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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 - 1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서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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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 - 1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서 이미지 1
제42회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 - 1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서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를 간다. 장성에서 서울로 가는 사통팔달의 북이면 사거리는 1592년 11월 24일에 출정한 1,651명의 장성의병이 하룻밤 머물던 곳이다. 여기에는 장성남문창의비가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창의비는 1592년에 남문창의가 결성된 지 210년이 지난 1802년(순조 2년)에 세워졌다. 창의비각은 1809년에 세워졌는데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창의비의 정식 명칭은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이다. 비는 앞면 중앙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고 새겨져 있고, 남문창의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비의 좌측 옆면과 뒷면 그리고 우측 옆면에는 창의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의 맨 마지막에는 홍문관대제학 홍양호가 짓고, 글씨는 홍문관제학 황승원, 전서는 춘추관 수찬관 김이도가 썼다고 적혀 있다. 전서 글씨는 <유명조선(有名朝鮮) 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고 좌측과 뒷면 그리고 우측 3면에 걸쳐 적혀 있다.

그러면 앞면 비문에 적힌 남문 의병 창의 인물을 살펴보자. 창의인물은 모두 76명이다. 제현위차 22명, 자제종사 12명, 동창 32명, 의승장 9명, 사노 1명으로 구분되어 기재되어 있다.

제현위차(諸賢位次) 22명은 장성현감 이귀, 맹주 김경수, 의병장 김제민과 기효간․김홍우․윤진․기효증․박경․서연․이응종․이수일․정절․정운룡․김경남․김억일․김언욱․유희진․김인혼․윤황․김부․김홍원․홍원이다.

자제종사(子弟從事) 12명은 김광우․김덕우․김명․김극후․김극순․이극부․이극양․김언희․유희문․김엽․김흔․김극온 이다.

동창(同倡) 32명은 김후진․김대립․김해․김중기․김성진․김신남․서홍도․김기수․박안동․서정후․김란․김덕기․이원개․유덕문․정충량․송정춘․정득량․조여일․허상징․최보의․홍계훈․김경우․박운․박응춘․전서․박성․김익웅․김무철․오인갑․김국서․이근․김정이다.

의승장(義僧將) 9명은 처능․자혜․의관․계묵․덕인․처한․학인․계한․혜인 스님이다. 사노(私奴) 1명은 맹주 김경수의 종 애금이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의승장 9명과 사노 애금이다. 창의비에 이들 명단을 새긴 것은 그들의 신분이 어떠하던 그 공로를 치하하여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이룬 것이다.

비문의 좌측 옆면부터 시작하여 뒷면 그리고 우측 옆면 3면에는 창의비문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비문 글씨는 오래되어 잘 알 수가 없다. 다행히도 <국역 남문창의록 오산사지>와 목포대학교 김경옥 교수의 <장성남문의병과 오산창의사>책에 창의비문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참고하여 창의비를 읽어 보자.

호남오산남문창의비

내가 일찍이 호남에 왕명을 받들어 노령을 넘어 장성을 지나면서 그 남문에 올라가, 임진년(1592년) 거의(擧義)의 사적을 가만히 상상해 보니 모든 의사(義士)가 피를 흘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머리를 북으로 돌려 난리에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듯 같아서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능히 포상을 받지 못한 채 2백년이 지나도록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드러나지 않은 것이 한스럽게 여겨졌다.

첫 머리는 비문을 쓰게 된 연유이다. 장성남문창의가 20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번에 호남의 모든 선비들이 발분창론(發憤倡論)하여 예조에 장계를 올리고, 또 당시 사실을 편찬하여 책 이름을 <남문창의록>이라 하고, 장차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고자 천리를 걸어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이 지난 시기에 호남선비들이 남문창의 의병들에 대한 포상을 요청하는 활동이 활발함을 알 수 있다. 예조에 포상을 요청하고 <남문창의록>을 편찬하며 창의비문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남문창의록>은 1799년(정조 23년)에 발간되었다. 황승원이 서문을 쓰고 부안군수 김인순이 발문을 지었다. 여기에는 남문일기와 격문과 시무책 10개조 등이 수록되어 있고, 참여한 22명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대제학 홍양호는 이 비문을 쓰면서 <남문창의록>을 많이 참고하였으리라.

내가 살펴보니 옛적 임진년에 섬나라 오랑캐가 크게 쳐들어와 그 무리들이 바다를 덮고, 탄환과 칼날에 찔려 아군은 수 없이 패전하고야 말았다.

왜군은 먼저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곧장 서울로 향하니 조헌이 맨 먼저 일어나 의기를 들고, 고경명과 김천일이 함께 나섰으나 연이어 패하여 삼남이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인심이 물 끓듯 하였다.

이에 장성인 오천 김경수가 금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같은 군의 금강 기효간, 율정 윤진과 함께 장성남문에서 창의하여 격문을 띄워 여러 의사를 모았다.

이에 하곡 정운룡이 장성에서, 사매 이응종이 영광에서, 백곡 김홍우는 고창에서, 은암 이수일은 태인에서, 서석 김언욱은 담양에서, 매죽 김경남․죽헌 김부․송암 홍원은 나주에서, 월촌 정절은 함평에서, 만휴 김억일․퇴우 김해․해옹 김홍원은 부안에서, 함재 기효증과 중림 박경은 광주에서, 붕래 서연은 흥덕에서, 노파 윤황은 무안에서, 집의 유희진은 정읍에서, 참봉 김성진은 무장에서 다투어 일어나 각각 자제와 가솔 그리고 마을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오니 모인 자가 거의 2천명에 이르렀다.

이때에 충정공 이귀가 이 고을 군수로 있어 도와서 성사케 하였다. 이에 단을 만들고 무리에 맹세할 제 김경수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 오봉 김제민이 순창현감으로 웅치의 적을 격파하였는데 소식을 듣고 장성에 와서 합류하니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군대를 통솔하여 서쪽으로 향할 적에 체찰사 정철에게 상서하여 계책을 올리었다.

1592년 7월에 오천 김경수가 장성남문에서 창의하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2천여명의 의병을 모았으며, 김경수가 맹주로 김제민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장성 남문 창의할 당시에 장성현감이 이귀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 당시 장성현감은 백수종이었다. 비문의 글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니 다른 사료들과 대조하면서 읽어야 한다.

직산에 이르러 적을 만나 수십 명을 참살하였다. 홍계훈․김경우․박운․박응춘 등이 왜적을 정탐하고, 김란․오인갑의 활약이 돋보인다. 전진하여 진위에 이르러 또 정탐하는 왜병 13급을 베고 용인으로 진군하였다. 김신남․박안동 등은 군량미를 보급하였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수복하고 승승장구하여 벽제역에 이르렀으나 왜장 소서행장에게 패하였다. 경략(經略) 송응창이 화친을 주장하여 싸움을 금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의사들이 통곡하고 군대를 거두어 돌아와 여산을 지키며 남하하는 적을 막았다.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협상이 진행되자 장성의병은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안타깝다.

함재 기효증이 의곡 수천 석을 모아 수로를 이용하여 의주 행재소에 보내니 선조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엄동설한에 천리를 왔으니 기이한 일이로다.”하였다. 이때 사매 이응종은 영광군수가 친상(親喪)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영광군을 지키니 여러 사람들이 추대하여 그를 장수로 삼았다.

기효증은 의곡장으로서 의주 행재소에 양곡을 전달하고 선조를 알현하였다. 이응종은 영광 수성장이 되어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영광을 지켰다.

계사년(1593년) 5월에 명나라 군대가 다시 남하하니 각 지역 의병장에게 격문을 보내어 흩어진 병졸을 소집하고, 이귀가 정예군을 가려 뽑아 그 이름을 담용군이라 하니 군사의 위세가 더욱 강해졌다. 기이한 계책을 써서 길을 막아 왜적의 첩자 고패(高沛)와 박검동(朴儉同)을 사로잡아 베고, 또 절강병법으로 읍병 3백 명을 훈련하니 응모자가 더욱 많았다. 전진하여 함양에 이르러 진주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의사들이 복수장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 건재 김천일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장성의병은 1593년 5월에 2차로 거의하여 김경수의 아들 김극후와 김극순 등이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고종후와 함께 순절하였다.

정유년(1597년) 8월에 남원의 급보를 듣고 여러 의병장이 장사 1백 여 명을 뽑아 전주에 이르러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고 북상했다. 이 때 김홍우가 명나라 장수 해생과 함께 소사의 적을 크게 물리치니 적도들이 이웃 고을로 도망하였다. 이에 여러 의병장이 추격하여 적 30여명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사람 17인을 빼앗았다. 9월에 군대를 해산하고 귀향하였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자 다시 3차 의병이 일어났다. 3차 의병은 김경수의 사촌 동생인 판관 김신남이 주도하였다.

이리하여 장성의병은 3차에 걸쳐 거의하였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의병 활동을 한 것은 다른 의병활동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에서 장성의병 활동은 매우 돋보인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