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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차 장성의병, 안성에서 왜군을 무찌르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40회 3차 장성의병, 안성에서 왜군을 무찌르다.

1597년 8월 16일의 남문일기를 계속하여 살펴보자.

김경수는 남원의 급보를 듣고 바로 남문에 나가 사람을 보내 사촌동생 김신남을 불렀다. 김경수는 울면서 말하기를 “두 자식이 전사한 후부터 밤낮 공사(公私)의 원수 갚을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내 마음과 힘을 헤아려 볼 때 하루살이를 시켜 나무를 흔들게 하고 사마귀를 몰아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일편단심은 주야로 울분을 내뿜고 있으니 그대와 함께 도모하기를 원한다.”하였다.

여기에서 두 아들은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한 김극후와 김극순을 말한다. 김경수는 두 아들이 죽은 이후 슬픔과 분노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경수의 말에 김신남이 대답하기를 “우리 형님의 뜻을 아우가 어찌 모르겠습니까.”하고, 같이 남문 밖으로 나가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이르기를 “두 번 의거하였으나 실패만 있고 성공이 없었으니 동지들의 마음에 누가 죽음을 원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김신남은 다시 의거하기로 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낸다. 오암(鰲庵) 김신남(金信南 1552~1598)은 김경수의 셋째 큰아버지 김응삼의 아들이다. 그는 사촌형 오천 김경수와 창의하자는 논의를 하고 장성남문 의병청 설치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1592년 12월 1차 의병 시 의병을 인솔하고 안성지방에서 전공을 크게 세웠다. 1593년 6월에 또 다시 김극후․김극순과 진주 싸움터에 들어갔다가 군량과 무기를 모으려 잠시 전라도로 돌아오는 도중에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번의 의거는 조카 김극후와 김극순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도 상당부분 작용하였다. 8월 17일에 김신남은 하인과 의사(義士) 200인을 인솔하고 전주에 도착하여 여러 고을의 의병과 군량을 불러 모았다. 김신남은 다른 의사들이 장성으로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전주로 달려갔다. 그만큼 전세는 위급하였다.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진격 중이었다.

8월 18일에는 고창의 김홍우가 명나라 장수 해생 등의 접반사로 아우 광우, 덕우를 보내고 의사 100인을 인솔하고 와서 합세하였다. 김홍우는 1593년에 고창현감 정운룡이 임소에서 별세하자 임시로 발령된 관원을 도와 고창을 사수하는데 공로를 세웠고,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제수되었다. 1596년에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의병을 모아 장성의병과 합류하였다. 한편 김홍우가 아우 김광우와 김덕우를 명나라 진영으로 파견한 것은 장성의병이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겠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이어서 장성 출신 김중기와 박안동, 부안 출신 김세 등도 의사 300여인을 인솔하고 와서 합세하였다.

8월 19일에 군오를 점검하였다. 김국서, 박성, 김익웅, 김무철 등이 와서 합세하고, 김성진이 의사 57인과 군량 12섬, 예환 등 물건을 가지고 와서 합세하였다.

그런데 김익웅은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p290)에는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아들 김덕생도 부친 김익웅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싸우다가 1593년에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무철도 마찬가지이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p291)에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익웅과 김무철에 대하여는 자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역사는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

8월 20일에 장성의병은 전주를 떠나서 진군하여 여산에서 숙박하였다.

8월 25일 장성의병은 안성에 진군하였다. 이때 김홍우가 해생 등을 따라 소사에서 왜적을 대파하니 왜적들이 흩어져 이웃 고을로 들어갔다.

그런데 8월 25일에 김홍우 등 김신남의 장성의병이 안성에서 명나라 부총병 해생과 함께 싸워 왜적을 대파하였다는 것은 그 시기가 맞지 않는다. 명군과 왜군이 싸운 소사전투는 9월 7일에 일어났다.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소서행장은 8월 18일에 전주에 무혈입성하였고 가등청정이 이끄는 왜군도 25일에 전주에 들어왔다. 왜군 11만 명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9월 3일에 공주를 점령하고 천안으로 진군하였다. 왜군 가운데 모리와 가등청정의 군대는 전주, 공주를 거쳐 전의, 진천에 이르고, 다시 일부인 흑전장정의 부대는 직산에 이르렀다.

9월초에 명나라 경리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으로 하여금 남하하여 진격하도록 명하였다. 9월 7일 동틀 무렵에 직산 소사 벌판 금오평에서 명나라 해생과 일본의 흑전장정은 일대 격전을 벌였다. 그들은 여섯 번 싸웠다. 마침내 왜군이 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왜군은 서울로 북상하지 못하고 다시 남하하였다. 더구나 9월 16일에 일본 수군이 명량에서 이순신에 의해 패전하자 왜군은 북상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를 보면 김신남, 김홍우 등 장성의병이 명나라 해생이 이끄는 소사 전투에 참전한 것은 사실이나 <남문일기>에 적힌 8월 25일은 잘못된 기록인 것 같다.

8월 27일에 김신남 등은 왜적을 맞아 싸워 대파하고 32명을 목 베고 왜적의 칼 3자루를 빼앗고 포로 된 남녀 17인을 구출하였다. 김성진 등은 이후 적을 추격하여 격파하다가 힘을 다해 죽음을 당하고 아군의 전사자 역시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를 보면 아군과 왜군간의 전투가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군은 왜적을 32명 죽이고 포로 17명을 구하였으나 아군도 100여명의 전사자가 생겼다. 의병이 600여명인데 1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은 상당한 손실이었다.

한편 안성 전투에서 김성진, 허상징, 송정춘, 오인갑 등도 순절하였다. 이는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에 나온다.

김성진(金聲振 1564~1597)은 고창 출신으로 1592년 1차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장 김제민과 함께 직산에서 왜적 수십 급을 베는 등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의병에 참가하여 김신남과 함께 적을 추격하여 안성을 지나 소사에서 적 32급을 사살하였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순절하였다.

허상징(許尙徵 1571~1597)은 정읍 출신으로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육도삼략을 익혀 조헌이 칭찬하였고, 조헌은 그의 집을 도암당(道菴堂)이라 하고 글씨를 써 주었다. 장성에 의병청이 설치되자 그는 제일 먼저 군량과 가동 및 정복남 등 수십 인을 인솔하고 의병장 김제민의 선봉장이 되었다. 정유재란시도 명나라 장수 해생(解生)과 합병하여 소사에 있는 적을 공격하던 중 적에게 사살되어 순절하였다.

송정춘(宋廷春)은 김제 출신으로 1592년에 장성 의병청에 많은 의병과 양곡을 모았고 정유재란 때 안성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오인갑(吳仁甲 1563~1597)은 광주 출신으로 1586년에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1592년에 김경수의 격문에 호응하여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고 1차 전투에도 참가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 안성에 진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힘이 다하여 몸이 불에 탄 채로 순절하였다.

이렇게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김신남이 이끄는 3차 의병은 9월 10일에 파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천 김경수는 반갑게 김신남을 맞이하였다. 그는 김신남이 안성에서 왜적과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진주성에서 순절한 두 아들을 생각하였으리라.
그리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시는 진주 남강 물에 떠돌고 있을 두 아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대한 진혼가이다.

“종제 판관 김신남이 안성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다하여 안성싸움 이겼으니
진주 물가에서 평온치 못하여 떠도는 두 영혼을 위로하노라.

聞從弟判官信男安城破賊
安城一捷誠多力 안성일첩성다력
晉水雙魂慰不平 진수쌍혼위불평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