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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회 청백(淸白)과 효(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2)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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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청백(淸白)과 효(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2) 이미지 1
제2회 청백 淸白과 효 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 (2)


송흠(1459-1547)의 묘소는 단출하다. 망주가 좌우에 있고,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 무덤 옆에는 거북이 등위에 세워진 묘갈비가 있다. 묘갈비의 윗부분에는 전서체로 ‘판중추부사 겸 세자이사 世子貳師 지지당 송선생 묘갈명 墓碣銘’이라고 적혀있다.

묘갈명 墓碣銘은 명재 윤증(尹拯: 1629-1711)이 지었다. 그의 제자인 송흠의 7대손 옥강 송명현 (1659-1743)의 부탁을 받아서 1683년(숭정기원후 56년)에 지은 것이다. 묘소에 이 비가 세워진 것은 광복 후 을묘 9월이다. 광복 후 을묘년을 서기로 환산해 보니 1975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묘갈명의 글씨가 비교적 선명하다.

윤증은 서인 소장파를 이끈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 임금이 그에게 대사헌 · 좌찬성 · 우의정 등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한 백의정승이다.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은 산림처사였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윤증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宋時烈 : 1607~1689)과 대립을 하였는데, 노론은 주자학을 오로지 신봉한 보수파인데 반하여, 소론은 주자학을 비판하기도 한 진보파이고, 정적 政敵인 남인에 대하여도 소론은 온건하고 소통하였던 데 비하여 노론은 강경 일변도이었다.

윤증과 송시열과의 갈등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묘갈명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를 역사에서는 회니시비 懷尼是非라고 한다.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살던 곳이 회덕 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이성 尼城이어서 그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윤증은 어려서 송시열에게 공부를 배운 송시열의 제자였다. 윤증은 1669년(현종 10)에 아버지 윤선거가 죽은 뒤 박세채가 지은 윤선거의 행장(行狀)과 여러 자료를 가지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은 성의 없이 묘갈명을 지어 주었다. 묘갈명에다가 박세채의 행장에 의하여 쓴 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적었다. 윤증은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이 미진하다고 여겨 4, 5년간 묘갈명을 다시 써 주기를 청했으나, 송시열은 골자는 내버려둔 채 자구만 몇 군데 손질할 뿐 끝내 윤증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송시열이 윤선거의 묘갈명을 탐탁하지 않은 자세로 지은 이유는 남인 윤휴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사문난적 斯文亂賊 으로 규정한 남인의 윤휴와 윤선거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이 못 마땅하였다. 이러한 감정 대립은 윤선거의 사후 묘갈명 작성을 계기로 윤증과 송시열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남의 선조 묘갈명을 어떻게 쓰는지 하는 점이 숙종 시절에 당파싸움의 단초까지 되었으니, 정말 옛 선비들은 가문의 명예가 이토록 소중하였나 보다.

그런데 윤증이 지지당 송흠의 묘갈명을 지은 1683년은 송시열과 윤증이 완전히 갈라진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윤증이 송흠의 묘갈명을 짓는 여유를 보임은 역시 산림의 대 학자 같은 모습이다.


한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 할아버지 윤황과 함께 장성군 삼계면 기영정 근처의 용암사에 배향되었다. 대사간이었던 할아버지 윤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를 이끈 성혼의 사위이고,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예학 김장생(1548-1631)의 제자이며 송시열과 같이 수학하였다. 한 동안 용암사는 송흠의 신위도 같이 모시어져 있었다. 그리고 보니 윤증은 장성 고을과 청백리 송흠과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다.


지지당 송흠의 묘비를 한참 본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묘갈명 번역 글을 지지당유고와 명재유고에서 찾았다. (명재유고는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한국고전종합D/B에서 볼 수 있고, ‘판중추부사 송공(宋公) 신도비명’ 번역 글은 명재유고 41권에 있다.)


묘갈명을 읽어 보자.

윤증의 묘갈명

우리 중종조에 호남 삼계현(森溪縣)에 어진 대부 송공(宋公), 흠(欽)이 있었으니 자는 흠지(欽之)이다.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고 벼슬살이를 청빈하게 하였으며, 지위는 높은 반열에 올랐고 대질(大耋 80세)을 넘기고 돌아가시었다. 지금은 공이 별세하신지 137년이 되는 해인데, 공의 7세손 명현(命賢)이 그 부친의 명을 받고 와서 공의 사적(事蹟) 한 통을 보여 주며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삼가 받아 읽어 보고는 마침내 깊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공의 명망과 덕행이 이와 같이 성대하였는데도 아직까지 비갈(碑碣)조차 없으니, 이는 바로 공이 남겨 준 청백함으로 인해 후손이 빈곤해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선조는 신평(新平) 사람으로 (생략) 부친 가원(可元)은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으로 우찬성에 증직되었고,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이다.

공은 1459년(세조5) 3월 13일에 태어나 1480년(성종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는 물러나 고향에 거처하며 후진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1502년(연산군 8)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시묘살이를 마치자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는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부름을 받고 , 박사(博士), 수찬(修撰), 사간원 정언ㆍ헌납, 병조 정랑, 전라 도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모친의 나이가 많으므로 외직을 청하여 보성군수(寶城郡守), 옥천군수(沃川郡守), 순천부사(順天府使), 여산군수(礪山郡守)에 연달아 보임되었다. 또 조정에 들어와 사헌부 장령, 여러 시정(寺正),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1524년(중종19)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다가 광주 목사(光州牧使), 나주 목사로 옮겼다. 1528년에 조정에 들어와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1529년에 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갔는데, 고을에 재임하는 동안 모친을 봉양하는 것 외에는 처자와 첩, 하인은 굶주림과 추위만 가까스로 면할 정도였다. 전근 갈 때에는 집에 한두 섬의 양식도 없었고, 근무하는 곳마다 번번이 염근(廉謹)하다는 이유로 표리(表裏 : 비단)를 하사받고 전후로 일곱 번이나 임금의 옥음(玉音)을 받았으니, 중종임금이 포상하고 총애함이 매우 컸다.

1532년에 중종 임금이 의정부로 하여금 조정의 대신 가운데 청절(淸節)한 성품이 평소 드러나고 늘그막까지 변함이 없는 자를 선발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이에 참찬 조원기(趙元紀)와 공을 선발하여 아뢰었는데, 임금은 조원기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시키도록 명하였다. 또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발령을 내면서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장려하였다.

1534년, 그의 나이 76세에 전라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모친의 연세가 99세였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모친을 봉양하게 해 주기를 청하니, 유시를 내리기를, “관찰사의 임무가 중하니 가볍게 그만두라고 할 수 없지만 봉양하겠다는 말이 간절하여 특별히 윤허한다.”하였다.

공은 집으로 돌아가 효성을 다해 봉양하여 모친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추위와 더위에도 의관을 벗지 않았으며 음식물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본 뒤에 올렸다. 모부인이 101세에 임종하니 초상을 극진히 치렀고 제사를 경건하게 지냈으며 삭망(朔望)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조상의 제사에도 반드시 참례하여 늙었다고 해서 게을리 하지 않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1538년(중종33)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고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노쇠하다는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고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였다.

1541년에는 특별히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자 공은 중종 임금이 돌보아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대궐에 나아가 사은숙배한 다음 곧바로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경회루(慶會樓) 남문(南門)에서 주연을 베풀도록 하였으며 또 본도로 하여금 쌀과 콩 40곡(斛)을 지급하게 하였다. 공이 표전(表箋)을 올려 사례하고 가마를 타고 도성을 나갔는데 삼공(三公) 이하 온 도성 사람들이 나와 강가에서 전송하였다. (생략) 공이 직접 기술한 기행록(紀行錄)이 남아 있다.

1543년에 또 특명으로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규암(圭庵) 송인수가 본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공의 별장에 가서 또 하나의 정자를 지어 ‘기영정(耆英亭)’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축하해 주었다.

1547년(명종 2) 11월 15일, 시골집에서 임종하니 나이 89세였다. 1548년 1월에 거처하던 삼계현 선방산(船舫山) 곤향(坤向)의 언덕에 묻히었다.


명종 임금께서 예조정랑 이영(李瑛)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제문의 대략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본래 온순하고 / 惟卿性本溫醇
행실이 독실하며 간결하였다 / 行篤簡潔
처신함에도 굽힘이 없었고 / 處己無枉
학문이 넉넉했으며 / 裕以學術
맡은 바 직무를 잘 수행하여 / 所履職擧
아름다운 소문이 매우 펴졌다./ 美聞弘多
정성을 다하여 부족함을 보필하였고 / 罄悃補闕
엄숙한 위의로 백관의 반열에 섰다 / 儀肅鵷列
어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 愛日心長
누차 남쪽 고을 맡기를 청하였다 / 屢乞南符
즐거움은 부모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데 있었으니 / 樂在養志
호호백발에 색동옷을 입었다 / 皓髮斑衣
마침내 황야로 물러나 은둔하며 / 竟遯荒野
정신을 함양하고 한가로이 보내니 / 頤神保閑,
공의 평생이 대개 여기에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안당(安瑭)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조광조(趙光祖)와 김정(金淨)등 여러 사람을 계급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쓰기를 청하였는데 공과 반석평(潘碩枰)도 아울러 천거하였다.

그런데 1519년 기묘사화 이후로 스스로 지지당(知止堂)이라고 호를 지었으니, 그 뜻을 엿 볼 수 있겠다. 고향에 살면서 예양(禮讓)을 돈독히 숭상하고 명분과 행검(行儉)을 연마하였으므로 문하에서 배출된 명류 인사가 매우 많았으니,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 그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편액을 ‘관수정(觀水亭)’이라고 써서 걸고 직접 시와 서문을 아울러 지어 그 뜻을 담았다. 뒤이어 화답한 이는 소세양, 김안국, 김인후, 임억령, 이문건, 송인수 등 이었는데, 연구(聯句)로 지어 방대한 작품이 되었으니 밝게 빛나 완상할 만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혼인하면서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리이고 사대부 집에서는 매우 부끄럽게 여길 바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녀를 모두 빈한하지만 행실이 있는 선비를 골라 시집 · 장가보냈으니, 이는 더욱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부인 하음 봉씨(河陰奉氏)는 감찰 인(寅)의 따님이다. (생략).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익침(益忱)은 병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차남 익경(益憬)은 낙안 현령(樂安縣令)을 지냈고 (생략)


명(銘)은 다음과 같다.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 萊子嬰兒之啼
백기 양진은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 伯起暮夜之知
소부는 동문밖으로 물러 나고 / 疏傅東門之退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네 / 潞公洛社之會
세상에 드문 미담인데 / 曠世美事
공이 실로 모두를 겸비하였네 / 公實兼備
스스로 성취하는 것은 사람이고 / 自致者人
온전히 내려주는 것은 하늘이네 / 全畀者天
여기 나라의 아름다운 많은 일들을 보게 되었으니
/ 于以見國家之亨嘉
어찌 공 한 몸의 영화에 그치겠는가 / 奚止公一身之英華
아 백년이 지나도록 / 吁嗟百祀
풍모와 운치를 잇지 못하였기에 / 風韻莫嗣
내 공의 무덤에 명을 지어 / 我銘其丘
공의 숨은 덕을 밝히노라 / 用闡厥幽
숭정 기원후 56년 계해 (1683년) 파평 윤증 지음


한문으로 된 묘비명을 읽기는 정말 어렵다. 한학을 많이 한 학자도 단숨에 읽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글로 번역된 묘갈명을 읽는 것 역시 내용이 길어서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역사 인물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면 묘비명 읽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