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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극후와 김극순 등 장성의병,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37회 김극후와 김극순 등 장성의병,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 보자.

6월 21일 적의 모든 병력이 성을 에워싸니 김극후 등이 좌우의 의병장과 함께 힘을 다해 항거하므로 왜적은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6월 29일 큰 비가 내려 성의 동쪽 한 모퉁이가 무너지자 적들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므로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크게 무너지니 김언희가 적진에 돌입하여 수십 인의 목을 베고 힘이 다해 죽음을 당했다. 김천일․고종후․최경희 등이 함께 강에 몸을 던져 죽으니 김극후 등 20여명도 서로 밀어 물에 몸을 던졌다. 드디어 성이 함락되었다.

이를 보면 <남문일기>는 진주성 싸움이 시작된 6월 21일과 진주성이 함락된 6월 29일의 기록만 적혀 있다. 진주성이 함락한 날 김언희는 왜적 수 십 인을 죽이고 힘이 다해 순국하였고, 김극후 등은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제2차 진주성 싸움의 전말을 알아보자.

왜군 10만 명이 파죽지세로 진주로 진군하고 있어도, 명나라와 조선의 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에 있는 명나라 이여송 제독은 유정․오유충․낙상지 등에게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토록 지시하였으나, 현지에 있는 명나라 장수들은 적의 형세가 막강함을 두려워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6월 19일에 전라병사 선거이․경기도 조방장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김천일에게 말하기를 “적의 군사는 엄청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어 군사 수가 크게 차이가 있으니 잠깐 물러나서 몸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김천일이 크게 노하며 꾸짖었다. 그는 “호남은 우리나라의 근본이요, 진주는 실로 호남의 방패이니,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이는 바로 호남을 없애는 것이다” 하고,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사수하기를 다짐했다. 이러하자 선거이 등은 군사를 끌고 전라도 운봉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상주목사 정기룡이 상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유격 왕필적과 함께 진주성에 당도했다. 김천일은 예를 표한 뒤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6월 20일 이른 아침부터 성안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적군의 선봉 기병 200여 명이 진주성 외곽 마현에 나타나 진주성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성안에서는 복수의병장 고종후의 선봉장 오유와 적개의병 선봉장 이잠이 뛰쳐나갔다. 한참 있다가 이들은 적병의 목을 말안장에 차고서 돌아왔다. 성안의 군사들은 환호했다.

이를 본 명나라 왕필적과 상주목사 정기룡도 감탄하면서 의기가 대단함을 치하했다. 왕필적은 “유총병의 군사가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했으니 경들은 잘 방어를 하라”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는 이후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밤에 양산숙이 남강을 통해 간신히 성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김천일은 양산숙을 상주에 있는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은밀히 보냈다.

김천일은 조급히 유정을 만난 결과를 묻자 양산숙은 침울하게 말했다. “유총병에게 고종후 복수의병장이 써 준 글을 읽어 드렸더니, 유정은 문장 마다 힘이 넘쳐나고 곧은 기개가 서려 있어 탄복했습니다. 심지어 유정은 글을 들으면서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고쳐 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유정은 지원군을 보내기는 어렵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일본과 명나라 간에 강화협상이 진행 중인 데다가 진주성을 쳐들어오는 왜적의 기세가 너무 커서 군사를 출동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주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어도 명군도 조선군도 어느 한 사람 도와주지 않았다.

<남문일기>의 기록처럼 제2차 진주성 싸움은 6월 21일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날 왜군 선봉대 기병 200명이 척후활동을 시작했다. 척후병은 마현 봉우리 위에서 활동하더니, 조금 뒤에 10만 명 대군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그런데 탄알 한 발 쏘지 않고 위세를 보인 뒤에 물러갔다.

6월 22일에 왜군의 첫 공격이 시작됐다. 아침 10시부터 왜군 10만 명이 일제히 밀려왔다. 개경원 산 중턱에 진을 친 가등청정이 이끄는 1진과 향교 앞길에 있던 소서행장의 2진이 동시에 쳐들어왔다.

첫 교전은 아군의 승리였다. 아군은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왜군들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돼서야 물러갔다.

6월 23일도 왜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낮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다. 이 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의 군사 300여명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왜군의 세력에 놀라서 다시 고성으로 물러갔다.

6월 24일에 왜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와서 마현에 진을 치고 또 5~600명이 더 와서 동편에 진을 치고 치열하게 싸웠다.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6월 25일이다. 왜적은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순성장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직접 옷과 전립을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도 힘을 다해 축조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완성됐다. 이에 현자총통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부쉈으나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 날도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접전해 4번 다 물리쳤다.

6월 26일에 왜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군사들이 큰 나무 궤짝 위에 짐승 가죽을 입힌 뒤 그것을 방패삼아 성벽 밑으로 육박해 성을 헐려고 했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 내려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을 만든 뒤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 불화살이 성안의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했다. 황진도 마주 보고 나무를 세우고 판자 집을 만든 뒤 대포를 쏘아 왜군의 판옥을 무너뜨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 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6월 27일 전투가 1주일 되는 날이다.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대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그 위에서 총탄을 발사했다. 성안의 군사 300여명이 전사했다.

또 왜군은 귀갑차를 이용해 성 밑으로 접근해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왜군이 퇴각했다.

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김천일은 장윤을 임시로 목사에 임명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왜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글은 ‘대국의 군대도 항복했는데 너희 나라가 어찌 감히 항거하는가. 온 백성이 성안에서 일시에 모조리 죽음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 아닌가. 항복하면 생명은 보장해 주마’라는 내용이었다. 성 안에서 곧 답을 보냈다.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 30만명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해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답장을 보고 왜군은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명군은 이미 다 물러갔다’ 했다.

6월 28일에 왜군은 더욱 공세 수위를 높였다. 적이 다시 북문을 침범해 성문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곳은 진주목사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성을 뚫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장차 무너지려 했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김해부사 이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해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물리쳤다. 황진이 순찰차 이곳에 이르렀다가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명은 되겠다.”고 했다.

이 때 왜군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쐈는데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황진은 용맹과 지략이 으뜸이어서 그를 믿고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사기가 저하됐다. 이 날 황진의 죽음을 조문하는 듯 장맛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6월 29일 최후 순국의 날이었다. 황진이 죽자 진주목사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다.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혼이 빠져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 최경회가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해 그를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순성장을 맡겼다. 장윤은 명망이 황진 다음 가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윤마저 분전 중에 탄환에 맞아 죽었다.

오후 1~3시경에 왜군이 동문 성벽의 기초 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왜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기어올랐고 이어서 서문과 북문도 뚫렸다. 창의사 김천일 부대가 사력을 다했지만 버텨내지 못했다. 드디어 왜적은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해 피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김천일은 꿋꿋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겠다.”하고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 때 최경회는 죽음 앞에서도 삼장사 시를 읊었다.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곁에 있던 김극후 등 장성의병 20여명도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한편 이종인, 이잠, 강희열 등 10여명은 장검을 뽑아 들고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했다. 목사 서예원 및 판관 성여해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며, 여러 장령(將領)들도 다 죽었다. 성안의 백성들도 앞을 다퉈 남강에 투신해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 명이나 됐고, 진주성은 온통 폐허가 됐다.

9일간의 진주성 혈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명나라와 관군이 버린 진주성을 호남의병과 몇 지역의 경상관군이 사수했지만 버틸 수 없었다. 병력만도 무려 10대 1이었으니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투였다. 이 싸움은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던 버마재미 한 마리가 수레바퀴를 밀어내려 한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진주성은 왜 함락되었나 하는 점이다. 1592년 10월의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큰 승리를 하였는데, 1593년 6월 싸움에는 왜 패하였을까.

그 원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중과부적(衆寡不敵), 고립무원(孤立無援), 단결부족이 그것이다.

첫 번째 패전 원인은 중과부적이다. 왜군은 1차 싸움 때는 2만 명 이었는데 2차 싸움에는 10만 명이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1차 때는 3천800명 2차의 경우는 6천명 정도였다. 이러한 현저한 병력차이는 처음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고립무원이다. 1차 싸움 때는 진주성 안의 병력뿐만 아니라 성 밖에도 지원군이 많았다. 최경회, 임계영 등 호남의병도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요청으로 진주로 달려왔고,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 경상의병장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2차 싸움 때는 진주성 근처까지 온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위세에 눌리어 아예 후퇴했고, 명나라 군사도 관망으로 일관하였다.

용맹스럽다던 경상의병장 곽재우마저 사지에서 부하를 죽일 수 없다고 물러갔다. 전투 중에 김천일 등이 조선군과 명군에 지원을 요청하였어도 이들은 냉담하였다.

세 번째는 단결부족이다.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목사 서예원은 수시 마찰하였고, 여러 부대가 모여 있어 통솔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차 싸움 때는 진주목사 김시민과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단결하였는데 2차 싸움에는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은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진주성은 함락되었지만, 왜군은 당초 목적인 호남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왜군은 진주성 전투의 피로가 겹쳐서 하동, 구례, 순천 등지를 잠시 분탕질하고 다시 경상도로 돌아왔다. 당초에 전라도를 점령해 군량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는 완전히 빗나갔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