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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서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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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서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이미지 1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서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이미지 2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서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이미지 3
제44회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서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오산창의사를 간다. 주소는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이다. 사당 입구에서 먼저 안내판을 살펴본다.

오산창의사

오산창의사는 임진왜란 시 구국일념의 정신으로 남문에서 창의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이 고장 선비들의 숭고한 절의와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맹주 오천 김경수 외 71위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 (중략) 그 뒤 직도리에 창의사를 창건 17위를 배향하였다.

고종 5년(1868) 훼철되어 1932년 현재 이곳에 복설하면서 오산사(鰲山祠)라 개칭하고 1934년 67위를 배향하였으나 1937년 일제에 의해 제사 중단, 1945년 2위, 1981년 오산창의사라 개칭하고 3위를 추배하여 모두 72위를 배향하며 매년 음 2월 27일 향사한다.(후략)

오산창의사는 장성군 북이면 직도리에서 창의사로 창건되었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복설운동이 일어났다. 1931년에 장성과 인근지역 유림과 후손들은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 사당을 짓기로 하고 193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에 사당을 지었는데 이 때 명칭을 오산사로 개칭하였다.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는 북쪽에 옥녀봉을 뒤로 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 조용한 곳이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어 이곳에 사당을 지은 것 같다. 특히 장성남문의병이 서울로 행진할 때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의 장성남문을 출발하여 북이면 모현리 앞 정동마을을 지나 사거리에서 체류한 후 행군하여 모현리는 향사하기에 적당한 자리였다.

한편 <오산사지>에는 오산사 연혁이 잘 나타나 있다.

오산(鰲山)은 곧 장성의 고호(古號)이다. 고을의 북쪽 20리쯤 되는 갈재 아래 북이면 사거리에서 옛적에 창의비와 비각을 세웠으며 또한 단(壇)을 설치하고 향사하였다. 그 후에 북이면 직도리(稷道里)에 창의사를 세우고 여러분 중 17위를 배향하고 향사하다가 무진(1868년)에 국령(國令)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그 후 63년이 지난 신미(辛未 1931년)에 본군 유림들이 여러 고을의 유림과 창의한 분들의 후손들에게 통고하고 임신(1932년)에 북이면 모현리(茅峴里)에 사당을 건립하여 오산사(鰲山祠)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오산남문 창의의 뜻에 맞춘 것이다. 갑술(1934년) 10월 18일에 창의한 여러분 67위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봄과 가을 두 차례 향사하던 중 3년 후인 정축년(1937)에 왜놈들의 탄압에 의해 향사가 중단하였다. 을유(1945년)에 조국이 광복되자 조여일과 유경인 2위를 추배하고 다시 추향을 받들고 있다.

추록 : 그 후 1981년에 유림과 본손들의 결의에 의해 같이 창의한 분 김후진, 김대립, 무명전사 위패 3위를 추배하고 향사일자도 음력 2월 27일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유림들이 향사하고 있다.

이어서 사당으로 들어간다. 사당 앞에는 강당이 있다. 강당 이름은 숭의재(崇義齋)이다. 의를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강당과 내삼문 사이에는 비가 3개 세워져 있다. <오산창의사 묘정비(鰲山倡義祠 廟庭碑)> <장성남문창의 390주년 기념비(長城南門倡義 390周年 紀念碑)> <남문창의 현창기적비(南門倡義 顯彰紀蹟碑)>가 그것이다.

1982년에 세운 <오산창의사 묘정비>는 장성남문창의 기념사업회에서 1981년에 ‘오산사’의 명칭을 ‘오산창의사’로 개칭하고 무명전사의 신위를 추배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문을 읽어 보자.

오호라! 임진 4월 왜구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의열(義烈)의 피로 물들여진지 어언 390년, 그 때에 억조창생(億兆蒼生)들은 어육의 화를 입어 유린되고 선조는 조신(朝臣)들을 대동하고 의주로 파천하는 불시의 환난에 호남일대 의열의 정신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고 김천일․고경명 등이 기의(起義)의 선봉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금산 패전으로 천추의 한을 남기었다.

이 비보를 접하자 장성남문에서는 통분을 가눌 길 없는 우국창의(憂國倡義)의 우렁찬 외침이 천지를 진동케 하였으니 때는 1592년 7월 18일 이었다.

김경수는 기효간, 윤진과 함께 남문에 모여 격문을 작성한 후 인근 열읍에 띄운즉 고창․흥덕․담양․영광․정읍․무안․나주․무장․고부․광주․전주․순창․남원․태인․함평․금구․남평․장성 등 각지에서 운집한 의사(義士) 의병은 의승 백 여 명을 포함 1,650명에 이르렀고 모취(募聚)한 의곡은 9백 여 석 이었다.

대열을 정비한 의병부대는 김제민의 통솔하에 용맹출진하여 전쟁에서 참획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나 직산․진위․여산․안성․용인․행주․소사 등 각지에서 수시로 접전하여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

2차 출진에는 의병 8백여명과 의곡 690여석, 3차 출진에는 의병 7백여명 출전하여 수훈(殊勳)을 세웠다.

한편 병참의 임무를 도모하며 기효증으로 하여금 의주행재소에 3천여석의 의곡을 수송케 하였고 또 각지 의병청에 수백석의 군량을 보급해 줌으로써 사기를 진작시켰다.

진실로 남문창의는 신분의 고하나 종파의 이동(異同)을 초월한 의열정신의 귀감으로 그 분들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은 길이 청사(靑史)에 빛나리라.

이로 부터 이백여년이 지난 1802년에 남문창의 선열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장성군 북이면 사가리(四街里)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를 건립하여 67위를 설단(設壇) 제향(祭享)하였으며 그 후 따로 북이면 직도리(稷道里)에 창의사(倡義祠)를 건립하고 창의(倡義) 제공(諸公) 중 17위를 배향하였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사(廢祠)되었다가 1932년 이곳에 사우를 복설하고 1934년 67위를 봉안하였으나 3년 후인 1937년 일제의 폭정은 향사(享祀)마져도 금하는 탄압을 강행하였다.

천운은 다시 돌아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69위를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1년 사우 명칭도 오산사(鰲山祠)에서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로 개칭하니 이는 남문창의의 높은 뜻을 영세불망 기리기 위함이다.

본 사우 건립이후 봉안한 선열제현의 서열에다 장성남문창의기념사업회의 뜻을 모아 가동 등 무명전사의 위(位)를 추향하고 여기 묘정비를 세우노라.

장성남문창의기념사업회장 이을호 근찬
서기 1982년 12월4일 장성남문창의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함

1984년에 세워진 <장성남문창의 390주년 기념비>는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의병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장성 남문창의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학술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남문창의 현창기적비>는 1991년에 천안 독립기념관에 남문창의 격문비를 건립하고, 오산창의사 정비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한편 내삼문인 경의문(景義門) 왼편 한 쪽에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호남의병활동 중심지 오산창의사가 전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2013년 2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최근 기존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장성 남문창의비’를 ‘장성 오산창의비와 창의사’로 확대 변경해 지정고시했다. 선열들의 의병 활동 내용이 적혀진 오산창의비만 문화재로 지정되고 그 넋과 정신을 추모하는 오산창의사의 가치는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장성군이 전남도에 문화재 지정을 건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이제 오산창의사 사당으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모두 72위의 신위가 있다. 서벽상단 17위, 동벽상단 17위, 서벽 10위, 동벽 10위, 서벽 하단 17위, 동벽하단 17위가 모시어져 있다.

향로가 놓여 진 곳 앞의 동쪽에는 김경수, 기효간, 윤진, 서연의 신위가 있고, 서쪽에는 이귀, 김제민, 김홍우, 박경의 신위가 있다.

먼저 향을 피우고 배향을 하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몇 번이나 의병을 일으킨 호남의 의인들. 이들이야 말로 진정 대의를 위하여 나선 호국의 의사이다.

이어서 한 분 한 분의 신위를 찬찬히 살펴본다. 이응종, 김인혼, 김신남, 김극후, 김극순의 신위도 보인다. 무명전사의 신위도 있다.

그런데 의곡장 기효증의 신위는 찾아 볼 수 없다. 1934년에 67위의 신위를 배향할 때 기씨문중에서 기효증의 부친인 고봉 기대승의 사당도 없는 상태에서 기효증의 신위를 모시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통보하여 기효증의 신위가 모시어지지 않았다 한다. 이제는 광주에 기대승을 모신 월봉서원이 있으니 기효증의 신위가 오산창의사에 모시어졌으면 한다.

한편 매우 아쉬운 점은 의승 9명과 사노 애금의 신위가 보이지 않는 점이다. 장성남문의병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던 당시에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솔선하여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서라도 이들에 대한 신위를 모시었으면 한다. 혹시 사당 안이 좁아서 신위를 모시기 어렵더라도 방법을 찾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사당을 나오면서 내년 음력 2월말 향사에는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때이면 <임진왜란과 장성남문의병>책도 나올 것이니 책을 헌정하련다.

<참고문헌>
o 김경옥, 장성남문의병과 오산창의사, 목포대학교 박물관/장성군, 2012
o 오산창의사,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호남문화사, 1997

사진 1. 오산창의사 사당
2. 사당 안의 신위들
3. 오산창의사 묘정비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