난다. 이 편액의 해석 글을 <지지당 유고>를 중심으로 읽어 보자.


경차 병서


판서 송공이 부모를 편히 봉양하기 위해 외직에 보임된 지 수십 년이었는데 자당께서 연세 101세로 별세하시었다. 복 服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왔을 때는 공의 나이가 이미 80세이었는데도 빙벽 氷壁같은 지조는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매 임금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판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늙었으므로 사직하겠다고 임금에게 청을 하여 물러났다. 고향에 내려와 사는 곳 가까운 곳에 좋은 자리를 골라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관수정이라 하여 생을 마칠 뜻을 보였다.

내 또한 노모가 계시기에 옥당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임금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다. 지금에야 중종임금의 허락을 받고서 귀향 하였는데 공의 아들 익경씨가 그 때 낙안부사로 있으면서 고맙게도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공이 직접 쓴 관수정기를 보이면서 나에게 화운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으로부터 지나치게 칭찬을 받았고 추장 推獎하여 명예를 얻음이 사실보다 지나쳤으며 평생토록 공을 사모하고 흠앙하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고향에 돌아오지를 못하고 벼슬살이를 달게 여겨 그만 둘 때가 되었음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하였음을 보고서 어찌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삼가 훌륭한 시에 화답하고 아울러 나의 생각을 기술하여 한가한 사이에 한번 볼 자료로 삼노라.

가정 18년(1539년) 8월21일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세자이사, 진산군 소세양은 퇴휴당 退休堂에서 쓰다.



시에 이르기를

雙(덧말:쌍)谷(덧말:곡)飛(덧말:비)湍(덧말:단)瀉(덧말:사)碧(덧말:벽)寒(덧말:한)
靑山(덧말:청산)斷(덧말:단)處(덧말:처)構(덧말:구)危(덧말:위)欄(덧말:란)
鍊(덧말:연)光(덧말:광)滉(덧말:황)瀁(덧말:양)朝(덧말:조)含(덧말:함)日(덧말:일)
琴韻(덧말:금운)琮(덧말:종)琤(덧말:쟁)夜(덧말:야)響(덧말:향)灘(덧말:탄)


跂(덧말:기)石(덧말:석)最(덧말:최)宜(덧말:의)秋(덧말:추)後(덧말:후)釣(덧말:조)
開(덧말:개)窓(덧말:창)政(덧말:정)好(덧말:호)靜(덧말:정)中(덧말:중)觀(덧말:관)
主人(덧말:주인)心地(덧말:심지)淸(덧말:청)如許(덧말:여허)
不用(덧말:불용)臨(덧말:임)池(덧말:지)更(덧말:경)洗(덧말:세)肝(덧말:간)


두 골짝에 나는 여울 飛湍 푸르고 시원한데
푸른 산 기슭에다 높은 집 지었다네.
비단 빛 물결 위엔 햇살이 출렁대고
거문고 소리가 쟁쟁하게 밤 여울을 울리도다.


돌 위에 걸터앉아 낚시질 가장 좋고
창문을 밀치고서 경치를 관람하네.
주인의 마음씨가 저토록 청고 淸高한데
또 다시 물가 찾아 무엇을 씻으리까.


과연 율시의 대가답다. 그의 시는 명나라에서도 이름이 나서
명나라 예부상서가 칭찬을 할 정도였고 중종시절에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니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나는 것은 경차 시가 지어진 연도이다. 경차병서에는 가정 18년, 즉 1539년 8월 21일에 시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로 의문점이 생긴다. 우선에 소세양이 1539년 8월에 익산의 퇴휴당에서 이 시를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양곡 소세양이 익산에서 살던 때는 중종 임금으로부터 노모를 모시겠다고 사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은 1539년 9월 15일 이후이다. (중종실록 1539년 9월15일자 참조)

둘째는 보통 정자를 짓고서 그 정자의 기문과 시를 짓는 것이 상식이다. 지지당 송흠은 1540년에 관수정을 지었으니 관수정 시 원운도 1540년 이후에 지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소세양이 1539년에 차운 시를 지었다면 원운이 지어지기 전에 지은 것이 되어 이치에 안 맞는다.

셋째는 송흠의 아들인 낙안 부사 송익경이 소세양을 찾아 간 시점이 언제이냐는 것이다. 송흠의 기행록을 보면 송흠은 1541년 1월에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어 서울로 가면서 1월22일에 소세양을 익산에서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낙안 부사 익경도 1월 21일에 삼례에서 만났다. 그렇다면 송흠의 아들 익경이 1541년 1월 하순에 익산에서 소세양을 만나 송흠의 관수정시 원운을 보여주고 차운 시를 부탁하였고, 이후 소세양은 차운시를 쓴 것 아닐까.

가정 18년(1539년)은 <지지당 유고> 편집과정에서 잘못 기재된 것 같다. 소세양의 차운시가 1541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흐름이 맞아 떨어진다.

한편 소세양의 흔적은 송순(1493-1582)의 정자 면앙정에도 있다. 송순은 송흠의 조카 되는 먼 친척이고 제자이기도 하다. 담양군 봉산면의 면앙정을 가면 송순의 시와 소세양 차운시가 함께 적힌 편액이 있다. 여기에서 두 시를 감상하여 보자. 먼저 송순의 시이다.


지팡이 짚고 솔 그늘 사이를 한가로이 거니는 데
언덕은 시내 머리에 의지하였네.
처마머리에 물러난 해는 하늘까지 가기가 멀고
자리에서 보이는 산은 들을 둘러싸고 있네.


바람은 연기를 몰아 나무사이로 지내고,
구름은 비를 내리며 가을을 재촉하네.
오르락 내리락 내 홀로 흥이 나다가
이 세상에 이런 저런 수심도 있네.


黎杖松陰步步幽
岸中從倚玉溪頭
巡簷白日行天遠
對揚靑山護野圍

風引店烟遙度樹
雲將浦雨細隨秋
登臨自取武邊與
肯着人間段段愁


다음은 소세양의 차운 시이다.

차운

대나무와 수풀이 깊은 곳에 정자가 깊숙하니
백 척이나 끊어진 언덕 머리에 서 있네.
고인물이 가득할 땐 들까지 합해지고
뜬 구름이 걷히면 산봉우리가 둘렀네.

금성산은 비를 몰아 사방으로 보내고
무등산은 가을을 한 조각씩 나누어 놓았네.
꿈에 놀라 깨어보니 가슴이 텅 비었는데
봉래산에 원숭이와 학은 무슨 수심이 있으리오.


소세양의 흔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는 그의 묘소에도 있다. 거기에는 소세양 부모의 묘와 둘째 형 세량의 묘도 함께 있는데 묘소 앞에 용화리 저수지가 있어 경치가 너무 좋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