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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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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들

1597년 1월에 일어난 정유재란은 1598년 8월에 풍신수길이 죽자 왜군이 철수하였고, 이를 추격한 이순신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11월 19일에 종결되었다.

<남문창의록>에 기록된 제현(諸賢)들 중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들은 여러 부류이다. 김신남과 함께 3차 의병에 참여하여 전투에서 죽거나 남하하다가 순절한 의사, 1597년 8월 16일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사, 1597년 9월 중순이후 왜군이 장성을 초토화하면서 순국한 의사, 그리고 정유재란 기간 중에 죽은 이들이 있다.

먼저 김신남과 함께 3차 의병에 참여하여 전투에서 죽은 이는 김성진, 허상징, 송정춘, 오인갑 등이다. 이들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또한 3차 의병이 장성으로 돌아오면서 순절한 의사는 전서(全瑞 1567~1597)이다. 그는 광주 출신으로 1592년에 의병 수십 인을 모집하여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의병장 김제민을 따라 직산에 이르러 적을 만나 대파하였다.

정유재란 때 그는 김신남을 따라 안성지방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고 남하하다가 장성 노령에서 적을 만났다. 그는 많은 왜적을 사살하고 힘이 다하여 목이 말라 샘물을 떠 마시려 할 때 적이 역습하여 순절하였다.

다음으로 1597년 8월 16일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의사는 김부와 최보의이다. 이 두 사람은 남원 만인의총 내 충렬사에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김부(金溥 1569~1597)는 나주 사람으로 159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훈련정 벼슬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그는 김경수 등과 함께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나주의 모의도유사(募義都有司)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그는 금성유진장으로 병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갔는데 성이 함락되던 날 왜적과 싸우다가 병사 이복남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 당시 김부의 아내 임씨는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영암 노진에 이르렀을 때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씨는 품고 있던 아이를 여종 연금(延今)에게 맡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보살펴서 김씨 집안의 맥을 이어다오. 나는 깨끗한 몸으로 돌아가 내 남편을 만나겠다.”고 하면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아들 효선(孝善)이 장성하자 그는 남원성 순절지와 영암 노진에 여막을 짓고 6년을 지냈다. 나라에서 충․효․열이 있다 하여 그에게 참봉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효선은 죄인을 자처하고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최보의(崔寶義 1547~1597)는 정읍 출신으로 남원성 전투에서 아버지 최준(崔准)과 함께 참전하여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김경수 등이 장성남문에서 거의할 때 의병과 군량 등을 모아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고, 1차 의병 시 용인까지 진격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8월 중순에 최보의의 아버지 최준이 교룡산성 별장 신호를 따라 남원성에 들어가자 최보의도 같이 성에 들어가 부친을 도왔으나 아버지가 순국하였다. 그는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적진에 돌입하여 왜적 수십 급을 사살하였으나 순절하였다. 최보의는 남원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다.(남원 만인의총 관리사무소 홈페이지 자료 참조)

그런데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에는 최보의에 관한 기록이 다소 다르게 나와 있다. 여기에는 “최보의는 정유재란 때 아버지 최준(崔淮)이 교룡산성 별장 신호를 따라 남원성에 돌아갔고 최보의도 같이 성에 들어가 힘껏 부친을 도왔으나 아버지가 순국하였다. 그는 원수를 갚고자하여 칼을 빼들고 적진에 돌입하여 수십 급을 사살하였고, 나중에 의병장 김신남을 따라 안성에서 왜노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사항은 고증이 필요한데, 최보의가 8월 16일 남원성 전투에서 싸운 뒤에 곧바로 장성의병에 합류하였다는 점은 다소 의심이 든다.

세 번째로 1597년 9월 중순 이후 왜군이 장성을 초토화하면서 순절한 의사는 장성 입암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윤진, 이경국과 이안국 등이다.

율정(栗亭) 윤진(尹軫 1548~1597)은 김경수, 기효간과 함께 장성 남문 창의를 주도하고 격문을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593년에 장성 입암산성을 중수할 적에 축성 책임자가 되어 입암산성에 포루(砲樓)를 설치하고 창고를 세우는 등 요새를 만들었다.

1597년 9월에 왜적이 호남 일대를 누비자, 그는 의병 수 백인을 모아 주야로 입암산성을 지켰으나 성은 함락되고 말았고 홀로 끝까지 싸우다가 왜적의 칼에 전사하였다. 부인 권 씨는 권벽의 딸이고 시인 권필(1569~1612)의 누나였다. 그녀는 윤진이 전사하자 왜적에게 욕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살하였다. 윤진은 봉암서원에 배향되었고, 권부인은 정려되었다.

이경국(李敬國 1549~1597)은 정읍 출신으로 입암산성에서 윤진과 함께 성을 지키다가 아우 안국과 같이 전사하였다. 그의 부인 여산 송씨도 뒤를 따라 자살하였다. 이안국(李安國 1553~1597)은 입암산성에서 윤진과 형 이경국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유재란 중에 순절한 의사들도 여럿 있다.

먼저 정읍출신 유희진․유희사․유희문 형제이다. 이들은 1592년에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의병장 김제민 등과 함께 직산 지방에서 많은 적을 죽였다. 1597년 11월에 정읍 북쪽 남나령(南羅嶺)에 모여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아직 출발하지 못하였는데 적들이 기습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3형제 모두 순국하였다.

유경인(柳景仁 1558~1597)은 정읍 출신으로 재종되는 유희진, 유희사 등과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정유재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그는 재종 유희문, 유희사 등과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고 고을 청년 수백인과 가동 오십 여명을 모집하여 요새지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편을 담당하고 병력을 우치 아래로 이동하였다. 그때 적들이 몰려오자 유경인은 적 수십 급을 베였다. 그 후 물러난 왜적이 다시 합세하여 공격하여 왔다. 그는 더욱 용감하게 싸웠지만 적의 탄환에 죽으니 이 날이 1597년 10월 3일이었다.

다음으로 정절(1536~1597)은 함평 출신으로 1592년에 의병장 김제민과 직산에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9월에 60세의 정절은 90세 노모가 생존하고 계시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업고 처자를 거느리고 피난길에 나서 법성포에서 배를 타고 칠산 앞 바다에 이르렀다. 그때 정절 일행은 많은 적선을 만나 어머니 이씨와 처자 김씨, 자부 이씨, 그리고 친족 부인, 다수 부녀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는 호인(好仁), 호례(好禮) 두 아들과 함께 왜적에게 사로잡혀 강박을 당하였다.

정절은 왜적을 꾸짖으며 “지난날 직산에서 너희들을 섬멸하지 못한 것이 나의 한인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짐승만도 못한 놈들 앞에 무릎을 꿇으랴”하니 왜적이 칼을 뽑아 왼편 팔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말하기를 “천만번 살을 찢는다 해도 굴복할 수 없다.” 하니 왜적은 화가 치솟아 오른편 팔을 다시 치고 정절을 죽였다.

김명(金溟 1571~1597)은 나주 출신으로 김부의 아우로서 1592년에 김부를 따라 창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김부가 출전하자 그는 처 이씨 그리고 형수 임씨와 같이 무안 몽탄을 지나다 적을 만나 죽었다. 부인 이씨도 김명이 죽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윤황(尹趪 1562~1597)은 무안 출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1차 의병에 나가서 직산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그런데 그는 1597년에 영광 칠산에서 순절하였다.

3차 의병장 김신남(1552~1598)은 1598년 8월에 순절하였다. 김신남은 1598년 8월에 명나라 유정이 전라방어사가 되어 서로(西路)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돕고자 아들 사원․사근과 같이 향병을 모집하여 남원에 이르러 운봉에서 적과 마주쳤다. 그는 수일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죽으니 그 날이 8월 26일이었다.

한편 홍계훈은 순절한 해가 기록마다 다르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에는 정유재란 때 의병장 김신남을 따라 출정하여 안성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에는 복수의병장 고종후와 함께 1593년에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의사로 되어 있다. 이 두 기록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남문 창의 제현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중에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장성 사람들도 있다. 송약선과 변윤중이 그들이다. 청백리 송흠의 4대손 송약선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봉암서원에 배향된 변윤중(1548~1597)도 가솔들과 마을 젊은이 200여명을 모아 왜적과 10일 넘게 싸우다가 9월 18일에 죽었다.

왜적들은 장성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문화재를 약탈하고 사찰․서원․정자 등을 불 질렀다. 하서 김인후의 손자며느리인 기씨 부인과 박씨 부인, 변윤중의 부인 성씨와 며느리 서씨 부인 등도 정절을 지키다가 죽었고, 송약선의 부인도 송약선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살하였다.

정유재란 때 장성은 피해가 극심하였다. 인구가 크게 줄고 농토가 황폐하여졌다. 그리하여 1600년 초에 장성현과 진원현이 합쳐졌다.

앞으로 ‘정유재란과 장성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정유재란 중 장성 사람들의 충․효․열을 재조명하는 것은 ‘의병의 고장 장성’을 더욱 알리는 길이 될 것이다.

사진 3차 장성의병을 이끈 판관 김신남의 묘소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