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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극후 등 2차 장성의병, 진주성에 들어가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36회 김극후 등 2차 장성의병, 진주성에 들어가다.

6월 3일에 김경수가 군오를 점검하니 의병이 836인, 의곡이 692섬이었다.

의병은 김홍우가 170인, 김언희 100인, 윤황 100인, 김신남 200인, 김인혼 65인 그리고 김경수가 201인을 모아서 도합 836명이었고, 의곡은 김언희가 50섬, 윤황 70섬, 김신남 39섬, 김인혼 47섬, 김경수가 414섬을 모아 도합 692석이었다. 이를 보면 김경수가 가장 많은 의병과 의곡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1차 의병과 비교하여보면 의병은 1차의 1,651명 보다 절반 정도에 그쳤으나 의곡은 1차의 496석 보다 40% 더 많았다. 1차 의병 시 겪은 군량의 중요성을 감안한 조치인 듯하다.

2차 의병에는 김경수의 두 아들 극후․극순과 집안 동생 김인혼이 참여하고 있었다. 김경수는 두 아들 극후, 극순과 족제 인혼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이미 병들고 늙어 싸움에 나갈 수 없으니 차라리 갑자기 세상 모든 일을 모르게 되고 싶다.” 하였다.

김극후 등이 말하기를 “대륜으로 말하자면 어버이를 떠날 수 없고 대의를 생각하면 임금을 저버릴 수 없으니 만일 왕명을 받았다면 청하옵건대 먼저 국난에 나가 죽음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하니, 김경수가 개연히 얼마 있다가 말하기를 “내 아들이 능히 곰과 물고기를 분별할 줄 아니 비록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다.”하면서 김극후 등에게 의병을 이끌고 군량을 운반하여 영남으로 고종후를 따라가도록 하고, 앞서 합병하여 나라 위해 싸워 죽자는 뜻의 편지를 고종후에게 보냈다.

고종후는 김경수와 인척간이다. 고종후의 외가가 장성의 울산 김씨이다. 고종후 어머니는 김경수의 사촌 형인 대사간 김백균의 딸이다. 의병장 고종후는 1592년 12월에 광주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복수’를 군호(軍號)로 삼고 여러 곳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그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부친 고경명과 아우 고인후의 복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의 격문에는 “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상중(喪中)에 앓고 누어 아직까지 왜적들과 한 하늘에서 살아 있다. 이번에 첨지 홍계남이 먼저 대의로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마음은 다 같은지라, 누군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나도 비록 못났으나 아버지의 장례도 마쳤으니 이 몸이 죽어도 유감이 없다. 상복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동지들과 더불어 적과 싸워 죽을 계획을 하고자 한다. 태인(泰仁), 진원(珍原), 장성(長城)의 세 고을 수령들 또한 하늘에 사무친 통분을 품고 있어, 도체찰사는 그들에게 군사를 합하여 원수를 갚도록 하고 법도와 규칙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하였다.

아아, 호남지방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기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 중에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어찌 부자․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다행히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더라도 서리와 이슬 속에서 병을 얻어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면 또한 이 원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선친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전라도의 여러분들이 나랏일에 같이 죽기를 기약하여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고서 선친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하였으니, 진실로 형제 같은 의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업을 끝까지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여러분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의 일처럼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부하 무인들은 이미 다 의병으로 달려왔다. 원컨대 나를 불초하다고 생각지 말고 담양에서 피를 마셔 맹세하던 일을 다시 한 번 회상하여 일제히 광주에 모여서 맹약을 맺고 함께 싸우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군사 징발이 여러 갈래로 겹쳤기 때문에 민간에는 장정이 없어서 모집된 군사가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그는 부친과 친한 양호체찰사 정철에게 군사를 부탁을 하였다.

정철은 절의 노비(寺奴)를 의병에 종속시켜 주었고, 고종후는 천 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남으로 들어갔다.

6월 7일에 김극후 등은 의병을 이끌고 담양에 이르렀다. 8일에는 조련을 하였다. 9일에 장성의병은 순창에 도착하였다. 10일에 남원에 이르러 왜적이 대거 침범한다는 정보를 듣고 장성의병은 밤새워 경상도로 달려갔다.

5월에 부산으로 철수한 왜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풍신수길의 엄명에 따라 진주성 공격을 준비한다. 왜군은 제1대에서 제6대까지 편성했고 병력은 도합 10여 만 명이었다. 진주성 공략은 1차 진주성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전이었고, 전라도를 다시 침공하고 위한 작전이었다.

6월 11일에 장성 의병은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였다. 12일에 김극후 등은 고종후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우리들이 행군하여 함양에 당도하였는데 길이 통하고 막힘을 모르므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기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13일에 고종후의 답서가 왔다. 장성의병은 곧 진주로 달려갔다. 6월 15일에 장성의병은 진주에 도착하여 고종후와 합병하고 성을 지키는데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이 적세가 매우 강성함을 보고 병을 핑계하고 성을 빠져나가려 하니 김극후가 분개를 이기지 못해 김천일 등에게 강력히 말하여 장윤으로 서예원을 대신하여 장계를 올려 임금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6월 15일의 <남문일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적혀 있다. 첫째는 장성의병이 고종후 의병과 합병한 것이고, 둘째는 김극후가 진주목사 서예원의 무능에 분개한 것이다.

먼저 6월 15일에 장성의병이 진주성에 들어간 사실부터 알아보자. 6월 중순에 왜적이 진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도원수 김명원은 급히 전군에 명령해 의령에 집결토록 했다. 권율, 선거이, 이복남, 황진, 최경회, 고언백, 정명세, 이종인등 관군과 김천일, 고종후, 곽재우 등 의병장들이 의령에 모였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했다.

먼저 창의사 김천일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외쳤다. “왜적의 계책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들이 다만 진주만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호남에 가까이 있는 곳이니 실로 입술과 이빨의 관계인데, 진주가 없어지면 호남 또한 없어지고 말 것이다. 혹시 진주성을 비움으로써 왜적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고개를 돌렸다. 명나라가 성을 비우자는 입장이고 조선 조정도 이에 동조하고 있으며, 더구나 왜군이 30만 명이라는 소문도 있으니 얼마 안 되는 군사를 가지고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천일이 다시 나섰다. "여러 장군들이 진주성을 안 지키겠다면 나 혼자라도 진주성을 지키겠소. 제아무리 적이 10만 대군일지라도 나는 적이 두려워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오.”

이런 김천일의 충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물러갔다. 권율, 이복남 등은 운봉으로 후퇴했고 순변사 이빈은 산음으로, 곽재우도 창녕으로 돌아갔다. 여러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천일과 같이 진주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로운 장수들도 있었다. 충청병사 황진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 주로 호남 장수들이었다. 이들은 호남과 진주가 입술과 이빨의 관계이고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신념에서 진주성을 지키기로 하였다.

6월 14일에 창의사 김천일은 양산숙, 김상건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이미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현령 김준민의 부대가 들어와 있었다.

성에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고을에서 피난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거나 여자 아니면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날 저녁 늦게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이 부랴부랴 성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명나라 군사를 상주에서 영접하던 중이었다.

15일에 충청병사 황진(黃進)이 해미현감 정명세, 태안군수 윤구수, 당진현감 송제, 황대중 등이 입성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도 문홍헌, 고득뢰, 최희립과 함께 입성하였고, 복수의병장 고종후도 부장 오유와 오빈, 김인혼, 김극후, 김극순, 김언희, 고경형 등과 함께 뒤따라 왔다.

이 때 김언희는 복수의병장 고종후를 만나는 자리에서 적을 섬멸하기로 맹세하고 다음 시를 읊었다.

남문에서 거의할 때는 위험을 뜻하였건만
오늘날 맹세는 사생을 같이하기로 하였네.
외로운 혼백이 적검(賊劍) 앞에 사라짐을 한탄마라
충신이란 그 이름 천추에 빛나리.

이어서 전라좌의병의 부장이며 사천현감인 장윤도 남응개, 김대민, 김신민, 웅의병장 이계련, 적개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 태인 의병장 민여운이 진주성에 들어왔다. 또한 광양 도탄의병장 강희열과 강희보 형제, 해남의병장 임희진, 영광의병장 심우신 등도 진주성에 들어왔다.

이들 군사들은 모두 합해 3천500명 정도였다. 진주성 관군 2천500명과 합하면 모두 6천명. 성안의 백성들은 6만 명 남짓 됐다.

한편 6월 15일에 가등청정이 이끄는 1진을 비롯해 10만 명의 왜군은 김해와 창원에 집결했다. 6월 16일에는 왜군의 선봉이 함안에 도착했다. 그때 이빈․권율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시에 무너져 달아났다.

18일에 왜군이 함안으로부터 정암나루로 건너오자, 경상 의병장 곽재우는 형세가 불리해 후퇴했다. 권율․이빈․이복남 등은 물러나와 산음으로 향했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남원으로 들어갔다. 왜적은 의령에 들어가 노략질했다.

6월 15일 <남문일기>의 두 번째 사실은 김극후가 진주목사 서예원의 무능에 대하여 분개한 것이다. 남문일기에는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이 적세가 매우 강성함을 보고 병을 핑계하고 성을 빠져나가려 하니 김극후가 분개를 이기지 못해 김천일 등에게 강력히 말하여 장윤으로 서예원을 대신하여 장계를 올려 임금에게 알리고자 하였다.”고 적혀 있다.

사실 문관인 진주목사 서예원은 진주성 싸움 내내 무능과 비겁함을 보였다. 창의사 김천일과의 갈등도 심각하였다. 장윤이 서예원을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는 진주성 싸움 전개과정에서 다시 이야기 될 것이다.

김세곤(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