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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4회 송흠의 초년 관직 생활 - 최부와의 인연(4)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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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송흠의 초년 관직 생활 - 최부와의 인연(4) 이미지 1제4회 송흠의 초년 관직 생활 - 최부와의 인연(4) 이미지 2
이제 송흠의 관직 생활을 살펴보자. 먼저 묘갈명을 읽어본다.


공은 1459년(세조5) 3월 13일에 태어나 1480년(성종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는 물러나 고향에 거처하며 후진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1502년(연산군 8)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시묘살이를 마치자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윤증의 묘갈명에서)

그는 나이 34세에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오른 그의 첫 근무처는 홍문관이었다. 홍문관은 옥당(玉堂)·옥서(玉署)라고도 하고 사헌부 · 사간원과 더불어 3사(三司)라 불리며, 유학의 진흥 인재의 양성을 담당하는 실세 부서이었다. 그의 직급은 정자(정 9품)로 지금으로 말하면 9급 공무원이나, 실제 권한은 상당한 막강하였다.

이 시절에 송흠은 공직 선배 최부(崔溥 1454-1504)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서 공직 생활에 있어서 지켜야할 도리를 배운다. 송흠과 최부와의 일화는 <지지당 유고>와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먼저 <지지당 유고>를 읽어 보자.

초당 허엽이 말하기를, 응교 최부는 나주사람이요, 정자 송흠은 영광사람이다. 같은 시대(성종 조)에 옥당에서 다 같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서로의 거리가 15리였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최부가 말하기를 “ 자네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는가.”라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라고 대답하였다.

최부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역마를 준 것은 그대의 집까지 였는데 그대의 집에서 내 집 까지는 개인적으로 가는 길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올 수 있겠는가? 하고 조정에 돌아온 즉시 그 뜻을 아뢰어 파직시켰다.

송흠이 최부에게 와서 사직 인사를 하니 최부가 말하기를 “자네는 아직 젊네. 앞으로도 마땅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 하였다. 송흠이 말하기를 “ 이 가르침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받들어 온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친구사이에 서로 권면 장려하고 옳은 일에 신뢰하는 것은 이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하겠다. 이는 <전언왕행록>에 실려 있다.



주서 : 나사문이 15리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금남 최부가 살았던 곳은 나주의 성안이요, 송흠이 살았던 곳은 영광의 삼계로 서로가 50리(20KM)이다. 그러니 십오리 두 글자는 아마 위아래가 바뀐 듯하다.’고 하였음


이긍익(1736-1806)이 지은 <연려실 기술>에도 이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무오당적 최부

○ 최부(崔溥)는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는 금남(錦南)이요,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성종 임인년에 진사과와 문과에 올랐고, 병오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을 거쳐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중략)

○ 공은 나주(羅州)사람이고 응교가 되었다. 송흠(宋欽)은 영광(靈光)사람이다. 정자(正字)가 되었다. 같은 때에 옥당에 있었는데 함께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서로 시오 리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 날 송흠은 공을 방문하였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에 공이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 하니, 송흠은 “역말을 타고 왔네.” 하였다. 공은 “나라에서 주는 역말은 그대의 집까지이고, 그대의 집에서 내 집에 오는 것은 사사 걸음인데 어찌 역말을 타겠느냐.” 하였다. 조정에 올라와서 공이 이 뜻을 임금에게 아뢰어 그를 파면시켰다. 송흠이 공에게 와서 하직하니 공은 “그대같이 나이 젊은 사람은 이 후에도 마땅히 조심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전언왕행록》
(후략)


이 두 자료를 살펴보면 이 일화의 출처는 <전언왕행록>이다. 초당 허엽(許曄, 1517-1580)으로부터 이 일화를 듣고 자기 책에 수록한 것 같다. 허엽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아버지로서 서경덕과 이황에게서 수학하였으며 김효원, 이발등과 함께 동인의 영수였다.

그러면 이 일화는 언제 일어난 것인가. 두 기록에는 성종 때 두 사람이 옥당에서 같이 근무하였는데 당시 최부의 벼슬은 응교(정4품), 송흠은 정자(정9품)로 적혀 있다.

우선에 성종의 재위가간을 살펴본다. 성종(1457-1494)은 1469년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재위한 임금이다. 송흠이 149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고 <표해록>(한길사, 2004) 부록에 있는 최부의 연보를 보니 최부는 1494년에 홍문관 부응교 겸 예문관 응교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송흠과 최부가 1494년에 같이 근무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최부에 대하여 알아보자. 광주 무양서원과 해남 해촌서원에는 <표해록>의 저자이고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崔溥 단종 2년 1454- 연산군 10년 1504)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금남 최부. 그는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 정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 錦南도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 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최부는 사림의 종주 宗主 김종직(1431-1492) 문하에서 공부를 한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다. 그는 너무나 대쪽 같은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강직한 간관 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폭군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종3품)인 그가 올린 이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그가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함을 회수하여 버렸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근에 되어 일어난 사림의 화 禍이다. 김종직의 총애하는 제자이면서 이미 연산군 눈 밖에 난 그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붕당을 하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504년에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또 끌려 왔다. 곤장 100대에 노비가 되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연산군은 그리하지 않았다. 참형 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으리라는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北風吹更急 북풍취경급
南國路何長 남국로하장
梅冷封殘雪 매냉봉잔설
荷枯立小塘 하고입소당

참형의 어명이 내려진 날. 그 날의 <연산군일기>에는 그에 대한 졸기 卒記가 이렇게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 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 文詞가 풍부했고, 간관 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년) 10월25일


다시 송흠과 최부의 일화로 돌아가자. 송흠은 강직한 선비 최부로 부터 공직생활에서 명심하여야 할 기본을 배웠다. 비록 최부에게 크게 혼이 나기는 하였지만 그가 공직 초년에 마신 쓴 약이 오히려 그의 공직 생활 내내 보약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순천부사, 여산군수, 장흥부사, 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고을의 원님을 할 때 마다 임금으로부터 청렴하다 하여 표창을 받았고, 조광조의 삼촌 조원기와 나란히 중종 임금 시절의 대표적인 청백리가 되었다.


한편 <지지당 유고>에는 송흠과 최부의 일화 제2편이 실려 있다.


<금남집>에 이르기를 최부가 일찍이 무오사화를 당하여 단천으로 귀양을 갔었다. 갑자년에 이르러 연산군이 다시 잡아오매, 송흠은 길에서 최부를 만났다. 송흠이 최부에게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하신다면 어떤 여한이 있으신가요?” 라고 물었다.

최부가 답하기를 “부모의 산소가 무안에 있는데 석물을 아직도 세우지 못하였고, 막내딸을 아직 시집보내지 못하여 이것이 여한이라”고 하였다. 송흠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마땅히 받들어 주선하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송흠이 전라감사가 되어 묘소에 입석 立石을 하고, 딸의 혼사에 있어서는 응교 김자수의 아들 김분과 정혼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기었다. (이는 나사문의 기문록 記聞錄에 실려 있음.)


최부는 1498년 무오사화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가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로 연산군에게 끌려오는데, 두 사람은 이 때 다시 만난다. 그리고 최부는 못다 한 일 두 가지를 송흠에게 이야기 하였고, 송흠은 그의 나이 76세인 1534년에 전라감사로 근무할 때 최부의 여한을 풀어준다. 무안에 있다는 최부 조상들 묘소에 석물을 세워주고(최부의 묘소도 무안군 몽탄면 이산2리 느러지 마을에 있다.), 막내 딸 혼사도 주선하여 준 것이다.

<표해록>(한길사, 2004) 부록을 보면 최부는 부인 해남 정씨와의 사이에 딸만 셋을 두었다. 큰 딸은 유계린에게 시집갔는데, 유계린의 아들이 유성춘(1495-1522), 유희춘(1513-1577)이다. 유성춘은 조광조와 같이 개혁정치를 하다가 기묘사화 때 희생을 당한 선비로서 윤구 · 최산두와 함께 호남삼걸로 불리었다. 미암 유희춘은 을사사화로 18년간 유배살이를 하였으나 선조 때는 재상이 되었고, 보물 제260호인 미암일기를 남겼다. 미암일기는 1567년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11년간의 일기인데, 16세기 조선시대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는 유희춘이 노후에 지낸 연계정과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 그리고 미암과 부인 송덕봉을 모신 사당이 있다.

차녀는 나주의 나질에게 시집갔고, 나질의 아들이 나사선, 나사돈,나사침, 나사상이다. (<지지당 유고>에는 기문록을 지었다는 나사문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데, 이 사람도 아마 나주의 나질과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인 듯싶다.)

최부의 삼녀는 김분에게 시집갔는데, 이 딸이 바로 송흠이 혼사를 주선하였다는 딸이다.

송흠과 최부. 둘은 정말 아름다운 인연을 가진 조선의 청백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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