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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맹주 김경수, 2차 의병을 일으키다.
작성자 관리자
내용
제35회 맹주 김경수, 2차 의병을 일으키다.

다시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1593년 2월 하순에 1차 장성의병이 해산하였다. 그런데 맹주 김경수는 5월말에 다시 2차 의병을 일으킨다.

5월 29일에 장성의병 맹주 김경수는 명나라 군대가 남하한다는 정보를 듣고 곧 장성 남문으로 나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이미 모집한 의병과 곡식을 가지고 모이도록 하였다.

(격문 내용은 부록 참조 )

1593년 4월 들어 임진왜란의 판세는 왜군에게 불리해졌다. 1월 8일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고, 2월 12일에는 전라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사가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했다.

서울로 퇴각한 왜군은 다급해졌다. 명군과 조선군의 포위 속에 마음대로 서울 근교를 돌아다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서울이 무덤이 될 수도 있었다. 반면 가등청정은 함경도에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인질로 잡아 기세가 등등했다.

이럴 즈음에 왜장 소서행장은 은밀하게 명나라에 강화회담을 요청한다.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과 1월 27일에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바 있는 제독 이여송도 재빠르게 강화에 임한다. 일본이 명나라를 쳐들어오지 않겠다는 조건만 수락하면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3월부터 두 나라의 강화교섭은 빠르게 진전된다. 일본은 소서행장이 명나라는 심유경이 교섭대표로 나섰다. 먼저 명나라는 일본에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조선에서 완전 철병하고 점령지를 모두 반환할 것
(2) 포로로 잡힌 임해군과 순화군 등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들을 석방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덧붙여 명나라 심유경은 소서행장에게 서울을 비우라고 통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군을 몰살하겠다고 경고했다.

드디어 소서행장과 심유경은 3월 15일에 서울 용산에서 1차 회담을 연다. 이 회담에서 소서행장은 서울에서 자진 철수하겠으니 왜군의 철수를 보장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한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소서행장의 요구를 수락한다.

4월 18일에 소서행장은 서울 용산의 창고에 쌓아뒀던 곡식 2만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울에서 철수한다. 명군은 조선군에게 일체 군사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치를 내린다.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하는 조선군의 군사행동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참, 어이없게도 명군과 조선군은 왜군을 추격했으나 왜군은 단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고스란히 부산에 집결한다.

이 당시에 명군 총병 유정은 유격 오유충과 더불어 대구에 있었고, 참장 낙상지와 유격 송대빈은 남원에, 유격 왕필적은 상주에 있었다.

조선군은 창녕, 의령 등에 포진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선산에, 순변사 이빈은 의령에 주둔했고, 전라병사 선거이, 충청병사 황진, 전라방어사 이복남 등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전라감사 권율도 창녕에 있었다.

또한 창의사 김천일과 복수의병장 고종후도 경상도에 있었고, 경상 우병사가 된 전라우의병장 최경회, 전라좌의병의 장윤도 경상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6월 1일에는 장성현감 이귀가 제공(諸公)과 함께 정예 40명을 뽑아 담용군(膽勇軍)이라 부르고 기묘한 계책을 써서 고패(高沛), 박검동(朴儉同) 등 왜적의 간첩을 사로잡고, 또 읍병 300명을 조련하는데 절강병법으로 가르쳐서 왜적을 막도록 했다.

이귀(李貴 1557~1633)는 호가 묵재로서 율곡 이이의 문인이었다.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논변이 탁월하였다. 임진왜란 때 그는 선조 임금을 호위하였고 1593년 2월에 장성현감에 부임하였다.

장성현감 이귀는 정예군 40명을 뽑아 담용군이라 이름 붙이고 고패, 박검동 등 왜적의 간첩을 잡는다. 담용군은 담력 있고 용맹스러운 군사라는 뜻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특전사 군인과 비슷하다.

이귀는 또 병사 300명을 절감병법(浙江兵法)으로 조련하였다. 절감병법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창안한 왜구(倭寇) 격퇴에 명성을 올린 실전전술이다. 그의 책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온다. 기효신서는 1560년에 척계광이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한 병서(兵書)이다. 권1 속오편(束伍編)으로부터 권18 치수병편(治水兵編)에 이르는 총 18권으로 되어 있다.

당시 왜구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습지가 많은 중국의 절강 지방 등을 노략질하였다. 명군이 이들을 소탕하는 데에는 종래 북방 유목민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편제된 군제(軍制)와 무기 및 전술이 적합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은 왜구의 기습적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부대(小部隊)의 운용과 접근 전에 적합한 전술을 고안하였다. 이 병법(兵法)이 절강(浙江) 지방에서 나왔다고 하여 절강병법(浙江兵法)이라고 하는데, 이는 명확한 지휘편제와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속오법(束伍法)을 채택하고, 조총(鳥銃)․등패(藤牌)․낭선(狼据)․장창(長槍)․권법(拳法) 등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기효신서 책이 조선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 이후였다. 선조는 명나라의 이여송의 군대가 절강병법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효신서 책을 입수하여 그 전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장성현감 이귀도 기효신서를 입수하였나 보다. 그리하여 읍병 300명을 절감병법으로 훈련시켰다.

계속하여 <남문일기>를 읽어보자

6월 2일에 고창의 김홍우가 아우 광우를 시켜 의사(義士) 170인과 의곡 72섬을 보내왔다. 이 당시에 고창현감 정운룡이 임소에서 죽어 김홍우가 조정의 명령으로 그 읍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고창현감 정운룡(1542~1593)은 현감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다 과로사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향년 52세였다. 정운룡이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김홍우에게 고창현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김광우는 김홍우의 동생으로 남문창의에 같이 참여한 선비이다.

이어서 김언희가 의사 100인과 군량 50섬을 인솔해 오고, 윤황 등이 사람을 보내어 의사 100여인, 군량 70섬을 보내왔다.

김언희(金彦希 1562~1593)는 담양 출신으로 김경수의 문인이었다. 1차 의병 때 의병장 김제민과 함께 활동한 바 있는 그는 또 다시 2차의병에 참여한 것이다. 윤황(1562~1597)은 무안 출신으로 1차 의병에도 참여한 바 있는데 2차 의병 시에도 사람을 보내어 의병과 의곡을 보내왔다.

이어서 김신남이 의사 200인과 의곡 39섬을 이끌어 오고, 김인혼이 의사 65인과 군량 47섬을 인솔하여 왔다.

오암 김신남(金信南 1552~1598)은 오천 김경수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1차 의병에도 참여하였는데 이번에도 참여한 것이다. 김인혼(金麟渾 1560~1593)은 하서 김인후의 종제로서 집안 형인 남문창의 맹주 김경수가 남문에서 창의할 때 진력하였고, 2차 의병에도 참여하였다.

2차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오천 김경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김신남․김인혼은 김경수의 친척이고 김언희는 김경수의 제자이며, 고창의 김홍우는 김경수와 친분이 깊다.

김세곤( 역사인물 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부록 : 오천 김경수의 통문(通文) 1593년 5월 29일

지금 명군이 남으로 내려오니 향하는 곳마다 적을 쓰러뜨려 평양의 남은 적도 이미 섬멸하였고, 개성의 남은 적도 한 번 쳐서 모두 없애니, 웅장한 위엄이 우레같이 떨쳐 흉한 넋이 저절로 쓰러진다.

동쪽으로 임금의 수레를 맞이하고 서쪽으로 선왕 先王의 능침을 청소하는 것을 아침이나 저녁에 보게 될 것인즉 이것은 진실로 삼한(三韓)에 없었던 경사(慶事)이니 이미 끊어진 목숨을 연장시켜주고 물불에서 건져 준 은혜는 가히 형용치 못할 것이다.

이 나라에 사는 백성으로서 장차 어찌 보답을 안 하겠는가. 마땅히 대광주리에 음식을 담고 병에 장(醬)을 담아 들에서 영접하여 먹여야 할 것이다. 비록 살을 배어 준다 하여도 무엇이 아깝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도에는 아직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버린 지 오래된 뼈에도 고기를 대접하니 나머지 결단 난 7도에 비하면 아직도 탕(蕩)국을 끓일 만한 재료가 있으니 만일 이 도(道)로부터 시작하여 ‘명군에게 먹이는(天兵犒餉)’ 장소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노고를 위로하는 정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이며, 기뻐서 뛰는 뜻을 나타 낼 연유가 없으니, 가히 목말라 마시는 자에게 천천히 하라 하고 굶주려 먹는 자에게 급하지 않다고 하여 오늘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관군을 대접하고 의병을 먹이는 것에 참으로 마을이 텅 비고 재력이 다한 것을 알지만, 만일 혹 내가 ‘머리 풀고 왼쪽으로 옷깃하는 야만의 풍속(被髮左袵)’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이 미친다면,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라도 뛰고 춤추며 기뻐하겠거늘 하물며 선비의 대열에 있는 이들이 힘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각기 그 관(官)에서 별도로 유사(有司)를 정하고 백성들에게 두루 일러서 그 빈부에 따라 쌀과 소를 거두고 이 달 보름 전에 남원 동쪽에 급히 모여 고개를 넘어 길옆에서 명군을 대접한다면 명나라 황제 은혜의 극진함을 전부 다 보답을 못하더라도, 족(足)히 우리나라 신민 臣民들이 감사함을 아는 뜻은 표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모든 군자 君子들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 김경수의 문집 오천집에는 ‘명군을 대접하자는 통문(天兵犒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국역 남문창의록․오산사지와 국역 오천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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