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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경수,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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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김경수,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597년 1월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제1진으로 가등청정,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1만4천5백 명이 부산에 상륙하였다. 7월 16일에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거제도 근처의 칠천량에서 전멸하였고, 8월 16일에는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여기에서 1597년 8월 16일의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김경수가 남원의 급보를 듣고 바로 남문에 나가 사람을 보내 종제 김신남을 불러와 울면서 말하기를 “두 자식이 전사한 후부터 밤낮 공사(公私)의 원수 갚을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내 마음과 힘을 헤아려 볼 때 하루살이를 시켜 나무를 흔들게 하고 사마귀를 몰아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일편단심은 주야로 울분을 내뿜고 있으니 그대와 함께 도모하기를 원한다.”하였다.

김신남이 말하기를 “우리 형님의 뜻을 아우가 어찌 모르겠습니까.”하고, 같이 남문 밖으로 나가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이르기를 “두 번 의거하였으나 실패만 있고 성공이 없었으니, 동지들의 마음에 누가 죽음을 원하지 않으리오.”하였다.

여기에서 남원의 급보는 바로 남원성 함락을 말한다. 명나라 총병 양원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4천명의 조명 연합군은 우희다수가와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5만6천명의 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참패하였다.

그러면 이때까지의 정유재란 상황에 대하여 알아보자.

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에 4년 여 간에 걸친 강화교섭은 완전히 깨어졌다. 풍신수길은 ‘명나라 황제가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국서를 보고 분노하여 다시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그간 풍신수길은 명나라에 7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은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후궁으로 보낼 것 (2) 일본 무역선의 왕래를 보장할 것 (3) 조선 팔도를 분할하여 경상도, 전라도 등 네 개 도는 일본 영토로 줄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협상이 깨지자 풍신수길은 일사분란하게 조선 재침략 작전을 진행한다. 군대를 1번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2만1천명을 동원하였다.

한편 풍신수길은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 한 것과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풍신수길은 치밀하게 작전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가장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공격을 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먼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제거 계획부터 세운다. 즉 반간계를 쓴다. 왜장 소서행장은 통역관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보내어 밀서를 전달하여 가등청정이 상륙하는 정보를 흘린다. 1월 21일에 경상도 위무사 황신은 한산도에 가서 이순신에게 임금의 명을 전하고 즉시 출정 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았다. 1차 간계에 실패한 일본 측은 다시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어 이순신 때문에 일을 망쳤다고 말한다. 김응서는 즉시 이순신이 명령을 받고도 출동하지 않아 일을 망쳤다고 조정에 아뢴다. 선조는 분노하여 의금부 도사를 시켜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한다. 2월말에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서울로 끌려온다.

3월 12일에 이순신은 한 차례의 고문을 받는다. 3월 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의 죄상을 논하면서 이순신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선조가 말한 이순신의 죄목은 세 가지이다. 즉 (1)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긴 죄, 즉 부산왜영 화재 사건의 허위보고, (2)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즉 수군이 출전하지 않은 죄, (3) 남의 공로를 빼앗고 남을 무함한 죄, 즉 원균의 공을 이순신이 가로챘다고 하는 죄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죄가 가장 중하였다.

이 때 72세의 원로대신 정탁이 이순신의 구명에 나섰다. 그는 소위 신구차(伸救箚)라고 불리는 1천298자에 달하는 장문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린다. 이러한 원로대신의 상소를 읽은 선조는 이순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원수 원균의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4월 1일에 이순신은 옥에서 풀려난다. 하옥된 지 28일 만이었다. 4월 13일에 이순신은 아산에서 어머니 변씨 부인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4월 19일에 이순신은 모친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6월 4일에 도원수 권율의 원수진이 있는 경남 합천군 초계 모여곡에 도착한다.

한편 조선 수군은 이순신을 대신하여 원균이 지휘하게 된다. 그런데 원균은 한산도 운주당에서 애첩을 끼고 술에 취하여 전쟁 준비에 소홀하였다. 마침내 7월초에 왜군 수군 6백 척이 부산에 나타났다. 권율은 원균에게 전투를 명령하였다. 원균은 직접 나서지 않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전투를 하라고 하였다. 배설은 전선 수십 척을 잃고 물러났다.

화가 난 권율은 원균을 도원수 진영으로 불렀다. 그리고 볼기를 치면서 직접 싸움에 나서지 않은 것을 문책한다.

7월 중순에 원균은 권율에게 볼기를 맞은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수군 전 병력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향한다. 군졸들은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다시 전투에 임한다. 7월 12일에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3일에는 옥포에서 이틀 밤을 지낸 다음, 14일에 부산에 이른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조선 함대는 마침 일본에서 나온 왜선 1천 여척과 마주쳤다. 원균은 왜선을 좇았다. 그런데 왜군은 접전을 회피한 채 도주하였고 이후 왜군은 급습을 하며 조선수군을 괴롭혔다.

지친 조선함대가 칠천도에 도착한 것은 15일 밤 9시경이었다. 원균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왜군은 함선 500여척을 칠천량에 배치시켰다.

원균은 밤늦게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원균은 왜군의 기세가 너무 커서 당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한탄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원균의 지시에 대해 경상우수사 배설은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하는 전략이 타당하다고 말하였다. 배설의 말을 듣자 원균은 노하여 “죽고 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배설에게 고함쳤다. 이에 배설은 자기 배로 돌아가서 은밀히 소속 장수와 더불어 퇴각할 것을 꾀하였다.

16일 새벽이 되자 왜군은 500여척으로 조선 수군을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총 공격을 하였다. 조선 수군도 닻을 내린 가운데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어서 왜군은 일본 배 5~6대로 조선 배 1대를 포위하고 조선 배에 올라와 육박전을 벌이었다. 왜군은 상대적으로 높은 판옥선에 오르기 위해 배의 돛대를 눕혀 사다리로 사용하여 기어 올라왔다. 육박전은 왜구들이 사용하는 전술로서 이는 왜군들의 주특기였다.

본격적으로 백병전이 벌어지자 조선수군은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배설이 자기 휘하의 전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고성 방면으로, 원균의 전라좌수군은 추원포 쪽으로 퇴각하였는데 모두 죽고 말았다.

이렇게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왜군은 울산 죽도성에서 회의를 열고 작전계획을 세운다. 소서행장의 군대는 섬진강을 지나 남원성을 점령한 후 전주로 가고, 가등청정의 군대는 초계, 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8월초에 5만6천명의 일본 육군과 수군은 남원으로 진격을 한다. 총대장은 우희다수가, 선봉장은 소서행장이고, 장수들은 도진의홍등이었다. 또한 일본 수군도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소서행장이 이끄는 육군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 구례로 진격하였고, 일본 수군은 8월 3일에 두치진(전남 광양시 다압면 소재)에 들어왔다.

8월 7일에 왜군은 구례를 점령하였다. 구례·곡성 지역은 아수라장이었다. 8월 12일에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이 장사 50명과 수 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8월 13일부터 8월 16일까지 4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명나라 총병 양원은 5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전라병사 이복남이 거느린 조선군은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정말 잔인하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다. 코는 전리품의 상징이었다. 이는 풍신수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남원성 전투를 종군했던 일본 승려 쿄넨은 8월 16일자 조선일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편찬한 이수광(1563~1628)은 다음 시를 지어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들을 위로하였다.

외로운 성에 피비(血雨)가 날리던 옛일을 생각하니
서생(書生)은 겹겹 포위망을 깨뜨릴 힘이 없었네.
지금 남은 자리엔 가을 풀만 쓸쓸한데
흐르는 눈물이 석양의 나그네 옷 적시는구나.

憶昔孤城血雨飛
書生無力破重圍
至今遺跡空秋草
淚入斜陽濕客衣

사진 : 남원성 , 남원 만인의총 내 충렬사 사당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