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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회 청백(淸白)과 효(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1)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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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청백(淸白)과 효(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1) 이미지 1
제1회 청백 淸白과 효 孝의 길을 걸은 선비, 송흠 - 장성군 삼계면 묘소에서 (1)
문불여 장성 問不如長城. 장성에서는 학문을 논하지 말라. 문자를 쓰지 말라. 그런 자부심이 강한 학자의 고향, 장성 長城을 간다. 장성 역사인물을 만나러. 장성에는 인물이 많다. 조선시대만 하여도 송흠. 박수량, 김인후, 김경수, 기효간, 윤진, 변이중, 정운룡, 기정진, 기삼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들 중에 맨 먼저 찾아가는 인물은 송흠 (1459-1547)이다.
그를 가장 먼저 만나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그는 50여 년간 벼슬을 하면서 청렴결백을 실천한 청백리이다. 둘째 그는 나이 77세에 전라관찰사를 사직하고 99살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신 효자이다. 효는 모든 덕행의 근본인데, 그의 시호가 효헌공 孝憲公(효의 근본, 으뜸)이다. 셋째는 조선의 선비 중에 가장 선배이기 때문이다.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1510-1560)보다 50년 먼저 태어난 선비로서 호남 유학의 제1세대이다.
장성군청 인터넷 문화관광 홈페이지에는 그를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 송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효는 적합한 말이나, 충은 좀 더 나은 표현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이라고 브랜드화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송흠은 백성을 인의 仁義로 다스리어 조정에서 청백리 칭호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송흠을 평가한 조선시대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자. 역사기록은 정사正史와 야사 野史 모두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사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고 담백하며 강자의 논리에 치중한데 반하여, 야사는 흥미위주이고 정사가 담지 못하는 구전도 기록하며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대표적인 정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연려실 기술> 글을 살펴보자.
먼저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이다. 1544년 3월22일자 기록을 보자.
중종 102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3월 22일(경신) 3번 째 기사
《전라도 관찰사가 영광군에 순찰 가서 판중추를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다》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宋麟壽)가 영광군(靈光郡)에 순찰 나가, 판중추(判中樞) 송흠(宋欽)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중략)
사신 史臣은 논한다. 송흠은 이 고을 사람이고 정자는 곧 송인수가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이어받아 세운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어 영광스럽게 해 준 것이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榮達)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었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觀水亭)이란 편액(扁額)를 걸고 날마다 한가로이 만족하게 지내기를 일삼았으므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존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집에 있을 적이면 종일토록 의관(衣冠)을 반듯하게 하고 조금도 몸을 기울이지 않고서 오직 서책(書冊)만을 대하였고, 고을 안의 후진(後進)을 접할 때에는 비록 나이가 젊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당(堂)에서 내려가 예절을 다했었다. 그의 어머니도 가법(家法)이 또한 엄격하여 감히 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나이가 1백 살이었다. 송흠 또한 나이 90이 가까운데도 기력(氣力)이 오히려 정정하였다. 특별히 조정에서 숭품(崇品)을 총애하는 은전을 입게 되었으므로 논하는 사람들이 인자한 덕의 효과라고 했었다. 도내(道內)에서 재상(宰相)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朴守良)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다음은 이긍익(1736 영조 12-1806 순조 6)이 쓴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 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이다. 중종조의 명신(名臣)에는 조광조의 삼촌인 조원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 나주 송재사에 배향된 나세찬 등이 나오는 데 송흠도
명신에 포함되어 있다.
송흠(宋欽),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 (知止堂)이요,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기묘년에 태어나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뽑혔고,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 耆社 (늙은 정승들의 모임)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다.
청백하고 검소하고 벼슬에 욕심이 없음이 조원기(趙元紀)와 같았고, 여러 번 1품 품계에 올랐다. 공이 매양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신영(新迎)하는 말(馬)이 겨우 세 필 밖에 안 되었다. 공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여산 군수(礪山郡守)가 되었을 때, 고을이 큰 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 했다. <행장>
이 두 사료 史料를 읽어 보면 송흠이 청백리이고 효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 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으로 이는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청 靑은 오행 가운데 나무 木으로써 동쪽에 해당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으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며, 유학의 덕목 중 인 仁을 의미한다. 서울의 4대문 중 동대문의 별칭은 흥인지문으로서 동쪽에 인을 일치시키고 있다.
한편 백 白은 오행 가운데 금 金으로 서쪽에 해당하고, 결백과 진실, 삶, 순결 등을 뜻하며 의 義를 의미한다. 서울의 서대문의 별칭은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의미의 돈의문 敦義門이다.
그런데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그냥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의가 넘치어야 청백리이다.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정의롭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도록 하는 관료야 말로 청백리이다.
<조선의 청백리, 이영춘 외 지음, 가람기획, 2003>책은 청백리 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청백리를 선발하고 표창하는 제도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문헌에 남아있는 것은 한나라 문제 文帝 12년(168년)가 청백리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곡식과 비단을 상으로 준 것이 처음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청백리 표창제도가 시작되었는데, 최석 · 최영 등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청백리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5명을 청백리로 선발한 이래, 태종 때 8인, 세종 때 황희, 맹사성 등 15인, 세조 때 8인, 성종 때 20인, 중종 시절에 조원기, 송흠 ,박상 등 34인, 명종 때 노진 · 박수량 등 45인, 선조 때 박순 등 26인, 인조 때 13인, 숙종 22인, 경종 때 6인, 영조 시절 9인, 정조 때 2인, 순조 때 4인등 모두 217명을 청백리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이들 중에 장성출신 청백리로 송흠과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 있다. 장성 한 고을에서 1품 이상 재상 급 청백리가 두 사람이나 나왔으니 참 대단하다. 그런 전통을 이어받아 장성은 지금도 청백리의 고장이다.
청백리 송흠의 트레이드마크는 삼마태수 三馬太守이다. 조선시대에는 한 고을의 수령이 부임할 때나 이임할 때는 그 고을에서 말 일곱 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송흠은 부임할 때 본인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가 탈 말 3필만 타고 갔다. 그래서 그는 삼마태수로 불리었고 청백리 송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넘어가자. 순천시의 팔마비 八馬碑는 청백의 상징이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 부사 최석이 서울로 이임을 하자 고을에서 말 7마리를 딸려 보내었다. 그런데 최석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다시 돌려보내었다. 순천으로 오는 도중에 암말이 새끼를 낳았다. 순천에 도착하자 말은 여덟 마리가 되었다. 고을 사람들은 이런 청렴을 칭송하기 위하여 팔마비를 세웠다.
이제 송흠을 만나러 길을 떠난다. 맨 먼저 가는 곳은 그의 묘소이다. 송흠의 묘소는 장성군 삼계면 관수정 바로 뒷산인 선방산에 있다. 먼저 관수정을 들렀다. 관수정 입구의 관수정 안내판 옆에 “송흠 지지당 효헌공 묘소입구”라고 한자로 적힌 표시돌이 있고, 바로 옆에 “신평 송씨 세장비” 표시 돌이 있다. 그 앞에는 천방마을이라고 적힌 돌이 있다. 세장비 표시 돌 옆을 보니 석재 울타리가 쳐진 곳에 비가 또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송흠 선생 신도비이다. 얼른 눈에 잘 안 띄어서 신도비임을 놓치기 십상이다. 신도비 안내표시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한 사람의 무덤 남동쪽의 큰길가에 세운 묘소 안내 석비 石碑인데 거기에는 행적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신도비 자리는 큰길가가 아니라서 적절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신도비문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비 맨 위에는 ‘판중추부사 지지당 송공 신도비명’이라고 적혀 있고, 비문은 윤증(1629-1711)이 쓰고 시장 諡狀(시호를 내려주라고 청하는 글)은 대제학 박태상(1636-1696)이 지었다.
관수정을 막 지나서 재실 건물과 바로 닿은 골목에 들어섰다. 여기에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오르니 산 정상이다. 여기에 묘소가 세 개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먼 위치에 거북이 등과 구름과 용이 머리에 얹어진 비석이 있는 묘가 바로 판중추부사(종1품) 송흠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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