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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주성에서 순절한 장성의병들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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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진주성에서 순절한 장성의병들 - 김극후, 김극순, 김인혼, 김언희 등 11명

1593년 6월 29일의 남문일기에는 “김언희가 적진에 돌입하여 수십인의 목을 베고 힘이 다해 죽음을 당했고, 성이 함락되자 김극후 등 20여명도 서로 밀어 물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장성남문 의사(義士)들을 알아보자. 이들은 김극후․김극순 형제, 김인혼, 김언희, 서홍도, 서정후, 김무철, 김익웅과 김덕생 부자, 홍계훈, 박운 등 11명이다.

먼저 김극후(金克厚 1562~1593)이다. 그는 맹주 김경수의 큰 아들로 음사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김극후는 장성 남문창의 때 아우 극순과 같이 아버지 김경수를 도왔고, 2차 의병 시 진주성에 들어가서 고종후와 같이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김극후의 아우 김극순(金克純 1567~1593)은 김경수의 둘째 아들로 강개한 절개가 있다하여 교관에 제수되었다. 그는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부인 정씨는 고창현감 정운룡의 딸인데 공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마을 앞 저수지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장성군 북하면 부귀촌에 있는 오천 김경수 묘소 가는 길목에는 김극후와 김극순의 단비가 세워져 있다. 진주성에서 순절하여 묘소가 없이 단비만 세워져 있다.

김인혼(金麟渾 1560~1593)은 김경수의 족제로서 진주성에 이르러 고종후의 참모가 되었다.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그는 고종후․김극후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김언희(金彦希 1562~1593)는 담양 출신으로 형 김언욱과 함께 장성 의병에 참여하였다. 김경수의 문인인 그는 김극후 등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서 왜군과 싸웠다.

그는 길게 봉재한 왜적의 옷을 입고 밤에 적진에 들어가 창검과 화살을 가지고 왔는데 돌아올 때까지 왜적이 알아보지 못하였다. 성이 함락함에 그는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칼을 휘둘러 적을 참살하다가 힘을 다하여 말위에서 순절하였다.

<호남절의록>에는 김언희는 김인혼, 서홍도 등과 함께 ‘고종후와 함께 순절한 제공사실’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복수의병장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 20명을 목 베는 용맹을 보였으나 끝내 적의 손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홍도(徐弘渡 1543~1593)는 고창 출신으로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아우와 이별하면서 “이제 나는 내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나의 본심이다. 다행히도 너희들이 있어 노모를 봉양하고 집안 식구를 보호하여 집안 혈통을 이어주기 바란다.”하고 힘을 합하여 진주성을 지켰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서정후(徐廷厚)는 남평 출신으로 일찍이 창의사 김천일의 종사관이 되었다. 1592년 8월 21일에 김천일의 친서를 가지고 장성에 와서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전라도를 왕복하였다. 이후 김천일과 같이 강화를 지키고 있었는데 1593년 4월에 서울에 있던 왜군이 퇴각하자 그 뒤를 쫓아 진주에 이르러 병사 최경회, 황진 그리고 복수장 고종후, 장윤, 강희열 등과 성문을 나누어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여러 장병들과 같이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김무철(金武哲 1553~1593)은 나주 출신으로 동향의 김부(金傅) 등과 함께 의사와 의곡을 모아 의병장 김제민을 따라 1차 의병에 참가하여 직산에 이르러 많은 적을 참살하였다. 1593년 가동과 의곡을 이끌고 김극후를 따라 2차 의병에 참여하였는데 진주성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한편 1597년 8월 19일자 남문일기에는 “군오를 점검하였다. 김국서, 박성, 김익웅, 김무철 등이 와서 합세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p291)에는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김무철에 관한 기록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것 같다. 자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김익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597년 8월 19일자 남문일기에는 “군오를 점검하였다. 김국서, 박성, 김익웅, 김무철 등이 와서 합세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p290)에는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익웅(金翼熊 1537~1593)은 호가 월포(月圃)로서 함평 출신이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정철, 노진, 기대승과 교분을 맺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부, 홍원 등과 함께 아들 덕생을 데리고 장성 의병청에 달려갔다. 김제민을 따라 1차 의병에 참여하여 직산에서 적을 사살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3년에 그는 김천일과 같이 서울에 들어가서 능묘를 수위하기도 하였다.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김천일과 같이 남하하여 진주성에 들어갔는데 왜군과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p299)에는 김익웅의 아들 김덕생이 1593년에 순절한 기록이 나온다.

김덕생(金德生 1566~1593)은 김익웅의 아들로서 임진왜란 때 아버지 김익웅을 따라 장성의병청에 참여하였다. 1593년 부친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부친은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위하여 죽지 못할 것인가 군부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다.”하여 몸소 가동과 군량 등을 모아 김억추와 같이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적에게 죽었다.

이를 보건대 김익웅이 1593년에 순절한 것이 맞다. <남문일기>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한편 홍계훈도 순절한 해가 기록마다 다르다. <호남절의록>에는 1593년으로,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에는 1597년으로 되어 있다.

먼저 <호남절의록> ‘고종후와 함께 순절한 제공 사실’부터 살펴보자.

강진 사람 홍계훈은 장성 남문 창의에 참여해 강진 소모유사로 활동했다. 그는 집안 하인 80명과 의병 수백명, 곡식 70석을 모아 장성 의병청으로 보냈다. 이후 홍계훈은 고종후를 따라 달천에 이르러 적진에 들어가 왜적 20명의 목을 베었다. 그 때 그의 세 손가락이 활시위에 닿아 끊어졌는데 사람들은 그를 칠지의사(七指義士)라 했고, 진주성에서 적장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음은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이다.

홍계훈(洪繼勳 1538~1597)은 정유재란에 또 다시 의병장 김신남을 따라 의병을 모집하여 같이 안성으로 가 왜적 10여인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종 복선이 말고삐를 잡고 만류하여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한데 어찌 피신하지 아니 하십니까’ 하자 공은 칼을 뽑아 종의 팔을 끊고 적진에 돌입하였다. 말을 달리며 활을 쏘면서 좌충우돌할 때 세 손가락이 활 시위에 부딪쳐 절단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칠지의사(七指義士)라 하였다.

그는 끝내 20여 군데나 창을 맞고 힘이 다하여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무슨 낯으로 조상을 보리여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 전에 그는 왜적의 공격을 받아 순절하였다. 공의 처 최부인은 남편의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과부 며느리 김씨와 한 날 목을 매고 죽었다.

따라서 홍계훈에 대하여는 관련 기록들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함을 느낀다.

박운의 경우도 정확한 기록이 요구되는 경우이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제현사실’에서 박운의 생몰연도는 1537년에 태어나 1597년에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는 1593년에 진주성에서 순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현 사실’ 기록 자체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의 ‘김천일과 함께 순절한 제공 사실’에는 박운이 진주성에서 순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박운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것은 분명하다.

장성 출신인 박운은 1592년 11월 1차 의병 시 의병장 김제민을 따라 안성지방까지 진군하여 왜적을 정탐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3년에 그는 겸사복으로 또 다시 가동을 이끌고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진주성에서 적진에 돌입하여 창검과 화살을 빼앗아 본진으로 돌아 왔으며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공의 아내 이씨는 남편이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자살하였다.

기록은 정확하여야 한다. 오기가 없어야 한다. 또한 기록은 한 군데에 만 의존할 일이 아니다. 여러 기록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도 필요하다. 이런 일들을 제대로 하는 일이 바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참고문헌>
o 김경수, 국역 오천집, 동아고전연구소, 1961
o 김동수,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 온새미로, 2013
o 오산창의사,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 호남문화사,1997
사진 1. 오천 김경수 묘소
2. 김극후․김극순 단비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