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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를 마치면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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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연재를 마치면서

이제 <남문의병의 길> 연재를 마친다. 2013년 7월부터 6개월 동안 44회에 걸쳐 장성군청 홈페이지에 연재하였다.

먼저 장성남문의병 활동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자. 1592년 7월 18일 김경수는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종제 김신남, 아들 김극후․김극순 등을 데리고 장성 남문으로 가서 의병청을 설치하였다. 7월 20일에 김경수는 기효간․윤진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고창의 김홍우에게 격문을 보내 도내의 여러 지방 선비들이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격문을 보낸 지 1개월이 지난 8월 24일에 의병은 239명, 군량미 190석이 모였다. 왜군과 싸우기에는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김경수는 각 지역에서 병사와 양곡 모집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대표들과 수시로 서신 왕래를 하면서 모집 현황을 점검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 모집한 의병을 그 지역에서 미리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11월 17일에야 비로소 남문의병이 진용을 갖추었다. 전라도 중․서부지역 16개 고을에서 의병 1,651명, 군량 486석이 모였다.

여기에서 장성남문창의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의병의 발상지인 장성을 비롯하여 나주·담양·함평·영광·무안·광주·정읍·태인·고부·고창·흥덕·무장·부안·금구·순창 등 전라도 중서부 지역 16개 고을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둘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 인근에 산재해 있는 사찰의 승려와 사노(私奴)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창의비에 이름이 기록된 9명의 의승과 사노 애금이 바로 그들이다.

셋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과 그 인근지방의 수령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었다. 장성현감 백수종과 후임 현감 이귀가 적극 지원하여 주었고 고창현감 정운룡, 순창현감 김제민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넷째, 장성 남문에 모인 70여명의 선비들은 학연에 의해서 그 결속기반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항·김인후·기대승 등 호남출신 큰 선비들과 학연으로 맺은 사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항의 문인은 아들인 이수일, 김제민, 김대립, 김부, 김후진 등 5명이고, 김인후의 문인은 김경수, 김인혼, 기효간이며, 기대승의 문인은 기효증, 정운룡, 기효간 등이다.

다섯째, 장성 남문의병에는 혈연을 바탕으로 부자·형제 또는 문중의 사람, 가솔 등을 데리고 의병에 참여한 자들이 많았다. 남문창의의 맹주인 김경수는 아들 김극후·김극순, 종제 김신남, 김인혼 등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김극순의 장인 정운룡도 의병에 가담하였다. 또한 순창현감 김제민은 아들 김엽· 김흔이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고, 장성의 김중기·김덕기 형제, 정읍의 류희진·류희사․류희문 형제, 고창의 김홍우· 김광우․김덕우 형제, 부안의 김억일·김극온 부자, 영광의 이응종·이극부·이극양 부자, 함평의 김익웅·김덕생 부자, 정충량·정득량 종형제, 담양의 김언욱·김언희 형제가 의병에 함께 참여하였다.

이처럼 장성 남문의병은 각 지방의 사림들이 학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그의 가솔들, 지방관과 관군, 승려,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계층을 초월하여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전라도 중서부지역의 의병 총연합체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장성 남문의병은 11월 17일에 초단을 설치하고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부사 기효간, 참모 김홍우, 종사 윤진, 의곡장 기효증, 종사 박경, 도유사 서연 등을 선정하여 대오를 편성하였다.

11월 18일 장성의병은 10개조 시무책을 양호체찰사 정철에게 건의하였다. 여기에는 당시에 호남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건의가 들어 있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왜군의 유린을 당하지 않은 전라도 백성들은 강제동원, 강제징수, 강제노역의 3중고를 겪고 있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원을 모두 전라도가 담당하는 상황이었다.

양호체찰사 정철에게 올린 10개조의 건의안에는 전공자에 대한 포상과 군량의 운반방법, 승자총통·철환 등의 확보책, 공납의 폐단과 시정책 및 암행어사의 파견, 백성들의 지세감면 등이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철이 이 건의를 시정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장성 남문의병은 1592년, 1593년 6월 그리고 1597년 8월, 3차에 걸쳐 출진하였다. 제1차 활동은 1592년 11월 24일부터 1593년 2월 17일 까지 이다. 11월 24일 의병장 김제민은 김홍우·김신남·이수일·윤진 등 1,6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하였다. 장성 남문을 출발하여 태인 - 전주 - 여산 - 천안 - 평택 - 안성 - 용인까지 북상하였다가 1593년 2월 17일에 장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약 3개월이 소요되었다.

서울로 상경하던 장성 남문의병은 도중에 커다란 싸움은 없었지만, 2차례에 걸쳐 일본과 싸움을 벌여 벌려 일본군 수십 급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12월 19일에는 직산에서 왜군과의 싸움에서 적병 수십 급을 참획하였으며, 22일에는 진위에서 적의 척후병 15명을 생포하였다.

한편 맹주 김경수와 부사 기효간은 1592년 12월 3일 군량미 300석과 모시 15필을 의곡장 기효증을 통해 의주 행재소로 보내고, 이어서 군량미 100섬을 영남의 곽재우 의병소로 전달하였다.

제2차 의병활동은 1593년 5월 29일부터 1593년 6월 29일 까지 이다. 1593년 4월에 서울에서 물러나 경상도지역으로 남하한 왜군이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김경수는 1593년 5월 29일 각 읍에 발문하여 다시 병사와 군량을 모았다. 이에 6월 2일에는 고창의 김홍우가 동생 김광우를 시켜 의병 170명과 군량 72석을 보내왔으며, 담양의 김언회가 의병 100명과 군량 50석을, 무안의 윤황이 의병 100여명과 군량 70석, 김신남이 의병 200명과 군량 39석을, 김인혼이 의병 65인과 군량 47섬을 가지고 장성에 왔다. 그 결과 6월 3일에 장성 남문에는 의병 836명과 692석의 군량이 모아졌다.

김경수의 아들 김극후와 조카 김신남, 그리고 김인혼 등은 6월 7일 의병을 이끌고 장성을 출발하여 담양 - 순창 - 남원 - 함양을 거쳐 6월 15일 진주성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복수의병장 고종후 군과 합세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는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10만명의 왜군은 21일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29일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의병장 김천일·고종후·최경회와 김극후, 김극순을 비롯한 장성 남문의병은 모두 순절하였다.
제3차 의병활동은 정유재란 때 이루어졌는데 1597년 8월 16일부터 9월 10일까지 활동하였다.

1597년 1월에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1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였고,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경수는 사촌동생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란 때 두 아이가 전사한 뒤부터 날마다 원수를 갚을 일만 생각해 왔다.”고 호소하면서 의병을 다시 규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597년 8월 17일 김신남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전주로 향하여 그곳에서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 8월 18일에는 좌랑 김홍우가 의병 100명, 김중기·박안동·김세 등이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전주에 집결한 장성 남문의병은 8월 19일에 군오를 점검한 후 8월 20일 여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8월 25일에 경기도 안성까지 진군하였다가 9월 10일에 장성으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제3차 장성 남문의병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즉 김홍우는 경기도 소사에서 명군 해생의 군대에게 패하여 도망쳐 오던 일본군을 대파하였으며, 김신남은 안성에서 일본군 32급을 참살하고 조선인 포로 17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번 연재는 다음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기록에 대한 심층 연구를 한 점이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에 실린 격문과 시무책, 선조와 세자 광해군의 유시, 호남오산남문창의비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통하여 장성 남문의병 활동이 단순히 왜군과의 전투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활동이었음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둘째, 참여 의사들에 대한 인물 탐구를 한 점이다. <제현사실>, <오천집>, <개천정사지>와 <하곡집>,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을 통하여 참여의사들에 대한 인물연구를 하였다.

가장 집중적인 연구를 한 인물은 김경수와 정운룡이다. 특히 고창현감 정운룡은 왕자사부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관찰사 이광을 탄핵 상소한 사실 등이 <국조보감>, <조선왕조실록>등에 실려 있어 그에 대한 집중연구를 할 수 있었고, 11월 초에 하곡 정운룡 재조명 발표회가 개천정사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아쉬운 점은 자료의 한계로 기효간․김홍우․김신남 등 다른 의사(義士)들에 대한 집중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과 윤진의 입암산성 전투, 변윤중과 기씨부인의 순절 등 정유재란과 장성사람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이다.

셋째, 기존 기록의 진위(眞僞) 여부에 대하여 검토하였다는 점이다. 정유재란 때 직산전투가 1597년 9월 7일에 행해졌다는 점에서 3차 장성의병이 안성 전투를 한 시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고, 홍계훈등 몇 분 의사들의 순절 시기가 <호남절의록> 등과 다름도 언급하였다.

넷째, 장성 남문의병 관련 역사현장을 답사한 점이다. 오산창의사및 창의비각은 물론이고, 장성남문이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보고, 장성의병 행군 길 그리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답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의병의 고장 장성’ 코드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세 가지 제언을 한다.

첫째, 장성 남문의 위치를 확인하고 여기에 표석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북일면 오산리 장성 남문과 북이면 모현리 오산창의사 그리고 북이면 사거리 남문창의비를 잇는 장성의병 길을 만들어서 이를 관광자원화 하자.

둘째, 의병의 날 지정과 의병교실 운영이다. 1592년 음력 7월 20일을 장성 의병의 날로 지정하여 의병 축제를 하자. 중․고등학생과 일반인에게 장성이 의병의 고장임을 알리는 의병교실을 운영하여 충의정신을 함양시키자.

셋째, 의병의 후손들에게 전해오는 문집, 고문서, 간찰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남문창의 의병의 생애사 연구를 하자.
임진왜란 때 호남의 역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3년 7월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글로 표현될 수 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 3차에 걸친 의병 활동을 한 장성남문의병. 그들은 정말 의롭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